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3강(행15:1-16:5)"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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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도행전 제13강
말씀 사도행전 15:1-16:5
요절 사도행전 15:11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오늘 말씀은 구원에 있어서 은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이야기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 가는 구원, 그리고 이루어질 구원이 그것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구원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화하는 삶을 살며 현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13장부터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 세계로 전파되자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할례와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부딪히게 되는 불가피한 충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충돌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고 우리는 어떤 믿음이 필요합니까?
제1장 율법의 의와 싸우는 바울(1-5)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 돌아가 선교보고대회를 가지며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자극을 받고 이방신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것이 있다며, 자기 돈을 들여서 먼 안디옥까지 찾아 왔습니다.
1절을 봅시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이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 역시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주장할까요?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음 더하기 율법의 준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이지만 그 완성은 할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고 또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99.9%했으니 너는 최소한 0.1%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00%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불행과 정죄와 어두움으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를 믿는 자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두움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는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박했습니다. 바울로서도, 안디옥 교회로서도 그런 유대인들의 가르침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안디옥 교회 모든 이방 신자들은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2절을 보면,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아마도 투사 기질이 강한 바울이 앞장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때로는 책상을 쾅쾅 쳐가며 싸웠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싸운 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도 좋고 율법도 좋은데 복음이 훨씬 더 좋아’라고 할 수도 없고, ‘복음도 좋긴 좋은데 거룩한 율법이나 고상한 사상을 플러스하면 더 좋지.’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입니다.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큰 죄악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8에서 누구든지 자신이 전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2b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 교회 중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교회의 전송을 받으며 안디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가면서 중간 경유지인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와 사마리아 센터에 들려 선교보고 대회를 가졌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와 그로인한 성령의 역사를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윽고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온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은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한창 은혜로운 보고를 하고 있는데, 몇몇 할례당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 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되었지만, ‘예수님 + 할례’의 공식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얼마나 율법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역할을 잘 몰랐습니다. 갈라디아서 3:24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초등교사는 무지를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죄인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주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는 깨닫게 해 주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절망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는 오직 은혜로 살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율법은 그 고유의 역할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구원을 얻고 또 구원을 얻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갖도록 성장하는 동인도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은 후 ‘성화의 과정’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1:17에서 오직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성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방향은 이러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여김을 받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언제나 선한 행위를 동반합니다. 아우구스부르그 신앙 고백서는 마틴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이룬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 기록했고, 루터가 확인했으며, 1530년 독일의 개신교도들이 찰스 5세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의롭게 된다. 또한 교회의 이러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또 “믿음은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을 낳는 주체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부를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으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고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부재한 상태에서 모든 욕망과 인간적인 계획은 반드시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파 신자들은 율법의 역할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알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좋은 것으로 여겨왔던 율법에 대한 미련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교와 복음 진리를 내세우는 기독교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유대교에서 할례와 율법을 제거하면 유대교는 뿌리부터 무너지고, 기독교에 율법을 도입하면 복음은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제2장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6-35)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이 대부분이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들 중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나, 학문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매우 합리적으로 주장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고, 모세도 할례를 받았고, 특히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어요. 또 이 자리에 계신 사도님들, 장로님들 다 할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을 수 있단 말이요.”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분연히 일어나더니, 자기의 경험을 기초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7-9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과거 고넬료를 돕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는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구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았고, 이로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만 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깨끗케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를 기초로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 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했습니다.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복음이 주는 은혜와 자유와 기쁨을 상실하고 괴로이 노젓는 것과 같은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도 지기 버겨워하는 율법의 멍에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11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베드로는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주 예수의 은혜 외에는 다른 조건이 필요 없음을 단호히 선언합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동일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가 구원의 출발이고, 과정이며, 완성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나 정작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이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새벽기도하고, 소감 쓰고, 양도 열심히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죄의식에 시달리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 신앙생활도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가 쓴 “장래의 은혜(Future Grace)”라는 명저가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채무자의 윤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해 주었을 때, 내가 상대방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데 이것이 ‘채무자의 윤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곧 나도 언젠가는 그를 초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을 빼앗기고 맙니다. 당신이 나를 초대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당신을 초대해야 하는 빚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채무자의 윤리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담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빚으로 생각하고 선물한 사람에게 나도 선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물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사업상의 거래와 같이 되어 버립니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왜곡된 감사로 인해 무가치하게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채무자의 윤리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귀한 생명까지 주셨으므로 나도 그 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프란시스 하버갈(Francis Havergal)이 지은 찬송가에는 “너 위해 몸을 주건만”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는 구절이 눈에 보입니다. 이 찬송은 잘못하면 채무자의 윤리를 부추기는 찬송이 되기 쉽습니다. 채무자 윤리에 기초한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되어버립니다. 선한 행실과 믿음의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막대한 채무를 할부로 상환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렇게 채무자의 윤리에 기초해서 신앙생활하게 되면, 신앙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어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앗아가고 사람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결코 ‘채무자의 윤리’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껏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장래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자의 모든 삶이 이 은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달고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채무자의 윤리에서 벗어나 바다와 같이 크고 넓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요구하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최소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요구합니다. 특히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밥을 얼마나 많이 사주었는데, 밥그릇을 세어 보아라. 이 괘씸한 놈!” 이라고 판단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반의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학기말만 되면 다시는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채무자의 윤리가 아니라 ‘채권자의 윤리’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채권자의 윤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자기 권리를 주장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축복을 주시지 습니까? 왜 저 사람은 잘 나가고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 나이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채권자의 윤리를 우리에게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도 하나님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만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므로 아무 값없이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까요?
또한 우리가 목자로서 깊이 배워야 할 것은 사람을 섬길 때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기보다 먼저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은혜에 기초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기초가 전혀 없이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자들은 구원을 받기 전에 우선 사람부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몹쓸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새 인생을 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삶을 살았던 상관하지 말고 단순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도록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복음의 말씀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진리는 누구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방언을 못하면 구원이 불안하고 방언을 하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 밖에 있으면 구원이 불안하고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작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이 불안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어떤 분은 목자님을 바꾸면 구원이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외적인 할례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도, ‘house church’에 다니는 사람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설득력 있게 말하자 시끄럽던 자리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침묵을 깨고, 바울과 바나바가 입을 열어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펼쳐 보이신 기적과 표적을 증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복형제인 야고보가 입을 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가 그토록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저자입니다. 할례주의자들은 아마도 이 야고보가 자기들 편을 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베드로가 증거한 하나님의 역사와 일치한다고 확증했습니다. 16-18절은 아모스 9:11,12의 인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실 때 유대의 남은 자들과 남은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고넬료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이방선교,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신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에 기초한 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9,20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는 것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다음의 네 가지만은 멀리하기를 바랍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의 제단에 바쳐지고 나온 음식’을, ‘음행’은 ‘가까운 친척들끼리 결혼하는 것이나 이방신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남녀가 몸을 섞는 것’을 말합니다. ‘목매어 죽인 것’은 ‘피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은 짐승’을 말하고, ‘피’는 ‘피를 먹는 것, 그러니까 선지국 같은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것들을 멀리해야 할까요? 21절을 봅시다. 당시 회당예배 때는 언제나 모세오경을 읽었는데, 거기서 먹거리의 구별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았지만, 이방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배드린 후에 푸닥거리할 때 올라갔던 돼지 대가리를 들고 와서 맛있게 먹는다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우리 자매님들은 개고기를 듣는 것조차도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주일 써빙으로 보신탕 전골을 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비록 이런 것들이 구원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목숨 걸고 지켜왔습니다. 한데 갑자기 쓰레기 버리듯 처분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너무 큰 충격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양보해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일종의 에티켓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 어떤 것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때문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비본질에 대해서는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2절을 봅시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바사바라하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치 대표들처럼 위장하고 율법의 짐을 형제자매에게 지우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대표단들은 현장에 가서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 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28,29절을 봅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총회가 결정한 사항을 전해 듣고 몹시 기뻤습니다. 복잡하게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할례 문제가 해결되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으면서 더욱더 힘써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율법의 멍에는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자유롭게 돕는다고 방목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습니다.
36절을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돌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단 며칠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에게 청합니다. “다만 마가라 하는 요한도 함께 데리고 갑시다.” 바울의 목소리가 격해집니다. “밤빌리아에서 우리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소.” ‘아니, 옛날 일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야지’, ‘안 돼, 난 연약한 인간 질색이야.’ 결국 두 사람은 치고 박고 싸우고 피차 갈라섰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목자들도 다투고 갈라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니 센터에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이 다툼에 원인을 제공했던 마가는 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할 정도로 성숙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실수도 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제3장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바울(16:1-5)
바울이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그가 제1차 선교여행 때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개척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제자가 섰습니다. 그의 엄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빠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참 좋았는데, 루스드라 지역은 물론이고 좀 떨어진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직한 동역자였습니다. 빌립보서 2:21,22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치 나의 친자식처럼 나를 도와주었습니다.”(현대어성경)라고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이 좋은 디모데를 선교 동역자로 삼았는데, 그에게 무엇을 하도록 합니까? 3절을 봅시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앞에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을 때, 바울을 온 몸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권유했습니다. 왜였습니까? 복음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디모데에게 할례의 표식이 없다면, 유대인들은 곧 그를 ‘유대교 배교자’로 간주할 것이고, 그 결과 바울 일행은 회당과의 유대관계를 잃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할례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데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는 필요합니다.
바울은 접촉점을 찾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전 9:20에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강하고 사랑에서 부드러웠다. 우리는 믿음에 관해서는 돌보다 더 단단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을 울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부드럽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 새 보다 더 유연하며, 모든 것에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마더 베리 선교사님은 한국에 처음 오셨을때 이름을 ‘배 사라’라고 바꾸시고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침대를 버리고 온돌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초청했는데, 그 매운 고추장을 즐겨 드셨습니다. 그때 한국 대표 이사무엘 목자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서는 칼 같고 비본질에 대해서는 갈대 같은 마음, 이것을 예수님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마 10:16). 우리가 양들과의 문화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비본질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진리를 전했고, 이로 인해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했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인생의 길을 갈 때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셨고, 그 은혜가 나를 본향으로 인도하리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과거에 받은 은혜로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바라 볼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장래에 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에 빠져들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항상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장래에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아가기를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우리의 구원과 미래는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진리로 힘을 얻고 08학번 학우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15:1-16:5
요절 사도행전 15:11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오늘 말씀은 구원에 있어서 은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이야기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 가는 구원, 그리고 이루어질 구원이 그것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구원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화하는 삶을 살며 현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13장부터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 세계로 전파되자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할례와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부딪히게 되는 불가피한 충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충돌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고 우리는 어떤 믿음이 필요합니까?
제1장 율법의 의와 싸우는 바울(1-5)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 돌아가 선교보고대회를 가지며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자극을 받고 이방신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것이 있다며, 자기 돈을 들여서 먼 안디옥까지 찾아 왔습니다.
1절을 봅시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이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 역시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주장할까요?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음 더하기 율법의 준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이지만 그 완성은 할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고 또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99.9%했으니 너는 최소한 0.1%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00%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불행과 정죄와 어두움으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를 믿는 자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두움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는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박했습니다. 바울로서도, 안디옥 교회로서도 그런 유대인들의 가르침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안디옥 교회 모든 이방 신자들은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2절을 보면,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아마도 투사 기질이 강한 바울이 앞장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때로는 책상을 쾅쾅 쳐가며 싸웠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싸운 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도 좋고 율법도 좋은데 복음이 훨씬 더 좋아’라고 할 수도 없고, ‘복음도 좋긴 좋은데 거룩한 율법이나 고상한 사상을 플러스하면 더 좋지.’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입니다.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큰 죄악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8에서 누구든지 자신이 전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2b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 교회 중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교회의 전송을 받으며 안디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가면서 중간 경유지인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와 사마리아 센터에 들려 선교보고 대회를 가졌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와 그로인한 성령의 역사를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윽고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온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은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두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한창 은혜로운 보고를 하고 있는데, 몇몇 할례당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 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되었지만, ‘예수님 + 할례’의 공식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얼마나 율법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역할을 잘 몰랐습니다. 갈라디아서 3:24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초등교사는 무지를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죄인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가운데 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주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는 깨닫게 해 주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절망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는 오직 은혜로 살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율법은 그 고유의 역할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구원을 얻고 또 구원을 얻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갖도록 성장하는 동인도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은 후 ‘성화의 과정’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1:17에서 오직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성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방향은 이러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여김을 받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언제나 선한 행위를 동반합니다. 아우구스부르그 신앙 고백서는 마틴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이룬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 기록했고, 루터가 확인했으며, 1530년 독일의 개신교도들이 찰스 5세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의롭게 된다. 또한 교회의 이러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또 “믿음은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을 낳는 주체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부를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으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고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부재한 상태에서 모든 욕망과 인간적인 계획은 반드시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파 신자들은 율법의 역할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알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좋은 것으로 여겨왔던 율법에 대한 미련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교와 복음 진리를 내세우는 기독교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만일 유대교에서 할례와 율법을 제거하면 유대교는 뿌리부터 무너지고, 기독교에 율법을 도입하면 복음은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제2장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6-35)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이 대부분이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들 중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나, 학문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매우 합리적으로 주장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고, 모세도 할례를 받았고, 특히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어요. 또 이 자리에 계신 사도님들, 장로님들 다 할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을 수 있단 말이요.”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분연히 일어나더니, 자기의 경험을 기초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7-9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과거 고넬료를 돕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는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구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았고, 이로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만 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깨끗케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를 기초로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 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했습니다.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복음이 주는 은혜와 자유와 기쁨을 상실하고 괴로이 노젓는 것과 같은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도 지기 버겨워하는 율법의 멍에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11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베드로는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주 예수의 은혜 외에는 다른 조건이 필요 없음을 단호히 선언합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동일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가 구원의 출발이고, 과정이며, 완성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나 정작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이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새벽기도하고, 소감 쓰고, 양도 열심히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죄의식에 시달리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 신앙생활도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가 쓴 “장래의 은혜(Future Grace)”라는 명저가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채무자의 윤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해 주었을 때, 내가 상대방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데 이것이 ‘채무자의 윤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곧 나도 언젠가는 그를 초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을 빼앗기고 맙니다. 당신이 나를 초대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당신을 초대해야 하는 빚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채무자의 윤리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담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빚으로 생각하고 선물한 사람에게 나도 선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물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사업상의 거래와 같이 되어 버립니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왜곡된 감사로 인해 무가치하게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채무자의 윤리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귀한 생명까지 주셨으므로 나도 그 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프란시스 하버갈(Francis Havergal)이 지은 찬송가에는 “너 위해 몸을 주건만”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는 구절이 눈에 보입니다. 이 찬송은 잘못하면 채무자의 윤리를 부추기는 찬송이 되기 쉽습니다. 채무자 윤리에 기초한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되어버립니다. 선한 행실과 믿음의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막대한 채무를 할부로 상환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렇게 채무자의 윤리에 기초해서 신앙생활하게 되면, 신앙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어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앗아가고 사람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결코 ‘채무자의 윤리’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껏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장래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자의 모든 삶이 이 은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달고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채무자의 윤리에서 벗어나 바다와 같이 크고 넓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요구하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최소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요구합니다. 특히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밥을 얼마나 많이 사주었는데, 밥그릇을 세어 보아라. 이 괘씸한 놈!” 이라고 판단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반의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학기말만 되면 다시는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채무자의 윤리가 아니라 ‘채권자의 윤리’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채권자의 윤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자기 권리를 주장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축복을 주시지 습니까? 왜 저 사람은 잘 나가고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 나이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채권자의 윤리를 우리에게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도 하나님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만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므로 아무 값없이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까요?
또한 우리가 목자로서 깊이 배워야 할 것은 사람을 섬길 때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기보다 먼저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은혜에 기초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기초가 전혀 없이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자들은 구원을 받기 전에 우선 사람부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몹쓸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새 인생을 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삶을 살았던 상관하지 말고 단순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도록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복음의 말씀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진리는 누구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방언을 못하면 구원이 불안하고 방언을 하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 밖에 있으면 구원이 불안하고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작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이 불안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어떤 분은 목자님을 바꾸면 구원이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외적인 할례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도, ‘house church’에 다니는 사람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설득력 있게 말하자 시끄럽던 자리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침묵을 깨고, 바울과 바나바가 입을 열어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펼쳐 보이신 기적과 표적을 증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복형제인 야고보가 입을 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가 그토록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저자입니다. 할례주의자들은 아마도 이 야고보가 자기들 편을 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베드로가 증거한 하나님의 역사와 일치한다고 확증했습니다. 16-18절은 아모스 9:11,12의 인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실 때 유대의 남은 자들과 남은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고넬료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이방선교,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신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에 기초한 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9,20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는 것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다음의 네 가지만은 멀리하기를 바랍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의 제단에 바쳐지고 나온 음식’을, ‘음행’은 ‘가까운 친척들끼리 결혼하는 것이나 이방신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남녀가 몸을 섞는 것’을 말합니다. ‘목매어 죽인 것’은 ‘피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은 짐승’을 말하고, ‘피’는 ‘피를 먹는 것, 그러니까 선지국 같은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것들을 멀리해야 할까요? 21절을 봅시다. 당시 회당예배 때는 언제나 모세오경을 읽었는데, 거기서 먹거리의 구별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았지만, 이방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배드린 후에 푸닥거리할 때 올라갔던 돼지 대가리를 들고 와서 맛있게 먹는다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우리 자매님들은 개고기를 듣는 것조차도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주일 써빙으로 보신탕 전골을 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비록 이런 것들이 구원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목숨 걸고 지켜왔습니다. 한데 갑자기 쓰레기 버리듯 처분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너무 큰 충격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양보해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일종의 에티켓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 어떤 것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때문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비본질에 대해서는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2절을 봅시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바사바라하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치 대표들처럼 위장하고 율법의 짐을 형제자매에게 지우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대표단들은 현장에 가서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 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28,29절을 봅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총회가 결정한 사항을 전해 듣고 몹시 기뻤습니다. 복잡하게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할례 문제가 해결되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으면서 더욱더 힘써 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율법의 멍에는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자유롭게 돕는다고 방목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습니다.
36절을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돌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단 며칠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에게 청합니다. “다만 마가라 하는 요한도 함께 데리고 갑시다.” 바울의 목소리가 격해집니다. “밤빌리아에서 우리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소.” ‘아니, 옛날 일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야지’, ‘안 돼, 난 연약한 인간 질색이야.’ 결국 두 사람은 치고 박고 싸우고 피차 갈라섰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목자들도 다투고 갈라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니 센터에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이 다툼에 원인을 제공했던 마가는 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할 정도로 성숙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실수도 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제3장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바울(16:1-5)
바울이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그가 제1차 선교여행 때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개척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제자가 섰습니다. 그의 엄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빠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참 좋았는데, 루스드라 지역은 물론이고 좀 떨어진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직한 동역자였습니다. 빌립보서 2:21,22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치 나의 친자식처럼 나를 도와주었습니다.”(현대어성경)라고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이 좋은 디모데를 선교 동역자로 삼았는데, 그에게 무엇을 하도록 합니까? 3절을 봅시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앞에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을 때, 바울을 온 몸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권유했습니다. 왜였습니까? 복음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디모데에게 할례의 표식이 없다면, 유대인들은 곧 그를 ‘유대교 배교자’로 간주할 것이고, 그 결과 바울 일행은 회당과의 유대관계를 잃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할례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데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는 필요합니다.
바울은 접촉점을 찾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전 9:20에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강하고 사랑에서 부드러웠다. 우리는 믿음에 관해서는 돌보다 더 단단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을 울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부드럽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 새 보다 더 유연하며, 모든 것에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마더 베리 선교사님은 한국에 처음 오셨을때 이름을 ‘배 사라’라고 바꾸시고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침대를 버리고 온돌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초청했는데, 그 매운 고추장을 즐겨 드셨습니다. 그때 한국 대표 이사무엘 목자님은 크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서는 칼 같고 비본질에 대해서는 갈대 같은 마음, 이것을 예수님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마 10:16). 우리가 양들과의 문화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비본질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진리를 전했고, 이로 인해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했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인생의 길을 갈 때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셨고, 그 은혜가 나를 본향으로 인도하리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과거에 받은 은혜로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바라 볼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장래에 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에 빠져들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항상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장래에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아가기를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우리의 구원과 미래는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진리로 힘을 얻고 08학번 학우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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