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9강(사도행전 9:1-31)"택한 나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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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도행전 제9강
말씀 사도행전 9:1-31
요절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울을 택하셔서 당신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여기 나오는 사울은 바로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는 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상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주님의 종이요 가장 훌륭한 신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복음은 이방 세계와 그 중심인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로마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정경(正經)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도 절반 이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인데, 예수님은 그를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택하심’은 ‘구원’과 함께 제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14). 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4:31).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고 했습니다(롬8:33,34).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택하심’이 어떻게 사울을 택하시고 쓰시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울을 구원하신 예수님(1-9)
1절을 보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은 ‘숨을 쉴 때마다 살기가 콧속으로부터 벌렁벌렁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는 다메섹까지 가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고자 대제사장에게 영장을 요청했습니다(2).
당시 대제사장은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이었고 사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라이벌이었기에 바리새인 사울이 사두개인 대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를 따르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는 자존심도 부인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놈이 되었을까요? 그의 박해는 단순한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부활이라는 허황된 사실을 유포하고 율법과 성전을 모욕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모독하여 유대 사회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얼마나 지독한 열심을 품은 자들인가, 보통으로 해서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인들이 스데반의 죽음과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후에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을 부인하면서까지, 시간과 돈을 드려서까지, 그리고 원정까지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기세당당하게 다메섹 성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정의의 투사라도 된 양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 길을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3절을 봅시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더니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 빛이었든지 사울이 감히 쳐다 볼 겨를도 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두 눈을 감싸고 모래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5,6)
잠시 후 더 이상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환했던 그 빛도 사라졌습니다. 사울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사울은 엎드려졌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8절을 봅시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이 멀어졌습니다. 그는 동행하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기세가 꺾이고 눈 뜬 장님이 되어 남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울은 이제까지 예수는 죽은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는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밤에 흰 소복을 입고 입에 칼 문 귀신의 모습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빛을 덧입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시며 안타까운 소리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했지만, 그건 그들의 교주를 높이고 모임을 결속시키기 위해 조작한 거짓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빛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는 그에게 말을 하셨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의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셨습니다. 그는 고전15: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둘째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은 성도들인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자신과 성도들을 동일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는 분이시지만(엡5:23), 또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엡5:29). 예수님은 믿음을 지키느라 고생하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보다 더욱 고통하십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받으면 마음이 외로워집니다. 시대와 캠퍼스가 예수님을 버리면 목자로서의 존재의미가 흔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와 함께 고통하시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을 엎드러지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원의 빛, 구원의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를 박해하고 그의 역사를 훼방하는 사울을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 사울의 목을 부러뜨려 죽게 하시거나, 다리몽둥이를 꺾어서 병신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에잇 맛 좀 봐라.”하시며 자외선으로 태워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후에 사도행전 26:13-15절에 보면 사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 장면을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은 “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꾸만 가시나무를 뒷발로 치는데 얼마나 아프냐?”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안타까워하시고 그의 그릇된 행보를 바라 잡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서 우리는 교만하고 무지하고 목이 곧은 사울을 향한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목자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어. 열심히 예수 이단들을 박멸하고 있다구. 과연 나 말고 누가 이런 일을 하겠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사울은 가시나무를 향하여 열심히 뒷발질하며 자해하고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들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죄의 형벌을 자기 머리 위에 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죄와 허물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당장에 심판의 불을 내리셔도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심판하시기보다 우리의 이름을 안타깝게 부르며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열심히 뒷발질하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이 주님의 음성은 생각 없이 죄의 길을 고집하며 파멸의 길을 자초하는 죄인들을 향하신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완악한 사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이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 얼음처럼 차갑던 사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사울이나 우리나 교만하고 무지하며 목이 곧아 주님의 뜻에 굴복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생명의 빛으로 우리를 둘러 비추시고 사로잡으사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가 앞으로 살게 될 제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율법을 따라 살았고 의롭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교만하고 더 악하며 내면이 어두웠습니다. 자기 딴에는 의롭게 산다고 하는 게 도리어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0:2,3에서 그는 자신과 동일한 문제를 가진 율법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마디로 사울은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빛이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사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울에게는 율법이 빛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자기가 믿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은 늘 어두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속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것이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로서 오는 큰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가장 확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8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그는 항상 어두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 안에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가 있고 사람들이 볼 때 정죄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그에게 빛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빛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찾게 되었고, 사랑과 신뢰를 찾게 됩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8,9)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둘러 비추셨을 때, 율법의 어두움에서 벗어났고 죄가 주는 정죄와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마음에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두운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에 그늘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내면에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자신의 행위와 그로 말미암은 의에서 찾았고 그로인해 어두웠지만, 이제 빛 되신 예수님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두우면 어디서 빛을 찾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올바른 행실에서 찾기도 하고, 죄가 주는 즐거움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내 옆에 밝아 보이는 동역자에게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요회역사나 센터 역사가 어두우면 요새 잘나가는 교회나, 잘나갔던 과거 역사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곧 어두워집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에서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빛으로 찾아오실 때 나의 어두움, 우리의 어두움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사울을 둘러 비추셨듯이 우리를 둘러 비추어 주시고 밝고 긍정적이고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8,9절을 봅시다. 그는 이 빛으로 인해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빛을 보았지만, 보지 못하게 되었고 18절에서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시고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무것도 못 보게 된 그 순간이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이 눈이 멀기 전에 마지막 본 것은 예수님의 빛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본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바울의 눈에는 예수의 잔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구약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시드기야 왕이 잡힙니다. 그때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기 전에 그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최후로 본 것은 바로 대적의 손에 죽어가는 자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왕하 25:7).
그런데 바울의 생애에서는 예수님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사울이 오직 예수님만 보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만 연구하고 생각하며 예수님만 보는 인생을 살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세상 많은 볼 것들이 있었지만 다른 것은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 살아갑니다.
이제부터 사울이 접하는 세상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핍박이 있습니다. 유대 사회 속에서의 많은 전통과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됩니다. 그는 평생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잊지 못합니다.
찬송가에 이름이 많이 오른 사람 중에 ‘화니 제인 크로스비’(1820~1915)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소경이 된 그녀는 태양도 볼 수 없고, 아름다운 자연도 그릴 수 없는 불행한 소경이었습니다. 삶의 의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타고난 운명에 따라 그냥 안일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로스비는 부르짖으며 피눈물 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영감이 넘치기 시작했고 주옥같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등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찬송시만 20여 곡이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천국에서 다시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볼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생애 속에 예수님만 보고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 가장 어둘 때 나에게 빛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만 보일때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어떤 핍박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문제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정죄나 실망스런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사흘 동안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옛 사람 사울이 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바울로 거듭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는 고통스럽지만 눈부신 기간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어두움이 해결될 뿐 아니라 어두움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바라고 사는 제자의 삶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도행전 후반부 공부를 통해서 빛된 인생을 살았던 바울의 삶과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사울을 택하신 예수님(10-31)
한편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10-12절을 봅시다. “아나니아야,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이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여 새 인생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영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3,14절입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동역자로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분명한 과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과거를 아는 사람을 모른 척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을 용서하고 영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5절을 봅시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가라!' Go! 하십니다. 사울에게 가서 사울을 제자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울을 그릇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울을 특별한 목적에 쓰시기 위해서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 보면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밥을 담는 밥그릇이 있고, 국을 담는 국그릇이 있습니다. 반찬을 담는 반찬그릇이 있고, 커피를 타 먹는 커피 잔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당신의 구속역사를 위해 필요한 그릇들을 선택하시고 빚어 만드십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담아서 이방인과 그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이미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에 전달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방세계로 주님의 이름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보통 ‘증인’이라고 불러왔는데, 왜 여기서는 ‘그릇’이라고 했을까요? ‘증인’은 자신의 의지가 강조된다면 ‘그릇’은 택한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 의지나 자기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자신을 택한 주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서, 자기 뜻에 따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 삶은 어떤 삶입니까? 16절을 봅시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제 아나니아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더 이상 주님께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집을 떠나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겠습니까? 마치 맹수가 갇혀 있는 철장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17절을 봅시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이 웬수 사울아!” “그 동안 우리 형제들을 얼마나 괴롭히더니 쌤통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복음의 원수 사울을 형제로 영접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사울이 가지고 온 ‘살생부’에 기록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한 배를 탄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사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단의 흉기였지만 이제는 주님의 택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회당으로 가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20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이처럼 변화된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과 택하심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1절을 봅시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주위 사람들은 너무 갑자기 변해버린 사울이 소화가 안 되어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개의치 않고 더욱 힘 있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했습니다. 놀라움은 혼란으로 변했고, 혼란은 적대감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울이 예수의 이름 부르는 자들을 해할 때 그들은 환호했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니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생명은 주님께서 친히 보호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나게 했습니다(21-25). 예수님의 택한 그릇이 광주리에 담겨서 성 밖으로 옮겨집니다.
26절을 봅시다. 다메섹을 무사히 빠져나온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과도 사귀고자 했는데, 자신의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아직 사울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울의 과거가 여전히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사울의 대변인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사울을 만나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 했지만, 그는 사울을 만나 적극적으로 사도들에게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드디어 사도들은 사울을 동역자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주의 택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데는 성숙한 목자들의 섬세한 사랑과 도움과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 은혜에 힘입어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과 변론했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옛적에 사울의 하소인들 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기처럼 새 사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힘써서 전하는데, 그들은 그런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형제들이 이를 알고는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26-30).
마지막으로 31절을 봅시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는 사울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사울이 변화됨으로써 유대와 사마리아의 복음 역사는 든든해졌고, 그에 따라 수도 늘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복음은 온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이처럼 큰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한 사람 사울을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만나 어두움을 해결 받고 구원은 얻은 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고 그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를 변화시켜 구속 역사에 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자들은 잘라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잘라버리기 보다도 그를 변화시켜서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현재의 모습보다도 그의 그릇을 보셨고, 그의 가능성을 보셨고, 장차 변화될 그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시고 사용하기를 바라시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친히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 저희를 새롭게 만나주시고 크고 위대한 그릇으로 키우시고 사용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9:1-31
요절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울을 택하셔서 당신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여기 나오는 사울은 바로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는 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상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주님의 종이요 가장 훌륭한 신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복음은 이방 세계와 그 중심인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로마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정경(正經)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도 절반 이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인데, 예수님은 그를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택하심’은 ‘구원’과 함께 제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14). 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4:31).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고 했습니다(롬8:33,34).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택하심’이 어떻게 사울을 택하시고 쓰시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울을 구원하신 예수님(1-9)
1절을 보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은 ‘숨을 쉴 때마다 살기가 콧속으로부터 벌렁벌렁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는 다메섹까지 가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고자 대제사장에게 영장을 요청했습니다(2).
당시 대제사장은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이었고 사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라이벌이었기에 바리새인 사울이 사두개인 대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를 따르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는 자존심도 부인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놈이 되었을까요? 그의 박해는 단순한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부활이라는 허황된 사실을 유포하고 율법과 성전을 모욕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모독하여 유대 사회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얼마나 지독한 열심을 품은 자들인가, 보통으로 해서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인들이 스데반의 죽음과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후에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을 부인하면서까지, 시간과 돈을 드려서까지, 그리고 원정까지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기세당당하게 다메섹 성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정의의 투사라도 된 양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 길을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3절을 봅시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더니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 빛이었든지 사울이 감히 쳐다 볼 겨를도 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두 눈을 감싸고 모래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5,6)
잠시 후 더 이상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환했던 그 빛도 사라졌습니다. 사울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사울은 엎드려졌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8절을 봅시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이 멀어졌습니다. 그는 동행하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기세가 꺾이고 눈 뜬 장님이 되어 남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울은 이제까지 예수는 죽은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는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밤에 흰 소복을 입고 입에 칼 문 귀신의 모습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빛을 덧입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시며 안타까운 소리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했지만, 그건 그들의 교주를 높이고 모임을 결속시키기 위해 조작한 거짓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빛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는 그에게 말을 하셨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의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셨습니다. 그는 고전15: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둘째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은 성도들인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자신과 성도들을 동일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는 분이시지만(엡5:23), 또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엡5:29). 예수님은 믿음을 지키느라 고생하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보다 더욱 고통하십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받으면 마음이 외로워집니다. 시대와 캠퍼스가 예수님을 버리면 목자로서의 존재의미가 흔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와 함께 고통하시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을 엎드러지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원의 빛, 구원의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를 박해하고 그의 역사를 훼방하는 사울을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 사울의 목을 부러뜨려 죽게 하시거나, 다리몽둥이를 꺾어서 병신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에잇 맛 좀 봐라.”하시며 자외선으로 태워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후에 사도행전 26:13-15절에 보면 사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 장면을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은 “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꾸만 가시나무를 뒷발로 치는데 얼마나 아프냐?”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안타까워하시고 그의 그릇된 행보를 바라 잡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서 우리는 교만하고 무지하고 목이 곧은 사울을 향한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목자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어. 열심히 예수 이단들을 박멸하고 있다구. 과연 나 말고 누가 이런 일을 하겠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사울은 가시나무를 향하여 열심히 뒷발질하며 자해하고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들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죄의 형벌을 자기 머리 위에 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죄와 허물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당장에 심판의 불을 내리셔도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심판하시기보다 우리의 이름을 안타깝게 부르며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열심히 뒷발질하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이 주님의 음성은 생각 없이 죄의 길을 고집하며 파멸의 길을 자초하는 죄인들을 향하신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완악한 사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이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 얼음처럼 차갑던 사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사울이나 우리나 교만하고 무지하며 목이 곧아 주님의 뜻에 굴복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생명의 빛으로 우리를 둘러 비추시고 사로잡으사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가 앞으로 살게 될 제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율법을 따라 살았고 의롭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교만하고 더 악하며 내면이 어두웠습니다. 자기 딴에는 의롭게 산다고 하는 게 도리어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0:2,3에서 그는 자신과 동일한 문제를 가진 율법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마디로 사울은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빛이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사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울에게는 율법이 빛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자기가 믿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은 늘 어두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속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것이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로서 오는 큰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가장 확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8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그는 항상 어두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 안에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가 있고 사람들이 볼 때 정죄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그에게 빛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빛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찾게 되었고, 사랑과 신뢰를 찾게 됩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8,9)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둘러 비추셨을 때, 율법의 어두움에서 벗어났고 죄가 주는 정죄와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마음에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두운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에 그늘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내면에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자신의 행위와 그로 말미암은 의에서 찾았고 그로인해 어두웠지만, 이제 빛 되신 예수님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두우면 어디서 빛을 찾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올바른 행실에서 찾기도 하고, 죄가 주는 즐거움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내 옆에 밝아 보이는 동역자에게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요회역사나 센터 역사가 어두우면 요새 잘나가는 교회나, 잘나갔던 과거 역사에서 빛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곧 어두워집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에서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빛으로 찾아오실 때 나의 어두움, 우리의 어두움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사울을 둘러 비추셨듯이 우리를 둘러 비추어 주시고 밝고 긍정적이고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8,9절을 봅시다. 그는 이 빛으로 인해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빛을 보았지만, 보지 못하게 되었고 18절에서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시고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무것도 못 보게 된 그 순간이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이 눈이 멀기 전에 마지막 본 것은 예수님의 빛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본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바울의 눈에는 예수의 잔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구약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시드기야 왕이 잡힙니다. 그때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기 전에 그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최후로 본 것은 바로 대적의 손에 죽어가는 자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왕하 25:7).
그런데 바울의 생애에서는 예수님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사울이 오직 예수님만 보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만 연구하고 생각하며 예수님만 보는 인생을 살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세상 많은 볼 것들이 있었지만 다른 것은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 살아갑니다.
이제부터 사울이 접하는 세상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핍박이 있습니다. 유대 사회 속에서의 많은 전통과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됩니다. 그는 평생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잊지 못합니다.
찬송가에 이름이 많이 오른 사람 중에 ‘화니 제인 크로스비’(1820~1915)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소경이 된 그녀는 태양도 볼 수 없고, 아름다운 자연도 그릴 수 없는 불행한 소경이었습니다. 삶의 의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타고난 운명에 따라 그냥 안일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로스비는 부르짖으며 피눈물 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영감이 넘치기 시작했고 주옥같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등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찬송시만 20여 곡이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천국에서 다시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볼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생애 속에 예수님만 보고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 가장 어둘 때 나에게 빛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만 보일때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어떤 핍박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문제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정죄나 실망스런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사흘 동안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옛 사람 사울이 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바울로 거듭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는 고통스럽지만 눈부신 기간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어두움이 해결될 뿐 아니라 어두움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바라고 사는 제자의 삶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도행전 후반부 공부를 통해서 빛된 인생을 살았던 바울의 삶과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사울을 택하신 예수님(10-31)
한편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10-12절을 봅시다. “아나니아야,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이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여 새 인생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영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3,14절입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동역자로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분명한 과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과거를 아는 사람을 모른 척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을 용서하고 영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5절을 봅시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가라!' Go! 하십니다. 사울에게 가서 사울을 제자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울을 그릇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울을 특별한 목적에 쓰시기 위해서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 보면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밥을 담는 밥그릇이 있고, 국을 담는 국그릇이 있습니다. 반찬을 담는 반찬그릇이 있고, 커피를 타 먹는 커피 잔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당신의 구속역사를 위해 필요한 그릇들을 선택하시고 빚어 만드십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담아서 이방인과 그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이미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에 전달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방세계로 주님의 이름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보통 ‘증인’이라고 불러왔는데, 왜 여기서는 ‘그릇’이라고 했을까요? ‘증인’은 자신의 의지가 강조된다면 ‘그릇’은 택한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 의지나 자기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자신을 택한 주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서, 자기 뜻에 따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 삶은 어떤 삶입니까? 16절을 봅시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제 아나니아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더 이상 주님께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집을 떠나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겠습니까? 마치 맹수가 갇혀 있는 철장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17절을 봅시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이 웬수 사울아!” “그 동안 우리 형제들을 얼마나 괴롭히더니 쌤통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복음의 원수 사울을 형제로 영접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사울이 가지고 온 ‘살생부’에 기록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한 배를 탄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사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단의 흉기였지만 이제는 주님의 택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회당으로 가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20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이처럼 변화된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과 택하심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1절을 봅시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주위 사람들은 너무 갑자기 변해버린 사울이 소화가 안 되어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개의치 않고 더욱 힘 있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했습니다. 놀라움은 혼란으로 변했고, 혼란은 적대감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울이 예수의 이름 부르는 자들을 해할 때 그들은 환호했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니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생명은 주님께서 친히 보호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나게 했습니다(21-25). 예수님의 택한 그릇이 광주리에 담겨서 성 밖으로 옮겨집니다.
26절을 봅시다. 다메섹을 무사히 빠져나온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과도 사귀고자 했는데, 자신의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아직 사울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울의 과거가 여전히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사울의 대변인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사울을 만나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 했지만, 그는 사울을 만나 적극적으로 사도들에게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드디어 사도들은 사울을 동역자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주의 택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데는 성숙한 목자들의 섬세한 사랑과 도움과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 은혜에 힘입어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과 변론했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옛적에 사울의 하소인들 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기처럼 새 사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힘써서 전하는데, 그들은 그런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형제들이 이를 알고는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26-30).
마지막으로 31절을 봅시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는 사울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사울이 변화됨으로써 유대와 사마리아의 복음 역사는 든든해졌고, 그에 따라 수도 늘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복음은 온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이처럼 큰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한 사람 사울을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만나 어두움을 해결 받고 구원은 얻은 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고 그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를 변화시켜 구속 역사에 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자들은 잘라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잘라버리기 보다도 그를 변화시켜서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현재의 모습보다도 그의 그릇을 보셨고, 그의 가능성을 보셨고, 장차 변화될 그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시고 사용하기를 바라시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친히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 저희를 새롭게 만나주시고 크고 위대한 그릇으로 키우시고 사용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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