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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1강(행11:19-12:25)"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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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397회 작성일 08-02-11 21:27

본문

2008 사도행전 제11강
말씀 사도행전 11:19-12:25
요절 사도행전 11:26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기뻐하시고 주권적으로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셨고 베드로의 좁은 마음을 넓히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안디옥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으며(21),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24,25).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렸고, 그 영향력으로 세계 선교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그런 교회로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제1장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11:19-21)
  19절을 봅시다. 스데반의 순교로 일어난 환난 때문에 성도들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흩어졌습니다. 베니게(Phoenicia)는 북경 접경지역이고,  구브로(Cyprus)는 지중해 가까이 있는 섬이었습니다. 안디옥(Antioch)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480km정도 떨어진 수리아에 소재한 도시입니다. 특히 안디옥은 요세푸스(Josephus, AD.100)에 의하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규모로만 보자면 전 로마제국에서 셋째 가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동방의 여왕’, ‘아름다운 안디옥’, 그리고 ‘제국의 셋째 성읍’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해 놓은 도시는 이곳 안디옥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는 잘 다듬어 광을 낸 돌로 포장되었고, 길을 따라 가로수가 심어졌습니다.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이 길을 따라 신혼여행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문명 뒤에는 향락과 사치, 그리고 각종 전염병의 온상지였습니다. 그곳의 자녀들은 절반 이상이 태어나자마자 즉사하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편부, 편모 슬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인종간의 대립이 심해 도시 전역에 증오가 만연했고 외국인의 이주로 인종문제가 나날히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범죄가 창궐하고, 밤거리는 공포와 위험이 가득했고 상당수의 거주자들이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암울의 제국의 현실을 해소하기 위해 아스타르테와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큰 신전을 지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위해 밤마다 여사제들은 밤마다 창녀로 둔갑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핍박의 사정권을 벗어나기 위해 이처럼 멀리 떠나왔지만 전도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장착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했지만,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과 대화할 기회를 얻더니, 대화하는 중에 그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당시 고상한 철학과 사상을 자랑하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구약적인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주 예수’를 말해도 무슨 일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헬라인과 대화하는 중에 자기들이 어디서 오게 되었고,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주 예수를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봅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시고 적극적으로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니 그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막상 예수를 전한 몇몇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을 말한 구브로 몇 사람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중 한 사람도 아니었고,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120문도 중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구브로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큰 뜻을 품고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흩어져 사는 동안 헬라인과 대화할 기회를 얻어 주 예수를 전파했고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섬기며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의지와 결단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이름 없는 사람보다 유명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면 사람들이 더 잘 믿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반면에 목자 경력도 얼마 안 되고, 제자양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오랫동안 해도 되지 않았고, 가방 끈 짧은 자신이 크게 보이면 헬라인과 같은 대학생들이 두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요즈음 대학생들이 극도로 헬라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다고 판단하시 쉽습니다. 요즘 세대들이 게임이나, 먹고 노는 것에 관심이 많지, 무슨 영적인데 관심이 있을까? 저렇게 허우대 멀쩡한 학생들이 나보다 뭐가 부족해서 나와 성경을 공부하겠는가?  이런 선입견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히 예수 이름 한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눈에 보이는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마음이 좌우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납니다. 안디옥 교회는 특별히 설교 잘하는 사람, 특별히 말재주 좋은 사람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야말로 이름 없는 구브로 몇 사람과 함께 주의 손이 직접 개척한 교회입니다. 다만 복음이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 예수를 전하면 됩니다. 비록 이름 없는 사람이라도, 흩어진 삶을 사는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께 돌아옵니다. 이번 08년도에는 캠퍼스 헬라인들, 구체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의 손을 의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었다(22-30)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개척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주의 손을 따라가기로 결정했습니다. 22절을 봅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는 열 두 사도도 아니요 일곱 집사도 아니었지만 구브로 출신으로 헬라 말과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지만,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옴으로써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바나바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을까요? 23,24절을 봅시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첫째, 바나바는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철새 신자’들처럼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끝까지 중심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어서 어떤 나쁜 양을 만나더라도 뭐 이런 염소가 다 있어, 정말 소망이 없구먼, 하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라도 다 들어주고,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품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면 위로를 얻고, 삶의 의욕을 찾고, 분명한 방향을 잡게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성령이 충만했으므로 그의 가르침에는 남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안디옥의 온갖 쾌락적이고 음란한 문화로부터 자기를 지키고자 스스로 많은 투쟁을 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믿음이 충만했다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자세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태산같이 힘든 문제를 만난 사람이라도 그에게 가면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가면 단순해져서 지혜가 생겼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게 된 데에는 바나바와 같은 좋은 목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25절을 봅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안디옥 교회의 성도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 이제, 바나바 한 사람이 감독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사울을 기억했습니다. 또 그가 헬라어를 말할 줄 알고 헬라 문화권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과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초빙하기는 쉬운 일 아닙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안디옥 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사울이 오면 아무래도 그의 리더십이 지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초대교부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의 한 수도사는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간 적이 없는 성결하고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자신의 동생이 피택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질투심을 극복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잘 못 봅니다. 한 초등학교에서는 5학년 반장이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부반장이 절대 위문을 안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너는 안 가냐?’라고 물어 보았더니 ‘걔가 죽어야 내가 반장이 되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초등학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에도 이와 같은 시기심과 경쟁심의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기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과도 함께 일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사심 없는 마음 때문에 초야에 묻혀 있던 사울도 빛을 보고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합심 동역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으며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26절을 봅시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가르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당시 성도들끼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붙여준 이름도 아니었습니다(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주로 헬라어를 말하는 안디옥 지역 사람들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왜 헬라인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을까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제자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그들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경건하고 깨끗했습니다. 과거 미팅 건수만 기다리던 청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그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어느날 친구가 “야 미팅하러가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너 혼자 가. 나 요즘 여자 친구 있어.” “누군데.” “어 수님씨.” “이 자식, 수님씨가 누군데.” “어 예수님. 나 요즘 예수님과 사귀어 살고 있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런 청년들은 얼굴도 환하게 밝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기뻤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마음에 평안했습니다. 먹고 살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켜 ‘유일한 길(The Way)’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안디옥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생명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기도제목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요 그리스도만이 진리이므로 그리스도 외에는 배설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고 그들의 종교를 가리켜 그리스도교라고 일컬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그야 말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보통 'mania'라고 부르는데, 안디옥 교인들은 누가 봐도 'Christ mania'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꽤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는데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도 교회에 다녔었냐? 티가 안 나서 몰랐다.”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을까요? 26절 중간부분을 보면 ‘가르쳤고’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1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르침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케 했습니다. 가르침이 사람의 가치관과 체질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배움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나서 얼마 후인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있었는데, 그 뿌리는 ‘査經會(the Bible study conference)’였습니다. 설날을 중심으로 약 10일 정도 열렸는데, 오전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전도하고 저녁에는 기도했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목포에서 평양까지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술, 담배, 놀음도 끊고, 첩도 끊었습니다. 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당신을 예수쟁이로 임명합니다!”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실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해주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이 그리스도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 마니아는 아무 유익이 없으니 돈 버는 마니아나 재테크의 마니아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어떤 크리스천은 ‘작업 거는 선수’에서 이제 ‘작업의 정석’으로까지 불리기도 합니다. 세상 잔재미와 쾌락에 대해 거의 마니아 수준이 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원인은 단 한 가지, 가르침을 못 받았거나 누가 가르쳐도 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배우고 몸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이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1년간의 헌신적인 성경공부는 놀라운 열매를 맺었는데, 특히 많은 성경선생들을 배출했습니다. 13:1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등과 같은 쟁쟁한 성경선생들이 기둥같이 섰습니다. 이들은 모두 출신배경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교육수준도 달랐지만 단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탁월한 성경선생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각자가 바나바나 사울처럼 좋은 목자요 성경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통해서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남은 방학동안 아니 앞으로 1년 동안 성경공부에 매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27-30절에서 안디옥 교회의 성장한 구체적인 모습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그들은 주는 생활을 구체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닥치자 안디옥의 성도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장차 그들은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요 성경선생의 나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역사적인 교회가 됩니다.

 제3장 주의 사자가 나타나(12:1-25)
 한편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전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종교적인 핍박이었지만, 이번에는 정치권력에 의한 핍박이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때 유대를 다스리던 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였습니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까 연구하다가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이 점점 더 커 가는 기독교의 세력을 몹시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 요한의 동생인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이를 보고 유대인들은 기뻐했으니, 민심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많이 돌아섰습니다. 헤롯은 바로 이거다 싶어 이번에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4인 1조로 구성된 군사들이 교대해 가며 그가 갇힌 감방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베드로를 공개 처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시련 앞에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은 당시 왕이요 권력자였습니다. 베드로는 권력자의 손에 넘겨졌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몸은 쇠사슬에 채워졌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았으니 베드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헤롯은 왕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권세도 있었습니다. 이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원하기만 하면 베드로를 죽일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평생 감옥에 가두어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 힘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기도할 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어둡던 옥중에 광채가 빛났습니다. 주의 사자가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우며 말했습니다. “급히 일어나라.” 동시에 쇠사슬이 베드로의 손에서 벗겨졌습니다. 천사가 또 말했습니다. “띠를 띠고 신을 신어라.” 베드로가 그대로 했습니다. 천사가 또 이르기를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니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갔는데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이에 첫째 둘째 파수를 지났습니다. 분명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베드로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옥문이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감옥에서 벗어나 예루살렘 다운 타운을 달렸습니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아니하고 감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를 떠나자 그가 정신이 들어 말했습니다. 11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이 사건은 출애굽 때 유월절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이번 유월절은 베드로의 유월절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베드로는 그 막강한 헤롯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또 유대 백성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기대는 베드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빠져나올 수 없는 큰 세력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어찌할 수 없는 큰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의 위협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2절을 봅시다. “여러 사람이 거기서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이들은 당시 헤롯과 유대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자들의 기도가 헤롯의 힘보다 더 켰습니다. 그 기도가 주의 사자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자가 나타나 베드로를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으며 파수꾼들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또한 굳게 잠겨 있던 그 감옥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자가 베드로를 헤롯의 손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베드로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기대를 차단했습니다. 기도는 무력한 것 같지만 가장 강력한 힘인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봅시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곧장,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로데 자매가 나왔습니다. 문까지 다가가 베드로의 음성을 확인한 이 소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곧장 사람들에게 달려가 “베드로가 문밖에 와 있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 응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Are you crazy?”
  베드로는 결코 열릴 수 없을 것 같았던 감옥 문을 쉽게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쉽게 열릴 것으로 기대했던 마가의 집 대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 있는 불신의 문은 이처럼 잘 열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해 놓고도 믿지 못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우리의 모습도 사실 이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들이 믿음이 부족했지만, 베드로가 출옥하기를 바라는 소원만은 간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받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베드로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쉿, 조용!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손길이었다.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교회를 부탁한다고 전하렴...” 이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권력자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 모임과 말씀역사는 세상 권세에 비해서 연약한 것 같습니다. 세상 죄의 세력이 너무나 커 보입니다. 사람들 안의 악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의 제자가 태어날 수 있을지 막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죄의 세력에 눌려 있는 영혼이 과연 인생의 운명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고 영혼이 자유를 얻을 지 불신이 들 때도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불신이 뼈에 박혀 있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보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 같은 세상에서 헤매다 먼지로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볼 때 연약한 자들이라도 기도했을 때 교회는 강한 권력자의 손과 유대인들의 악한 기대로부터 온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러면 주의 사자는 권력자 헤롯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날이 새자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 기대가 무너지자 화풀이 삼아 파수꾼들을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두로와 시돈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정치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서 그의 침실 비서관 블라스도에게 줄을 대니 왕의 기분이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헤롯이 왕복을 입고 가이사랴 주민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높은 왕좌에 앉았고, 또 은으로 치장된 화려한 왕복을 입고 있었는데, 태양빛이 닿으면 반사되어 나오는 빛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가 연설하는 동안 사람들이 환호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신(神)입니다.”라고 했습니다(22). 헤롯은 이처럼 불경한 말을 내뱉는 자들을 전혀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의 아첨을 좋게 여기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순간 그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그를 내리쳤는데, 그는 내장 기관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군중들로부터 몸을 감추었습니다. 그 후로 5일 동안 위통증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으니, 사인(死因)은 ‘회충’이었습니다. 회충이 그의 내장을 갉아먹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입니다. 헤롯왕은 정치인으로서 지금까지 유대 사회 내에서 반 예수, 반 사도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람들의 그런 여론에 편승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람들의 요구에 편승한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신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는 헤롯뿐만 아니라 당시 고대의 왕들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자기를 신격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황제들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인간이 신의 대접을 받고자 하면 기독교는 박해를 받게 됩니다. 지금도 인간은 자기들을 신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의도와 격렬하게 싸우십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또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의 사자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은 헤롯을 치셨고, 헤롯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니, 이로 말미암아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흥왕하여 더했다.’는 것은 ‘계속해서 성장하며 확장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로 갔고, 베드로마저 전면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민심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복음의 수용성’이 너무나 낮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2008년 이 시대 그 무엇보다도 이런 주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기대할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자들이 세상 권력, 강한 죄의 세력, 운명적이고 반복적인 문제를 능가할 것입니다. 몇몇 평범한 사람들,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안디옥 교회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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