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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0강(행9:32-11:18)"일어나 잡아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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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108회 작성일 08-02-04 16:56

본문

2008 사도행전 제10강
말씀 사도행전 9:32-11:18
요절 사도행전 10:13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이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에 이어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로까지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강한 유다이즘(Judaism)에 사로잡혀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신앙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안에 유다이즘과 싸우시고 세계 선교를 이루어 가신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일어나라(9:32-42)
  9장 뒷부분에서 우리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역사를 감당하는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전도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갔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으로 해상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도시입니다. 거기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녀는 중풍병으로 팔 년이나 누워있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베드로는 옛적에 중풍병자를 일으키셨던 주님께서 애니아도 일으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애니아는 곧 일어났고, 이를 본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욥바에는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삶의 현장에서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지만, 안타깝게도 몹쓸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장사지내지 않고 시신을 잘 씻어서 다락에 뉘였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키셨듯이 죽은 다비다도 살릴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죽었지만 포기치 않고 살리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시체를 향하여 말합니다. 40절입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녀가 눈을 뜨더니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어떻게 8년을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사람이 나을 수 있고, 또 죽어버린 사람이 다시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었고,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도울 수 있는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 그로 말미암아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복음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났습니다(42).
  저는 지난 학생 수양회에서 각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비에프 학생운동을 보았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무너진 캠퍼스를 재건하겠다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너진 캠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살 길만을 찾아 사는 사명인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메신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무너진 광주역사를 재건하고자 지난 6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했던 한 주의 종의 간증적인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장래를 꾸리지 않고 훌타임 목자를 자원하며 재주대학을 섬기겠다고 나서는 어느 2학년 학생도 있었습니다.
  현실 문제로 8년 동안 도전하지 못하고 누워있던 대학생들, 복음역사를 위해 열심히 헌신했지만 병들어 죽어있던 대학생들이 저마나 사명지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시며 그 권세와 능력도 동일하십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한계와 운명에 도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동교야! 일어나라.” 저희가 2008년 나의 한계, 불가능한 현실에 도전하여 “일어나라!”하신 말씀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일어나 잡아먹어라(10:1-16)
  그러나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일으킨 베드로도 한 가지 극복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계적인 종이 되고 또 복음을 통한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려면 그가 뛰어넘어야 할 내적이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0:1을 보면 가이사랴의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이겠지만, 당시 온 천하를 제패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고 또 식민지 주둔군의 지휘관이었으므로 그 권세가 작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군인들은 강포했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 가두곤 했습니다(눅3:14). 그런데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2절을 봅시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아마도 주둔지에 와서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식민지 백성을 많이 구제했고, 또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넬료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 마음에 생명력이 없었습니다(11:18). 이는 그가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제에 힘을 쓰고, 기도를 많이 하고, 또 사람들이 그를 칭찬해도, 그의 마음은 무엇인가 비어있는 듯 했고, 하나님을 경외할수록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만 가득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을 볼 때 얼마나 그의 영혼이 갈급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10:24).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과거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을 보내셨듯이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9:4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그는 그때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이라는 사람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지붕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제 3시부터 기도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이제 6시 곧 정오가 되자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밑에 부엌에서는 무두장이 시몬이 한창 맛있는 큰 사발 라면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배고픈 베드로는 기도를 하면서 그 냄새에 황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큰 그릇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엉겁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가 배고픈지 아시고 큰 사발 면을 옥상까지 배달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군침을 삼키며 얼른 그 사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2절입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징그럽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하나님께 부정하다고 금하신 음식들이 나옵니다. 낙타, 토끼, 돼지, 독수리, 솔개, 까마귀, 도마뱀, 족제비, 박쥐... 그 그릇은 온갖 부정하고 징그러운 짐승들의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베드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걸 보니 입맛이 싹 가시면서 등골에 소름이 짝 끼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귀에 엽기적인 명령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13) 한참 얼굴을 찡그리고 구역질을 참고 있는데 이게 웬 말씀입니까? 그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대고 먹을 수 없다고 딱 잡아 거절했습니다. 14절입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베드로가 이런 것들을 잡아먹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속되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속되다’는 것은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는 것이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차별이 없는 일반적인 것’ 또는 ‘불순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평범하지 않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은 저속한 인간들이고 자신들은 영적인 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것조차 불법으로 여겼습니다(10:28).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까지도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지, 이방인의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로 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복음이 사마리아로 퍼질 때에는 좀 꺼려지기는 했지만, 사마리아의 뿌리는 유대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면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지 않았을까요? 음식 잘 가려먹고 율법 잘 지켰다고 깨끗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미 더러운 존재요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이미 더럽습니다. 마가 7:21~23절은 말합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우상숭배를 반복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의 기준삼고 싶지 않아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징그럽다고 불평했지만, 율법적인 유대인들은 더욱 징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징그러운 독사의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것이 없는 더럽고 추하고 역겨운 죄인들이요, 병든 백성이었습니다. 똑같은 인간이요,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세상 만민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베드로에게 두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고 말했고, 주님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다음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갔습니다(16). 이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꼭 받아들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기준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부정하다는 규정을 만드셨듯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깨끗하다고 규정을 만드셨습니다. 베드로는 평소 이방인들을 속되고 깨끗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깨끗해졌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복음(福音)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3:2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아직도 복음의 보편성(普遍性)과 세계성(世界性)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유대인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독선이 있었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우월의식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이러했으니, 복음은 도저히 땅 끝까지 전해질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가려면 먼저 베드로 안에 있는 유다이즘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어떤 것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자기 율법을 깨야 하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자기가 속되다고 판단하는 독선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먹고,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시면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그러면 “잡아먹어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인간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율법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슨 책입니까? 공책입니다. 이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가리게 되고 접근하기 어려워합니다. 20C에 캠퍼스커플(Campus Couple)들은 대부분 은밀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홍대 안팎을 보면 CC들이 이제 다 드러내놓고 사는 것을 봅니다. 아예 주변에 원룸을 얻어서 부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학우들을 만나면 먼저 피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제치고 나면 만날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상한 옷차림이나 괴상한 장신구, 기괴한 행동, 담배 피우고 있는 학생들은 이미 병이 많이 들어 있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나름대로 사람을 속되다 판단하지 않고 섬길 때 우리는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체질에 맞으면 영접을 잘 하지만 안 맞으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구니 안을 보고 정말 체질에 맞지 않는 것들만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잡아먹어라’는 말씀은 “자기 체질을 부인하고 체질에 안 맞는 사람도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이고 마음에 율법이 생기면 ‘자기 체질’이 생깁니다. 그러나 나의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센터 안에서, 장막 안에서 살다보면 정말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잘 때 발도 씻지 않고 이불을 더럽히고, 밥을 해놓으면 잽싸게 먹고 설거지를 방치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양은 약속시간을 번번이 어기고 전화도 없이 1:1약속을 펑크 냅니다. 자기는 그렇게 하면서 목자가 조그마한 허물만 보이면 무슨 대단한 문제를 발견한 듯이 데모를 하고 투정을 부립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다 보니 잡아 먹다가 소화를 못시키고 토해 버리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나와 체질이 맞지 않아서 함께 할 수 없다든지, 자기는 체질적으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든지, 자기는 단체생활이 맞지 않다든지 등등  자기 율법을 주장하다보면 나중에 인생에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가 목자라고 해서 양들을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가르치려는 독선도 큰 문제입니다. 이 모든 자기 율법과 자기 판단, 그리고 교만과 독선을 회개하고 모든 사람을 품고 감당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때 복음 역사가 일어나고 세계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레켐(Rackham)이라는 성서학자는 이 사도행전 10:12절을 주석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보자기에는 이런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보자기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는 모든 인종과 모든 나라와 모든 계층을 담고 있는 세계 교회를 의미한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차별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9:22에서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자기 스타일이 없고 율법이 없는 목자였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인생들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를 부인하시고 사람의 모양을 입으셨고 사람들의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로서 이 땅 모든 인생들의 구주가 되시고 목자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들의 죄와 병든 것을 자신의 보혈로 씻으시고 완전히 소화시키셨습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의인된 심정, 나름대로의 율법, 편견과 자존심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않은 사람을 저는 영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 깨끗케 하신 다른 사람, 다른 성격, 다른 스타일을 영접하고 섬기는 우주적인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화평의 복음(10:17-43)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의심했다”는 것은 “그 뜻을 몰라서 당황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 목자님, 여기 사세요?”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9,20절입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베드로는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민족적 우월감,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났습니다. “유대인만 깨끗하고 이방인은 더럽다”는 과거의 생각을 역사와 함께 파묻고 “모든 사람은 깨끗하다”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역사는 세계선교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고넬료는 친척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보자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나도 사람이라.” 28,29절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베드로가 이 곳에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고,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난 후 말합니다. 34,35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는 이때까지 ‘하나님도 사람의 혈통, 신분, long다리인지, 장롱다리인지 판단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벌이 좋은 사람은 우대하시고 학벌이 좋지 못하면 천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도 그 내면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어떤 학교출신이든지, 어떤 옷차림이든지 당신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이렇게 가르쳐도 결혼할 때가 되면 외모를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결혼에 대한 자기 아집을 버리지 못합니다. 결혼 전에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a을 봅시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베드로는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복음의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복음은 ‘구원의 복음’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를 만나고 나서 복음은 구원의 복음임과 동시에 ‘화평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도 해결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므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불신과 시기와 반목과 질시가 생기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습니다. 또 언어, 문화, 인종, 신분의 장벽이 생깁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도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민족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과 지배국의 지휘관이라는 신분과 자존심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런 장벽으로 인해 그들이 만남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그 모든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아무런 허물없이 서로를 영접합니다. 고넬료는 가까운 친구들 앞에서도 자의식 없이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는 선진국 로마의 주둔군 지휘관이지만 겸손하고 뜨겁게 베드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영접했습니다. 또 베드로도 그것으로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하기보다, 나도 사람인데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며 그를 일으켰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평소에 멸시하던 이방인이요, 그렇게 미워하던 로마 군인, 예수님을 못 박은 그들의 대표를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다니, 베드로 자신도 변화된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식구를 대하거나, 동역자들을 대하거나, 친구를 대하거나, 직장 동료나 상사들을 대하거나, 또는 외국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을 아무런 갈등과 장벽감 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편하고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에 복음이 있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의 복음일 뿐만 아니라 ‘화평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격이 못나고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대하고 사귀는 것이 그렇게 힘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이 거의 공포였습니다.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만나면 움츠려 드는 자신의 못난 인격에 화가 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대학 2학년 겨울 만나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부담없이 또 경쟁심 없이 대하게 되었을때 스스로도 놀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구원이 너무나 놀라워 거리낌 없이 전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우리 2부 동역자님들의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귀한 동역자님들 안에 한 해 동안 화평의 복음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인해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37-43절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와 그의 능력의 역사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하셨고, 마귀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 하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 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더욱 명백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보고 체험한 증인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43절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누구든지, 그가 어떤 국적을 가졌든지, 어떤 신분이든지, 어떤 인종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나라의 장벽, 신분의 장벽, 인종의 장벽을 다 허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증해 주셨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합법적이면서도 공식적인 신자들로 인정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4장 예루살렘 교회의 각성(10:44-11:18)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하며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흥분하지 않고 그가 체험한 성령의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말했고, 그런 후 자기 의견을 말했습니다. 11:17절을 봅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베드로는 그 일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자기가 하나님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서는 다른 유대인들도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셨고, 제일 먼저 시몬 베드로에게 그것을 가르치셨으며, 그는 다른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를 가르쳤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살 때 정말 싸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 고정관념, 편견, 우월감, 멸시감, 무시, 감정 등과 같은 인간적인 요소입니다. 이것과 싸우지 않으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되어 영혼들을 담을 수 없고 스스로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양들을 만날 때 ‘자기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목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쓰임을 받든지, 어떤 양들을 만나든지 잡아먹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우리에게서 캠퍼스로, 캠퍼스에서 세계로 힘차게 뻗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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