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8강(사도행전 8:1-40)"전도자 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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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도행전 제8강
말씀 사도행전 8:1-40
요절 사도행전 8:12
전도자 빌립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오늘 말씀은 세계선교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개척역사를 섬기고 이어 9장에서는 핍박자 사울이 이방 선교를 위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습니다. 뒤를 이어 유다이즘에 묶여 있던 베드로가 로마 군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세계 선교의 무대가 확대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빌립 집사는 세계선교의 첫 관문인 사마리아에서 역사를 섬깁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예기치 못한 복음의 장벽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방세계의 장벽을 뚫고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마리아 개척(1-25)
1절을 봅시다. 스데반의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 박해의 주동자는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이었는데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5:38,39) 그런데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골라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울은 ‘저런 놈은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며 스데반이 비참히 죽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데반이 죽는 그날을 시작으로 하여 교회를 잔멸(殘滅)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에도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고 흩어진 기독교인들 대신 손 발 벗고 나서서 장사를 치렀습니다(2). 그러나 사울은 이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케쉬타포와 같이 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성도들을 색출해서 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큰 박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금요일마다 찬양과 기도도 할 수가 없었고 즐겁고 뜨겁던 주일예배도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일단 먼저 흩어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마치 무자비한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무력하기만 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흩어진 성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4절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수님 믿다가 이렇게 쫓겨 다니게 되면 이제 살기 위해서라도 두더지같이 숨어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복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는 물론이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1:9).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박해가 오히려 세계 선교역사를 가속화시키는 기폭제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을 끄기 위해서 막대기로 이렇게 저렇게 휘둘러 댔습니다. 그러나 그 불똥이 사방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세계 선교의 불길이 더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유럽의 청교도들은 무자비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서 복음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모택동이 정권을 잡자 중국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했습니다. 그 결과 허드슨 테일러가 설립한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 선교사 637명이 모두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추방된 선교사들 중에 절반에 육박하는 286명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많은 동남아시아국가들을 개척했습니다. 또한 중국내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도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당시 보다 40배가 늘어난 8천만 명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36년에 일제가 외국선교사들을 간첩혐의로 몰아서 대부분 추방했습니다. 6.25동란 때, 조만식장로님을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많은 교회들이 불에 탔습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간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집 식당을 세우고, 일본인들은 가는 곳마다 자동차 대리점을 세우고,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라도 복음이 세계 가운데 널리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흩어진 성도들 중에는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구제를 위해서 세움 받은 집사였습니다. 그런 그도 스데반처럼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었는데, 특히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5절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가 ‘사마리아 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드디어 이방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는 본래 한 나라 한 민족이었지만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남쪽’은 ‘유대’,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북한과 남한처럼, 세월과 함께 문화, 언어, 그리고 신앙까지 달라졌습니다. 특히 북쪽은 강대국에 잦은 침입으로 인해 이방의 우상과 혼혈이 성행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남쪽은 이런 그들을 더러운 족속이라 여기고 그들을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은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로 여겼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필요도 없고 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 종교적, 상호 갈등의 벽을 넘어 빌립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음전파의 차원을 넘어서서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로인해 사마리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을 봅시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그들은 빌립의 메시지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그 결과 7절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았습니다. 8절을 봅시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곳곳에서 ‘주여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짱이야!’하는 소리가 온 성에 가득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큰 박해’를 사용하셔서 이곳 사마리아 교회에 ‘큰 기쁨’을 이루셨습니다.
한편, 그 성에는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술’은 신문지에서 비둘기를 날리고,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장미꽃을 꺼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일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큰 자’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그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0)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마술에 놀랐기에 신처럼 그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면 ‘마술’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초자연적인 힘(power)을 신뢰합니다. 그 힘이 어떤 특정한 물건이나, 특정한 주문이나, 특정한 현상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용한 점쟁이가 만들어준 부적은 어떠한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반지의 제왕’에 보면 반지에 힘이 있다고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요즘의 만화영화들, 특히 일본만화를 보면 주로 이 마력이나 마법을 주제로 한 만화들이 대부분입니다. 공주 이름의 만화들이 있고, 공주가 가진 지팡이나, 팔지 같은 것들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런 힘은 세 가지 일을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첫째는, 생산적인 일, 둘째는, 보호하는 일, 셋째는, 파괴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생산적인 일은 어떤 바위에게 빌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학생의 방석을 훔쳐 깔고 앉으면 대학에 붙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보호하는 일에서는 어떤 특정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파괴하는 일에서는 미운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다트’를 던져 명중을 자주 시키면 그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믿습니다. 본문의 마술사 시몬은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시몬에게 와서 그런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술이 성행하는 사마리아 땅에 빌립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2,13절을 봅시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사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의 그러한 능력을 압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빌립은 표적과 큰 능력을 행했는데, 마술사 시몬조차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방 세계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 세계로 취급했지만, 그래도 완전한 이방세계는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여호와 신앙도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 세계와 이방 세계가 섞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가장 성행했던 것이 바로 마술, 점술,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마술을 금지하는 이유는 우상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술사들은 하나님보다 우상이나 미신을 의지하도록 현혹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8:19)면서 엄히 경계했습니다. 레20:27절에 보면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고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접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신적인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정신세계와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시몬이 행하는 마술을 보면서 시몬을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몬의 신비한 마술이 생명을 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생명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대상이 마술에서 이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마술, 점, 기(氣), 그리고 동양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점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점이 일반 국민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역술업은 ‘성장산업’으로 분류되어 연간 4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문 역술인들은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인구 1000명당 여섯 명 정도가 점 봐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역술원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신세대들을 위해 전화 한 통화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출장 역술서비스가 아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시대가 어려워지고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능력, 신비한 능력에 유혹을 받습니다. 돈의 마력, 영상의 마력, 외모의 마력, 인터넷의 마력에 미혹되어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거짓 환상 속에서 소중한 젊음과 열정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이 신실한 신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렵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말씀을 전했고 그 힘은 마력을 이기고 힘 있게 역사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취직이다’, ‘게임이다’, ‘이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만 겉모습일 뿐이지 그들의 내면은 참 진리에 목말라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단순히 복음을 듣고 변한 것같이 이 시대 사단의 속임수에 사로잡혀 있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면 그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Underwood;1859-1916)는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준비하던 중, 조선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교사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너무나 우상에 찌든 나라요 후진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왜 못가니?”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조선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약혼녀는 “조선에서 살 수 없다. 정 가려면 헤어지자.”며 반대했는데, 그는 파혼하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1885년 26세, 그는 아펜젤러(H. G. Appenzel, 1858-1902)와 함께 제물포 항에 첫발을 내디디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악령의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당시 사람들은 조선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여겼지만 복음은 ‘조선(Chosun)’을 ‘택한 백성(Chosen people)’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Fishing'할 때 얼굴보고 고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겉보기에는 필요 없는 것 같고, 도저히 안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14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큰 복음의 역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물급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 성령의 불을 붙였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땅에 가서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령의 능력을 지켜본 마술사 시몬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18,19절입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그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좀 싸게 사서 다른 사람에게 비싼 값으로 팔면 큰돈을 벌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뭐든지 돈으로 계산하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대노하며 말했습니다. 20~23절을 봅시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격해졌으며 마술사 시몬을 악하다고 했을까요? 시몬은 돈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주는 능력을 사려고 했습니다. 이로 볼 때 당시는 돈을 주고 어떤 신적인 능력을 사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술사 시몬에게는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거나 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볼 때 그것은 심각한 악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성령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돈 받고 선물을 파는 신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사려고 하는 행위는 결국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의 생각 속에는 돈이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몬의 문제일뿐만아니라 사마리아의 문제였고 이방 세계의 대표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맘모니즘(Mammonism)’이라 부르는데, 곧 돈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나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을까요? 어떤 분은 헌금을 많이 내어 장로, 집사 직분을 얻어 교회 내에서 세력을 얻고자 합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이 소원성취 많이 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들여 교회당을 멋지게 지으면 많은 사람이 온다는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돈 잘 버는 남자 만나서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볼 때 그것은 악독이었고 불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돈을 벌고자 하면 돈과 함께 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돈을 주님의 뜻보다 더 앞세우는 것은 사단에게 미혹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경제력을 성령의 뜻보다 앞세우는 것은 사단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22,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시몬을 불쌍히 여기고 그가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에는 관성이 있습니다. 시몬은 빌립의 말과 행하는 표적과 기적을 보고 전심으로 따랐지만 마음은 전혀 복음적이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품었던 것을 신자가 되고 나서도 그대로 품고 따랐습니다. 능력에 대한 야망을 신자가 되고 나서도 그대로 구했습니다. 돈 맛을 봤던 그는 마음속에서 늘 경제적 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룰 수 없었던 자기 꿈을 신앙 안에서 이뤄보고자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악독과 불의에 매인 바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관성을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24절을 봅시다. 그런데 시몬은 그토록 심한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저주가 임하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능구렁이와 같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피해 갔습니다. 시몬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와 같은 책망을 통해 사마리아의 복음 역사를 절대 신앙 위에 굳게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후 두 사도는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여러 촌을 다니며 실정을 파악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마술 문화와 돈 중심적인 가치관과 싸워나가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를 주님께서 허락하신 ‘목장’으로 영접했습니다. 빌립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선교는 사도들과 더불어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제2장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26-40)
빌립이 한창 사마리아에서 복음역사를 활발히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지시했습니다. 26절을 봅시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 길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길 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마리아에서 가사까지는 2백리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역사가 활발한 사마리아를 떠나 허허벌판인 광야길로 내려가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방향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27,28절을 봅시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좋은 흑인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양은 내시로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바쁜 국사를 제쳐두고 시간을 내서 먼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을 찾아온 양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병거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경은 두루마리였기에 가지고 다니거나 읽기에도 불편했습니다. 보통 여행객들은 주로 오징어를 씹으며 신기루를 구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의 취미는 무엇이요?”라고 물으면 그는 아마도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루 중 언제가 가장 즐겁나요?”라고 물으면 “성경 읽을 때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29절을 봅시다. 성령께서 이번에는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마차에 올라오시지요.” 세상에 이런 기특한 양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올라와 보니 내시는 어떤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32,33절입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고 있는 어린 양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다시 봅시다. 33절 첫머리에 나온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얼마나 굴욕 속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았는가를 말해줍니다.
내시가 왜 이처럼 굴욕을 당하고 낮아지신 분, 정당한 판단을 받지 못하신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까요? 그는 아마도 낮아진 자, 굴욕을 당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은 낮은 마음을 가진 자 였습니다. 그는 거세당한자로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수치로 인해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깊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비천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낮아지고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누가 이렇게 자기 처지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잠잠히 있다가 생명까지 빼앗겼는가 하며 궁금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는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이방세계에는 억울하게 눌린 인생을 사는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내시는 진지하게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본문에서의 빌립과 내시 사이의 대화에는 유달리 강조표현이 많습니다. ‘청컨대’, ‘묻노니’라는 말이 강조형입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싶어 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인생에 복음(福音)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자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이 낮을 때에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자기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마침 물이 있는 곳이 보였습니다. 36절을 봅시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절을 봅시다. ‘없음’이라 나와 있지만 성경 아래의 각주를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여기서 ‘내가 믿노라.’는 말도 강조형입니다. 내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에 수례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내시는 이제 유대교 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 다른 곳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 내시의 내면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에 낮아지고 굴욕감을 느끼던 마음이 다 씻겨나갔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내시는 에디오피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했고 그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인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세계 사람들은 갖은 굴욕과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받으며 낮은 자존감을 안고 사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기위해서 빌립을 한 이방인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마술에 속아 살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낮고 천한 에디오피아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빌립을 보내신 것처럼 이제 우리를 이방세계로 보내길 원하십니다. 저희가 2008년 캠퍼스 개척역사를 섬길 때 아마도 위와 같은 영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그들의 인생의 문제에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어두운 캠퍼스 영혼들안에 큰 기쁨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길 기도합니다.
40절을 봅시다. 이 일이 있고난 후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점점 더 넓은 지경으로 복음이 퍼져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복음이 유대를 넘어 이제 사마리아와 당시 땅 끝이라고 하는 에디오피아에 전파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음은 이방 세계의 마술 문화와 충돌했고, 돈 중심 문화와 충돌했고, 한 영혼의 낮은 마음, 굴욕당한 마음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모든 문제에서 승리하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한 사람의 성경선생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칼뱅(John Calvin, 1509-64)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주셨다.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그 성경을 열어 보이고 설명하며 적용하는 성경선생이다.” 이 자리에 계신 한분 한분은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희가 본문의 빌립과 같이 이방의 문화에 함몰되기보다 도리어 뚫고 들어가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8:1-40
요절 사도행전 8:12
전도자 빌립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오늘 말씀은 세계선교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개척역사를 섬기고 이어 9장에서는 핍박자 사울이 이방 선교를 위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습니다. 뒤를 이어 유다이즘에 묶여 있던 베드로가 로마 군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세계 선교의 무대가 확대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빌립 집사는 세계선교의 첫 관문인 사마리아에서 역사를 섬깁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예기치 못한 복음의 장벽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방세계의 장벽을 뚫고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마리아 개척(1-25)
1절을 봅시다. 스데반의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 박해의 주동자는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이었는데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5:38,39) 그런데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골라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울은 ‘저런 놈은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며 스데반이 비참히 죽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데반이 죽는 그날을 시작으로 하여 교회를 잔멸(殘滅)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에도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고 흩어진 기독교인들 대신 손 발 벗고 나서서 장사를 치렀습니다(2). 그러나 사울은 이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케쉬타포와 같이 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성도들을 색출해서 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큰 박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금요일마다 찬양과 기도도 할 수가 없었고 즐겁고 뜨겁던 주일예배도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일단 먼저 흩어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마치 무자비한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무력하기만 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흩어진 성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4절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수님 믿다가 이렇게 쫓겨 다니게 되면 이제 살기 위해서라도 두더지같이 숨어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복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는 물론이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1:9).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박해가 오히려 세계 선교역사를 가속화시키는 기폭제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을 끄기 위해서 막대기로 이렇게 저렇게 휘둘러 댔습니다. 그러나 그 불똥이 사방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세계 선교의 불길이 더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유럽의 청교도들은 무자비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서 복음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모택동이 정권을 잡자 중국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했습니다. 그 결과 허드슨 테일러가 설립한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 선교사 637명이 모두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추방된 선교사들 중에 절반에 육박하는 286명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많은 동남아시아국가들을 개척했습니다. 또한 중국내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도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당시 보다 40배가 늘어난 8천만 명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36년에 일제가 외국선교사들을 간첩혐의로 몰아서 대부분 추방했습니다. 6.25동란 때, 조만식장로님을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많은 교회들이 불에 탔습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간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집 식당을 세우고, 일본인들은 가는 곳마다 자동차 대리점을 세우고,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라도 복음이 세계 가운데 널리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흩어진 성도들 중에는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구제를 위해서 세움 받은 집사였습니다. 그런 그도 스데반처럼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었는데, 특히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5절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가 ‘사마리아 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드디어 이방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는 본래 한 나라 한 민족이었지만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남쪽’은 ‘유대’,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북한과 남한처럼, 세월과 함께 문화, 언어, 그리고 신앙까지 달라졌습니다. 특히 북쪽은 강대국에 잦은 침입으로 인해 이방의 우상과 혼혈이 성행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남쪽은 이런 그들을 더러운 족속이라 여기고 그들을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은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로 여겼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필요도 없고 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 종교적, 상호 갈등의 벽을 넘어 빌립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음전파의 차원을 넘어서서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로인해 사마리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을 봅시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그들은 빌립의 메시지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그 결과 7절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았습니다. 8절을 봅시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곳곳에서 ‘주여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짱이야!’하는 소리가 온 성에 가득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큰 박해’를 사용하셔서 이곳 사마리아 교회에 ‘큰 기쁨’을 이루셨습니다.
한편, 그 성에는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술’은 신문지에서 비둘기를 날리고,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장미꽃을 꺼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일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큰 자’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그를 따르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0)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마술에 놀랐기에 신처럼 그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면 ‘마술’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초자연적인 힘(power)을 신뢰합니다. 그 힘이 어떤 특정한 물건이나, 특정한 주문이나, 특정한 현상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용한 점쟁이가 만들어준 부적은 어떠한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반지의 제왕’에 보면 반지에 힘이 있다고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요즘의 만화영화들, 특히 일본만화를 보면 주로 이 마력이나 마법을 주제로 한 만화들이 대부분입니다. 공주 이름의 만화들이 있고, 공주가 가진 지팡이나, 팔지 같은 것들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런 힘은 세 가지 일을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첫째는, 생산적인 일, 둘째는, 보호하는 일, 셋째는, 파괴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생산적인 일은 어떤 바위에게 빌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학생의 방석을 훔쳐 깔고 앉으면 대학에 붙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보호하는 일에서는 어떤 특정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파괴하는 일에서는 미운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다트’를 던져 명중을 자주 시키면 그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믿습니다. 본문의 마술사 시몬은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시몬에게 와서 그런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술이 성행하는 사마리아 땅에 빌립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2,13절을 봅시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사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의 그러한 능력을 압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빌립은 표적과 큰 능력을 행했는데, 마술사 시몬조차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방 세계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 세계로 취급했지만, 그래도 완전한 이방세계는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여호와 신앙도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 세계와 이방 세계가 섞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가장 성행했던 것이 바로 마술, 점술,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마술을 금지하는 이유는 우상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술사들은 하나님보다 우상이나 미신을 의지하도록 현혹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8:19)면서 엄히 경계했습니다. 레20:27절에 보면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고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접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신적인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정신세계와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시몬이 행하는 마술을 보면서 시몬을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몬의 신비한 마술이 생명을 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생명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대상이 마술에서 이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마술, 점, 기(氣), 그리고 동양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점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점이 일반 국민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역술업은 ‘성장산업’으로 분류되어 연간 4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문 역술인들은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인구 1000명당 여섯 명 정도가 점 봐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역술원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신세대들을 위해 전화 한 통화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출장 역술서비스가 아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시대가 어려워지고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능력, 신비한 능력에 유혹을 받습니다. 돈의 마력, 영상의 마력, 외모의 마력, 인터넷의 마력에 미혹되어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거짓 환상 속에서 소중한 젊음과 열정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이 신실한 신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렵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말씀을 전했고 그 힘은 마력을 이기고 힘 있게 역사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취직이다’, ‘게임이다’, ‘이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만 겉모습일 뿐이지 그들의 내면은 참 진리에 목말라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단순히 복음을 듣고 변한 것같이 이 시대 사단의 속임수에 사로잡혀 있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면 그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Underwood;1859-1916)는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준비하던 중, 조선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교사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너무나 우상에 찌든 나라요 후진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왜 못가니?”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조선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약혼녀는 “조선에서 살 수 없다. 정 가려면 헤어지자.”며 반대했는데, 그는 파혼하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1885년 26세, 그는 아펜젤러(H. G. Appenzel, 1858-1902)와 함께 제물포 항에 첫발을 내디디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악령의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당시 사람들은 조선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여겼지만 복음은 ‘조선(Chosun)’을 ‘택한 백성(Chosen people)’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Fishing'할 때 얼굴보고 고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겉보기에는 필요 없는 것 같고, 도저히 안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14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큰 복음의 역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물급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 성령의 불을 붙였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땅에 가서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령의 능력을 지켜본 마술사 시몬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18,19절입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그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좀 싸게 사서 다른 사람에게 비싼 값으로 팔면 큰돈을 벌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뭐든지 돈으로 계산하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대노하며 말했습니다. 20~23절을 봅시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격해졌으며 마술사 시몬을 악하다고 했을까요? 시몬은 돈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주는 능력을 사려고 했습니다. 이로 볼 때 당시는 돈을 주고 어떤 신적인 능력을 사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술사 시몬에게는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거나 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볼 때 그것은 심각한 악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성령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돈 받고 선물을 파는 신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사려고 하는 행위는 결국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의 생각 속에는 돈이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몬의 문제일뿐만아니라 사마리아의 문제였고 이방 세계의 대표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맘모니즘(Mammonism)’이라 부르는데, 곧 돈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나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을까요? 어떤 분은 헌금을 많이 내어 장로, 집사 직분을 얻어 교회 내에서 세력을 얻고자 합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이 소원성취 많이 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들여 교회당을 멋지게 지으면 많은 사람이 온다는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돈 잘 버는 남자 만나서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볼 때 그것은 악독이었고 불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돈을 벌고자 하면 돈과 함께 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돈을 주님의 뜻보다 더 앞세우는 것은 사단에게 미혹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경제력을 성령의 뜻보다 앞세우는 것은 사단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22,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시몬을 불쌍히 여기고 그가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에는 관성이 있습니다. 시몬은 빌립의 말과 행하는 표적과 기적을 보고 전심으로 따랐지만 마음은 전혀 복음적이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품었던 것을 신자가 되고 나서도 그대로 품고 따랐습니다. 능력에 대한 야망을 신자가 되고 나서도 그대로 구했습니다. 돈 맛을 봤던 그는 마음속에서 늘 경제적 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룰 수 없었던 자기 꿈을 신앙 안에서 이뤄보고자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악독과 불의에 매인 바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관성을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24절을 봅시다. 그런데 시몬은 그토록 심한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저주가 임하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능구렁이와 같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피해 갔습니다. 시몬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와 같은 책망을 통해 사마리아의 복음 역사를 절대 신앙 위에 굳게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후 두 사도는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여러 촌을 다니며 실정을 파악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마술 문화와 돈 중심적인 가치관과 싸워나가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를 주님께서 허락하신 ‘목장’으로 영접했습니다. 빌립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선교는 사도들과 더불어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제2장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26-40)
빌립이 한창 사마리아에서 복음역사를 활발히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지시했습니다. 26절을 봅시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 길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길 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마리아에서 가사까지는 2백리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역사가 활발한 사마리아를 떠나 허허벌판인 광야길로 내려가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방향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27,28절을 봅시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좋은 흑인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양은 내시로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바쁜 국사를 제쳐두고 시간을 내서 먼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을 찾아온 양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병거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경은 두루마리였기에 가지고 다니거나 읽기에도 불편했습니다. 보통 여행객들은 주로 오징어를 씹으며 신기루를 구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의 취미는 무엇이요?”라고 물으면 그는 아마도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루 중 언제가 가장 즐겁나요?”라고 물으면 “성경 읽을 때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29절을 봅시다. 성령께서 이번에는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마차에 올라오시지요.” 세상에 이런 기특한 양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올라와 보니 내시는 어떤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32,33절입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고 있는 어린 양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다시 봅시다. 33절 첫머리에 나온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얼마나 굴욕 속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았는가를 말해줍니다.
내시가 왜 이처럼 굴욕을 당하고 낮아지신 분, 정당한 판단을 받지 못하신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까요? 그는 아마도 낮아진 자, 굴욕을 당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은 낮은 마음을 가진 자 였습니다. 그는 거세당한자로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수치로 인해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깊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비천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낮아지고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누가 이렇게 자기 처지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잠잠히 있다가 생명까지 빼앗겼는가 하며 궁금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는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이방세계에는 억울하게 눌린 인생을 사는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내시는 진지하게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본문에서의 빌립과 내시 사이의 대화에는 유달리 강조표현이 많습니다. ‘청컨대’, ‘묻노니’라는 말이 강조형입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싶어 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인생에 복음(福音)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자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이 낮을 때에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자기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마침 물이 있는 곳이 보였습니다. 36절을 봅시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절을 봅시다. ‘없음’이라 나와 있지만 성경 아래의 각주를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여기서 ‘내가 믿노라.’는 말도 강조형입니다. 내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에 수례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내시는 이제 유대교 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 다른 곳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 내시의 내면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에 낮아지고 굴욕감을 느끼던 마음이 다 씻겨나갔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내시는 에디오피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했고 그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인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세계 사람들은 갖은 굴욕과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받으며 낮은 자존감을 안고 사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기위해서 빌립을 한 이방인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마술에 속아 살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낮고 천한 에디오피아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빌립을 보내신 것처럼 이제 우리를 이방세계로 보내길 원하십니다. 저희가 2008년 캠퍼스 개척역사를 섬길 때 아마도 위와 같은 영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그들의 인생의 문제에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어두운 캠퍼스 영혼들안에 큰 기쁨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길 기도합니다.
40절을 봅시다. 이 일이 있고난 후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점점 더 넓은 지경으로 복음이 퍼져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복음이 유대를 넘어 이제 사마리아와 당시 땅 끝이라고 하는 에디오피아에 전파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음은 이방 세계의 마술 문화와 충돌했고, 돈 중심 문화와 충돌했고, 한 영혼의 낮은 마음, 굴욕당한 마음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모든 문제에서 승리하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한 사람의 성경선생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칼뱅(John Calvin, 1509-64)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주셨다.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그 성경을 열어 보이고 설명하며 적용하는 성경선생이다.” 이 자리에 계신 한분 한분은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희가 본문의 빌립과 같이 이방의 문화에 함몰되기보다 도리어 뚫고 들어가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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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회 다운로드 | DATE : 2008-01-21 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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