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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2강(행13:1-14:28)"믿음의 문을 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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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277회 작성일 08-02-17 14:02

본문

2008년 사도행전 제12강
말씀 사도행전 13:1-14:28
요절 사도행전 14:27
믿음의 문을 여셨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2장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3-28장까지는 복음이 유대 땅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은 세계 선교의 첫 단추를 꿰는 부분으로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Apostolic Journey)입니다. 바울은 이 여행을 통해  2년간(A.D 47~49), 4개의 교회를 개척합니다. 각 지역마다 성령께서 친히 굳게 닫힌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장차 우리를 통해 ‘믿음의 문’을 여시고 축복하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선교사를 파송하는 안디옥 교회(13:1-3): 유대와 사마리아 복음 역사의 중심이 예루살렘 교회였다면 이방 선교의 중심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1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선지자’는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양들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교사’는 ‘일반적인 성경선생’입니다. 그들 중에 ‘니게르’는 ‘피부가 검다(Negro)’는 뜻으로 시므온은 유대계 아프리카인이요,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이므로 루기오도 유대계 아프리카인입니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왕족입니다. 이처럼 출생지, 피부색, 신분이 달랐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능한 성경선생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탁월한 성경선생이 설 때 그 공동체를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2절을 보면 이들이 마음을 바쳐 주님을 섬기고자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국제적인 성경선생(International Bible Teacher)’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유능한 성경 선생이요 기둥 같은 목자들입니다. 이들을 파송하고 나면 안디옥 교회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교회를 꾸리기보다 먼저 세계 선교를 위해 성경선생을 파송했습니다. 3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로 나가는 그들을 마음 바쳐 지원하기 위해 금식기도하며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둘째, 구브로(Cyprus)에서(4-12):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되어 가장 먼저 선교지로 삼은 곳은 구브로 지방입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으로서 구리섬(Copper Island)이라 불렸는데, 17년 전 바나바는 아마도 이 고향 땅에서 소유하고 있던 구리 광산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헌납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요한 마가’는 이 섬 동쪽에 위치한 살라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살라미(Salamis)에는 큰 규모의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고 회당도 여러 개 있었습니다.
  섬의 서쪽에 닿은 그들은 ‘바보’(Paphos)라는 마을에서 여정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구브로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사도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훼방의 세력이 있었습니까? 8절을 봅시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마술사 엘루마가 끼어들어서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총독각하, 저들의 말을 듣지 마시오소서. 저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옵니다. 부디 이 사람의 말을 들으소서.” 이 마술사 엘루마는 총독의 종교담당 특보로서 그동안 여러 가지 특혜를 누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총독이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를 듣고 회심하게 되면 마술의 힘이나 마술사 엘루마의 자문을 빌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사도들을 방해하고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습니다.
  그러면 이때 바울은 그를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9,10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바울은 아주 원색적인 용어들을 써 가며 무섭게 마술사를 책망했습니다. 11절을 보면,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책망하며 저주하자 마술사는 그 자리에서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원수를 철저하게 대적하는 투사로서의 바울을 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양들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힘쓰는 원수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라면 몰라도 복음의 원수와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씨(good-mind)만 가지고 목자생활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마술사를 무섭게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마술사가 소경이 돼버리자 총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12). 복음 전하는 종들은 양들을 사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들은 싸워서 물리치는 투사여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목자님은 성장하고 있는 한 자매양이 3개월마다 형제를 갈아 치워가며 소개팅 하는 것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날도 자매는 친구의 소개로 한 카페에서 어떤 형제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목자님은 그 카페에 급습해서 형제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당황한 자매 목자는 이 돌발적인 상황에 큰 충격을 받고 목자님과 함께 그 곳을 속히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오면서 의로운 목자님에게 귀띔했습니다. “목자님, 저 사람 태권도 3단 이예요. 3단. 어쩌시려고 그랬어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태권도 3단 형제님의 손에서 의로운 목자님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그 자매님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변화되었고 형제 사랑을 쫓던 데서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쫓게 되었습니다. 형제와 소개팅 하던 스피릿으로 형제 양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무려 7개의 요회를 개척했고 큰 목자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목자님만 있다면 아마 홍대 근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도 바울의 파이팅 스피릿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대 양들 가까이서 믿지 못하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영적인 싸움을 힘써 싸우는 복음의 투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비시디아 안디옥(Antioch of Pisidia)에서(13-52):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마가 요한은 두려움이 생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먼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회당은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회당 예배는 보통 회당장이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고 난 다음 그곳의 랍비들이나 회당장이 초청한 사람들이 말씀을 증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울 일행이 처음 참석했으므로 회당장은 그를 소개할 겸 해서 그에게 말씀 증거할 기회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는 여유 있게 손짓을 해가며 말씀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16-41절입니다.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관한 정말 훌륭한 설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할 때, 먼저 예수님이 다윗의 씨임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23절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즉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도 증거했습니다. 2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26절입니다.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그는 예수님을 ‘구원의 말씀(this message of salvation)’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 많고 죄 많은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살아계신 구원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구원의 말씀’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30). 다윗은 시편에서 이 예수님을 미리 말했습니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35)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36).
  이렇게 말한 후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38,3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바울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기를 바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이 사람 곧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님을 믿으면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오라고 역설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메시지를 보면, 그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였고, 그 말을 듣고서 모두들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중요한 진리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전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첨가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를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앞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행함으로서 죄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무리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 하고 율법의 의를 이루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영혼은 고통스럽고 신앙생활은 어두웠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확신이 없던 그의 내면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자 하나님이 자신을 크게 인정하시고 의롭게 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불행하고 어두운 이유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구속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이요, 의식적 율법인 제사로부터의 구속이요, 율법의 행위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저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저주와 불행과 부정적인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의식적 율법으로부터 구속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제사와 같은 모든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부터 구속되었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의 의무를 행하면서 살아야 할 책임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직장의 율법, 학생으로서의 율법, 가정주부로서의 율법, 남편의 율법, 아내의 율법, 사명인의 율법 등 수많은 율법의 요구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늘 평가받고 정죄 받고 비교당하며 고통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율법의 요구들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늘 절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의감이 있습니다. 저주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법입니다. 
  이 새로운 법은 은혜의 법이기도 합니다. 43절을 봅시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이 법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법입니다. 은혜란 사람의 노력이 없이 그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할 일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씀을 전하므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싸워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행위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요 이로 인한 공로의식을 즐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선지자는 이미 그 결과에 대해서도 예언했습니다. 40,41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하박국 1:5의 인용인데, 한마디로 상상을 뛰어넘는 심판을 받아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메시지에 대한 반응은 매우 컸습니다. “목자님, 메시지가 너무 좋습니다. 다음 주도 기대할게요.”(42) 다음 주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이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역반응도 컸습니다. 45절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마음에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이에 질세라 그의 말에 반격을 가하며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방했습니다.
  바울이 온 마음을 다 드려서 메시지를 전하고 복음의 씨를 뿌려놓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족들이 찾아와서 훼방을 놓으면 얼마나 힘이 빠지고 절망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온 마음과 진심을 다 드려서 이루어 놓은 역사가 사단의 훼방으로 일순간에 무너질 때에 그 절망감을 알고 있습니다. 없는 시간과 물질을 쪼개서 온갖 정성으로 키운 양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길을 가버릴 때 그 슬픔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냥 가면 그래도 나은데, 목자의 마음을 할퀴고 떠나갈 때에 마음이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래 이제 다시는 양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아야지.” “이렇게 상처만 받을 바에는 목자노릇 해봐야 무엇하나?” 이런 슬픔 때문에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46,47절을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은 힘들 때 이사야 49:6b을 기억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51절에서 그들은 이제 유대인들을 향하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납니다. 움츠려들기보다 땅 끝까지 구원하겠다는 적극적인 방향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적극적인 자세를 기뻐하셨습니다. 48,49절을 봅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방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이 은혜의 법을 듣고 기뻐하며 찬송했습니다. 죄와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번 08학년 역사를 섬길 때 우리 모두 새롭게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이방인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이고니온에서(14:1-7): 두 사도는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이고니온으로 왔습니다(1). 이들이 이고니온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그러자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악감정(惡感情)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돕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반면에 선동하고 악감을 품게 하기는 얼마나 쉽습니까? 또 애를 쓰고 말씀을 전하는데 한편에서 양들에게 의심을 갖도록 만들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일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같은 악감을 가지고 대하고 싶습니다. 악감을 품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 저주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그런 상황에서 그곳에 오래 있었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3). 그때 주의 크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께서 두 사도에게 힘을 주시고, 주께서 친히 표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확실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악감에 대한 싸움은 사도들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힘으로, 또 주의 손으로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역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악감입니다. 악감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악감이 있는 사람이나, 장소에서는 복음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악감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일상적인 것으로 영접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를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감을 품고 있는 양들, 부모님들, 이웃들을 인내하고 복음을 말하면 주의 손이 친히 하시는 크신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루스드라에서(8-18):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악감을 품게 했지만, 복음 역사가 더욱 활발해지자 이제는 두 사도를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남쪽으로 30km 더 걸어서 루스드라라는 로마의 속령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교 회당이 없었고 유대인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신 제우스(Zeus)와 헤르메스(Hermes)가 루스드라를 방문했다는 설이 그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집집을 돌아다니며 머물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거절했고 마지막으로 한 노부부가 그들을 자기 집으로 들여 잠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그 신들은 노부부의 집을 궁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궁궐이 바로 제우스의 신전이라는 것이 전설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와서 두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보니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훌쩍 뛰어 일어나더니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11절을 봅시다. 이 일을 본 무리들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풍채 좋은 바나바가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필시 모든 신들을 조종하는 제우스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키는 작지만 앞장서서 말을 많이 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바울을 제우스의 대변인이요 웅변의 신 헤르메스로 여겼습니다. 두 사도를 신으로 착각한 제우스의 사제는 황소를 끌고 또 꽃다발을 들고 성문 앞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두 사도에게 희생제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핍박만 받았던 사도들이 이곳 루스드라에 와서는 대 환영을 받고 신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유혹이 되었겠습니까?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에 절망감을 극복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에 교만해지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이 순간 미끄러져 큰 수치를 당했습니까?
  1950년대 박태선 장로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많은 불치병자들을 낫게 했습니다. 이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그는 경기도 산골에 신앙촌을 건설하고, 자신을 1조살 먹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정신병자로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그의 유산으로 연예인들과 놀아나다가 탈세혐의로 붙잡혀 감옥에 갔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자기 영광을 물리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힘써야 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 챈 사도들은 옷을 찢고 황급히 군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15절입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이렇게 했는데도, 사람들을 만류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던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신화를 현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우스, 헤르메스는 헬라신화 속의 신들입니다. 신화 속의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화 속의 두 신이 실제로 현실 세계 속으로 내려왔다고 믿었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신격화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신처럼 추앙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공신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창조를 꿈꿉니다. 그 마음에 큰 성공을 갈망하기 때문에 ‘워렌 버핏’이나 이건희 회장 등 돈 잘 버는 사람들의 신화적인 대박이 마치 자기에게도 일어날 것처럼 착각하고 욕심을 부립니다. 젊은이들은 게임의 가상현실 속에서 스스로 무슨 신이라도 된 것처럼 상상하거나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추앙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살아야 할 피조물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는 짓이 헛된 짓인 줄 알았고,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했습니다.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신화 속 가공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7절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 음식도 없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비를 내리심으로써 음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이방인들이 헛된 신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진리를 심었습니다.
  여섯째, 바울의 오뚝이 신앙(19-21):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일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로 내려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충동질하더니,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어 바울을 돌로 치고 그를 성문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거기서 피 흘리며 죽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를 둘러선 바나바와 그의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송곡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이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바로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도시 더베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는 약 30km인데, 돌에 맞아 성한 곳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걸어갔고 복음을 전했을까요? 어떤 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산토끼가 피를 흘리며 눈 위로 지나간 자취를 본 적이 있다. 바로 오늘 바울의 모습이다. 그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주님을 기억하며 숨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바울은 이런 중에도 제자들을 굳게 했습니다. 22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참으로 바울은 오뚝이 같았습니다. 넘어뜨리면 또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일어났습니다. 잠언 24:16을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바울이 넘어질 수 없는 이유는 환난 가운데도 십자가를 포기치 않으신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병약한 자요, 키도 작고 왜소했지만 그 영혼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신자가 사는 목적도 편하게 살고 욕심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신자는 하늘나라 소망과 예수님을 위해 어떤 환난도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바른 자세를 가질 때 마음이 강해지고 믿음이 굳건해 집니다. 
  일곱째, 선교보고(26-28): 두 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 밤빌리아, 앗달리아를 거쳐 그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모아놓고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27,28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고난이나 수고를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행한 큰일이나 승리의 역사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보고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이방 세계의 어두운 현실을 보았습니다. 한 영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력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것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물질과 정욕이 그들의 신이 되고, 욕심과 죄악에 인생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을 전해보면 하나님이 없는 세계가 얼마나 추하고 음란하며 또 얼마나 대책이 없는가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힘입어’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떤 저주도 어떤 절망도 없게 하시고 잘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믿음의 법’을 가지고 새롭게 08학번 영혼들에게 힘차게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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