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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7강(행6:8-7:60)"순교자 스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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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188회 작성일 08-01-16 08:01

본문

2008 사도행전 제7강
말씀 사도행전 6:8-7:60
요절 사도행전 7:60
순교자 스데반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제 초대 교회가 개척된 이후에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그리고 돈이 많아지자 사람과 돈을 관리할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와 다음 주 말씀에서 이 집사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7장에서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8장에서는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개척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집사 스데반은 충돌과 박해의 시대에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독 역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오늘 스데반을 통해 2008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좋은 목자상(牧者像)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6:8)
  스데반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먼저 6:3을 보면,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8절에도 “은혜와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7:55절에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여기서 “충만하다”는 것은 “흘러 넘쳤다”는 의미입니다. 즉 스데반은 그 마음에 성령과 은혜와 믿음과 권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무엇을 채우는가에 따라서 그 속에 쌓인 것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었다 하면 비난의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것은 평소 그의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만 열었다하면 한숨소리, 할 수 없다는 소리, 소망이 없다는 소리를 쏟아 놓습니다. 이는 그 마음에 불신과 어두움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5:3).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그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5:17). 반면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여러 인간적이고 병든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임합니다. 그는 평신도였지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마치고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던 중에도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피 흘리며 죽는 순간에도 주님 앞에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5000명 이상의 초대교회의 집사로서 해야 할 잡다한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도와서 구제와 심방역사에도 힘을 써야 하고 평신도로서 직장생활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내에 돈 관리를 하고 섬기다 보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기도 하지만 혈기와 신경질로 충만하기 쉽습니다. 여러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기 쉽습니다. 물질을 관리하다 보면 성령 충만하지만 동시에 교만해지고 거칠어지고 위치를 망각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종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겸손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지만 동시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공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과 자기의가 강한 동족 유대인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었습니다. 직분과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한 사람의 전도인으로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성령과 권능, 은혜와 지혜를 충만히 부어주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어찌하든지 성령이 충만하면서 겸손하게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성숙한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스데반의 메시지(6:9-7:53)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유민’, 즉 ‘리버디노 회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폼페이우스(Pompey) 장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로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회당이 형성되었으니, ‘리버디노’, 즉 ‘자유인의 회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스데반도 예수 믿기 전에 이 회당 소속이었고, 그는 옛 친구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러 왔다가 논쟁이 붙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를 고발했습니다. 11절을 봅시다.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증인만 있으면 재판 없이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심각한 죄입니다. 이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스데반을 영장 없이 현장에서 연행하여 공회에 구금시켰습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통해 주장했습니다. 13,14절입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이 말을 요약하면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과거 이 죄목으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율법에 반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함부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을 깊이 파셔서 미움도 살인이라 하셨고 마음의 음욕도 간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니 이곳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신앙생활하지 말도록 하시고, 구체적으로 장사꾼들을 그곳에서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그 시대 누구보다도 사모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과 성전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시민들은 성전 때문에 먹고 살았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때마다, 또 무시로 성전으로 몰려드는 순례객들이 드리는 헌금,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쓰는 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무용지물이다, 이제 흩어진 성도들이 신령한 성전이다 가르치면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 확산을 막고자 이처럼 모함하여 스데반을 매장시키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봅시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여 천사의 얼굴을 하고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이 기회에 성전과 율법에 대한 위대한 변증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면 그의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의 메시지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16절은 조상들에 관해, 17-43절은 모세의 율법에 관해, 44-53절은 성전의 역사와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절을 봅시다. 스데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하며 부드럽고 친근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3) 당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인터넷 쇼핑 몰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죄 가운데 망할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불러주셨습니다. 아직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현재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어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지만 그 후에 출애굽하게 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례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 후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언약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이 받은 그 모든 축복이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도록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 은혜를 모르고 아주 심각한 죄를 짓게 됩니다.
  9절을 봅시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시기는 살인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피붙이마저 시기심 때문에 죽이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고, 결국 애굽과 자기 온 집의 ‘CEO’로 높이셨습니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닥쳤을 때, 조상들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시기심으로 버림받은 자를 하나님이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셨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극하자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견제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내어 버려져야 하는 비참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꽃미남이었기 때문에 석 달 동안 길리우다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해 인간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장성하여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는 자기 동족들을 돌아볼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원통한 일을 당하는 한 동족의 원수를 갚고자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는 동포들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애굽의 김두환’으로 임명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튿날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화해시키려다가 도리어 ‘왕따’를 당했습니다. 27,28절을 봅시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이에 모세는 상처를 받고 미디안 광야로 도주해 그곳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동족들에게 배척을 받고 광야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은 이처럼 버림받은 모세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시고 애굽에서 탄식하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35,36절을 봅시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여기서 ‘그 모세’는 'the same Moses'로서 원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은 ‘바로 그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고통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목자가 되어 그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켰고, 홍해를 건너게 했고, 40년 간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세를 택하여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자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위와 같이 아브라함, 요셉, 그리고 모세를 증거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버림 받은 자들을 택하여 쓰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요, ‘택함 받은 자’라는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들이 잘나서 선민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생 우상숭배자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살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택해주셨습니다. 요셉은 가장 가까운 형들에게 ‘왕따’ 당하여 잊혀진 존재가 될 뻔 했지만, 하나님이 택하셔서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스스로 뭔가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자 광야의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자를 택하여 위대한 목자로 삼으시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 버렸습니다.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39-42절을 봅시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40절입니다. “우리를 애굽으로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금송아지를 ‘우리를 인도할 신’, ‘우리를 앞서갈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장시간 보이지 않자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인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모세가 보이지 않는 사이에 나름대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금송아지를 만들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던 ‘여호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애굽에서 섬기던 금송아지를 모세의 하나님에 덮어씌웠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가 없으니 모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려야 할 때 참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와 의논도 없이 앞날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하는 방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리 급했을까요? 어디로 인도할 신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까?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 땅으로 빨리 들어가 번영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번영과 성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우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금송아지에 대해서 전혀 거부반응이 없고 도리어 금송아지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는 건전한 자유인이라고 여겼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자기를 인도할 신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난 옛날이 좋아요. 옛날로 돌아갈래요.”라고 하는 그들을 볼 때 하나님은 얼마나 맥 빠지고 화가 나셨을까요? 42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셨습니다.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습니다. ‘버려두셨다’는 것은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 후 그들의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바친 희생제물이 나를 위한 것이었더냐? 너희는 몰록의 신과 별의 신인 레판, 그 밖에 너희 손으로 만든 우상을 떠메고 다녔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벨론 저 멀리 포로로 끌려가게 하겠다.”(42,43; 현대어성경)
  그들이 섬긴 몰록은 놋쇠로 만들어져 황소 모양의 머리를 하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조상들은 우상의 팔 가운데 어린 아이를 산 제물로 바쳐 그 아래 불을 놓아 어린 아이를 태워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렇게 반인륜적이고 고질적인 우상숭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를 세워 그들에게 놀라운 권능과 표적을 보이시며 생명의 말씀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종을 반복해서 거절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우상에게 빠졌을까요? ‘성전’이 없어서였을까요? 44절을 보면 광야에서도 ‘증거의 장막’ 즉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텐트로 지은 휴대용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이 있으나 없으나 유대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그들의 죄악이 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성막을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렀습니다(45). 다윗은 자기는 좋은 집에서 살면서 예배는 ‘텐트’에서 드리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멋진 성전을 짓고자 했는데, 솔로몬이 이 숙원사업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전이 화려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계실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49,50절을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보좌’는 ‘왕의 의자’요, ‘발등상’은 ‘발을 놓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자는 하늘이고, 하나님의 발판은 땅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전이 커도 하나님의 새끼발가락 발톱의 떼만 한 크기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나 계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에도 계셨고, 애굽에도 계셨고 그리고 광야에도 계셨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광야 교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장소적 계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신자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발전시켰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요, 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예배당’입니다. 또한 우리의 성전이신 예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하지도 율법을 모독하지도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저들이 올바른 성전관을 갖기를 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누가 성전과 율법을 어긴 것입니까? 51-53절을 봅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처음에 “여러분 부형들이여!”(7:2)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하며 책망합니다.
  스데반이 볼 때 유대인들은 목이 부드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자기 동생 요셉이 자기들 위에 왕이 될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시절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모세를 늘 거절했고 모세의 인도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는 모세와 하나님의 섭리에 목을 숙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믿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보며 ‘목에 깁스’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왕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처럼 아예 이 말에 대해서도 마음과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52,53절을 봅시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박해했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증거하던 스데반도 죽이려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들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모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스데반을 죄인으로 몰아 세웠으니,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스데반은 양떼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다운 목자요, 복음적인 메신저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말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할 말씀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유대인들의 시기와 교만이 결국 주의 종들을 죽이고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인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이제 우상숭배자로 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목이 부드러운 백성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듣는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제3장 스데반의 순교(54-60)
  54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얼마 전 백성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했는데, 이들은 이빨을 ‘으드득, 으드득’ 갈았습니다. ‘이를 갈았다’는 것은 분노로 말미암아 이성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면 사죄의 은혜가 충만히 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55,56절을 봅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하늘을 보았는데, 그 하늘에 과거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던 그 ‘영광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당신의 증인들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고 계셨습니다. 마음을 졸이며 격려하고 응원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함께 하시고 격려하시고 기도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스데반은 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난 이리떼와 같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짱돌로 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하늘에 살아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격분했습니다. 그들은 공회의 판결도 기다리지 않고 살인마들로 변했습니다. 스데반은 수많은 돌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온 몸이 돌에 맞아 터지고 찢어졌습니다. 성난 군중들의 야유소리와 고함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기력이 다하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그는 주님을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59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서신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받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만 자신을 죽임으로서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자기 백성들이 더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60절을 봅시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기를 죽인 죄의 대가를 치루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흡사 예수님의 기도와 닮았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는 주님의 용서가 자신을 살렸듯이 자신의 용서가 저들을 살릴 것을 믿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죽지 않고 목자로서 죽고자 했습니다. 그는 목자로서 죽을 때조차도 생명을 살렸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인생의 결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더라도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합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고 자신이 죽을 때도 미쳐가지고 악을 쓰며 죽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다윗 한 사람을 품지 못해서 평생을 시기와 미움의 악령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비는 몰래 불륜의 남자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비참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죽음이 비참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가 비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죽음은 하나의 섞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목자의 죽음이요, 사명인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평생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말년에 치매에 걸려서 죽는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겠습니까? 또한 세상 욕심만 좇아 살다가 마주 달려오는 음주운전차량에 받쳐서 죽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최초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는 영국의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능통하게 말하는 실력자였습니다. 그는 1863년 24살의 나이에 중국선교사로 갔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널샤만호를 타고 대동강 강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배가 정박해 있는 동안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이에 무력으로 맞서려던 제너럴셔먼호 선장의 무모한 발포 명령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배는 좌초되고 모든 선원들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이때 토마스 목사는 한 조선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병사에게 성경을 건네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는 무지하고 가엾은 백성이니이다.” 이때 그의 나이 27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순교의 피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목사의 목을 밴 그 병사는 죽어가면서 보여준 선교사의 모습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 집에 돌아간 후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난과 핍박의 돌멩이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쾌락주의와 물질주의 솜사탕이 날아와 달콤하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순교자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목이 곧고, 마음과 귀를 닫아 버린 영혼들의 목자로서 그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번영을 위하여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며 숭배하는 이 시대 영혼들을 향해 말씀을 섬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도록 제자 양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자적으로 사신 예수님과 스데반의 신앙을 배우는 2008년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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