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신년특강 2008년 신년 제2강(신명기 6:1-25)"여호와를 사랑하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162회 작성일 08-01-06 22:56

본문

2008년 신년 제2강
말씀 신명기 6:1-25
요절 신명기 6:5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申命記; deutronomy; 제2의 율법)’는 모세 오경 중 마지막 책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남긴 간곡한 당부의 글입니다. 신명기에는 모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 백성에 대한 기대, 그리고 염려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라는 것이고, 기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염려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우상숭배자가 되지 않을까,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그 당시 세대뿐만 아니라 다가올 모든 세대에게도 전하고 싶은 진리가 있었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세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영적 방향이 무엇입니까? 

  제1장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1-3)
  1절을 봅시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여기서 명령은 십계명과 같이 영적인 뼈대를 세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규례와 법도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시민법, 그리고 제반 규례들을 포함하는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행동지침입니다. 이제 신세대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리라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살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3절입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앞에 두고 지난 세월, 특히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40년 동안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 중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죽고 없었습니다. 40년 전 그들은, 애굽을 떠난 지 40일 만에 약속의 땅, 경계선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가나안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보낸 정탐꾼 중 열 명은 그 땅에 대해서 심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 땅에는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은 울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의 장대한 아낙 자손들을 물리치실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멸시한 처사였습니다.
  사실 이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이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터질 때마다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고 길이 험할 때 항상 불평했습니다. 왜 물을 안주는가? 왜 우리를 이끌어 내셨는가? 그들은 여전히 세상과 하나님을 비교했고 세상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면 하나님을 멸시했고 원망했고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연속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결정적인 때에 똑같이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로 인해 분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민14:32~34)
  그들이 왜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역사적으로, 60만 명이 죽고 2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적어도 하루에 400명의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뭘 할 것인가, 이들이 가나안 땅을 감당할 수 있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생각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사상을 파하고 여호와 신앙을 세워야 하는 그들이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셨습니다. 창세기서부터 여호와가 참신이고 모든 신보다 강하고 높다고 하셨고 또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지 못하고 여호와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시절부터 줄곧 멸시를 당하고, 사람의 지배 속에서 눌려 지내면서 살아 왔습니다. 충성심을 배우지 못하고 기회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원망이 뼈에 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되돌려 보내시며 광야를 떠돌게 하셨고, 그 동안 이십 세 이상 된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모세 자신도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했습니다(3:26).
  이를 아는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모세는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40년 간 광야에서 방황하며 떠돌다가 죽은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볼 때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광야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광야에서 죽어간 그들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말라버린 풀과 같았습니다. 모세는 그 점이 가장 마음 아팠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2세대들이 이제 그런 일을 반복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더 이상 믿음 없는 사람, 더 이상 헤매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광야를 떠도는 떠돌이가 아니요, 방황하는 방랑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복의 근원이 되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기쁨과 소망을 심는 복덩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2) ‘여호와를 경외한다(fear the LORD)’는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두려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길 바랐고 그래서 그들의 날이 장구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합니다.

  제2장 여호와를 사랑하라(4,5)
  그러면 모세가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4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고,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누구십니까? 천지와 만물, 그리고 사람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삼으셨습니다.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새 역사를 창조할 그 땅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여호와는 여러 신들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오직 한 분이십니까?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왜 이를 들어야 할까요? 모세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는 농사의 신 바알을 비롯해서 폭풍의 신 하닷, 별의 신 살무, 죽음의 신 레셉, 쾌락의 신 아세라 등이 있었습니다. 그 신들 중 ‘바알’은 풍요의 신인데, 포도와 밀과 같은 농사를 풍성하게 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러면 바알을 섬기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깁니다. 주일에는 여호와를 섬기고 평일에는 바알을 섬깁니다. 집에서는 여호와를 섬기고 일터에서는 바알을 섬깁니다. 이런 현상을 종교학적으로 ‘종교 다원주의’, 혹은 ‘세속주의’라고 부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세상에 여러 신들이 있다고 인정하고 인간의 구원과 번성도 여러 신들이 주관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 외에 세상의 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속화의 뿌리에는 실용주의가 있습니다. 실용주의의 핵심 가치는 진리가 아니라 유익입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말했습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고양이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보면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경제만 나아지게 하면 좋은 신이다.”라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이런 실용주의가 우리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반영한 2007년 사자성어가 ‘자기기인(自欺欺人)’입니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를 뒤흔든 학력위조와 정치인의 도덕 불감증이 이를 말해 줍니다. 잘 먹고 잘 살수만 있다면, 취직만 잘 된다면, 집값만 오른다면, 언제든지 신앙을 멸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자기 유익에 조금이라도 흠이 갈 것 같으면 여호와의 주인 되심을 언제든지 부인하고 현실에서 여호와를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2세대들은 자기 유익을 쫓아서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진리에 기초해서 사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여호와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스스로 계신 분이요 영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시요, 생명의 주인이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여호와는 참된 주인이시요 인생의 목적이시며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그의 영광을 어떤 것과도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의 헌신과 경배와 존경을 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러한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은 특별하고도 각별하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로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그들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홍해바다를 일순간에 가르시고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허허벌판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리사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나서 목을 축여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있겠느냐’(사44:6-8),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한 분도,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각자를 슬픔과 운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추하고 더러운 죄로부터 출애굽 시키신 것도 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나의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같이 희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유일하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5절을 봅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모세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에 집착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집착할 때 그들은 잘되면 혼합주의자가 되고 그것마저 못하면 배교자가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말씀의 핵심은 ‘다하여’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 자체를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혹은 반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한쪽으로 돈을 사랑하고, 또 한쪽으로 쾌락을 사랑하고, 나머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돈도 쪼금 사랑하고, 쾌락도 쪼금 사랑하고, 하나님도 쪼금 사랑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돈을 다하여 사랑하면 여호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다하여 사랑하면 여호와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여호와를 다하여 사랑하면 가족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제대로 벌고 제대로 씁니다. 여호와를 다하여 사랑하는 길이 다른 것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모세가 이처럼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가나안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사랑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가나안 문화의 특징은 풍요와 쾌락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멋있는 집을 짓고 안락하고 스위트한 삶을 살며 주말마다 유흥을 즐겼습니다. 이런 생활은 척박한 광야에서 힘든 훈련을 받으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삶입니다. 그들은 풍요와 쾌락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음란한 동영상을 보고 정욕을 즐겼습니다. 피부로 느껴지는 삶의 안정과 쾌락을 주는 세속 문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들은 회개와 배반을 반복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부를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그는 이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세계화하여 세계 선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축복의 때에 자족하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 S라인을 가진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자가 되더니 하나님의 축복을 말아먹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어 쇄락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떠합니까?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왕이 주는 진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고 협박했지만 그는 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집어 던진다는 협박을 받았지만, 금신상에 끝내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나이다. 우리는 주님의 품안에서 그냥 죽겠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고 지혜와 명철을 열 배나 더하사 왕의 총애도 받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4,15절에 보면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가 오히려 좋았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보아도 시뻘건 바위산과 흙먼지 뿐,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 사방에는 다른 백성들이 있었고, 유익을 얻고 즐길만한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물질적인 권세, 물질적인 축복이 따를 때 하나님만 사랑하기 얼마나 힘듭니까? 마음에 조금이라도 축복을 연연해하거나 하나님보다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누룩이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마음을 열다보면 가나안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2장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6-9)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절을 봅시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그들은 지금 이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런 말씀을 지식으로 받지 아니하고 마음 깊이 영접하고 간직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우리 머리에서 마음 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많이 듣고 공부하지만 그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기 쉽고 노트북이나 머릿속에만 넣어 두기 쉽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깊이 회개고 영접하여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정의의 중심인 마음이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말씀을 새긴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7절을 봅시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는데 얼마나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까?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대화의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자녀들도 말씀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입만 벙긋하면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자기는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는 끊임없이 책을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꼭 아버지가 동행합니다. 그리고 첫 수업에 제일 먼저 히브리 알파벳을 쓰도록 합니다. “א ב ג ד ה ו ז ח ט י כ ך ל מ ם נ ן ס ע פ ף צ ץ ק ר שׂ שׁ ת” 이렇게 다 쓰고 나면 아버지는 그 위에 꿀을 바르고 자녀에게 빨아먹도록 합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꿀 송이보다 더 달게 빨아먹을 때 네 생명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사망이 올 것이다.” 그리고 오전수업에는 성경과 역사만 가르치고 오후부터 4시간동안 세상 학문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도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SAT 평균 점수 1375점을 훨씬 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8절을 보면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명하십니다. 손목에 맨다는 것은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요  미간에 붙여 표를 삼는다는 것은 모든 생각과 사고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고와 행동이 철저히 말씀의 지배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말씀을 기록하여 붙이라고 하셨습니다(9).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대화와 행동과 삶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실제적인 문제나 사람을 여호와보다 크게 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세대들은 끊임없이 이를 반복했습니다. 모세는 비록 간곡히 가르쳐도 결국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알았습니다. 우상숭배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를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말씀 자체를 믿었습니다. 말씀이 남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에 새겨진 말씀, 가르쳤던 말씀이 빛을 발할 것을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를 바라보며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멸시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만 계속적으로 말씀 자체를 믿고 공부하고 새기는 사람은 그 말씀이 빛이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도 거룩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08년 그 무엇보다 모세와 같이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젖과 꿀을 즐기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말씀의 꿀맛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멸시하는 세상, 하나님을 멸시하는 가치관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을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것에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있고 그것에 우리의 살 길이 있고 우리의 마래가 있습니다.

  제3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10-19)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새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10,11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땅에는 이들이 새우지 않은 크고 훌륭한 성들이 있습니다. 또 그들이 채워 놓지 않은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파지 않은 우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사는 이들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축복은 우리가 만들어서 갖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요즘 숙대 총장이 뜨고 있습니다. 예전에 숙대 교문은 너무나 볼품이 없어서 학생들이 ‘교도소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기업체에서 자기 회사 이름을 넣으면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총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넣고자 했습니다. 이런 실랑이 끝에 어떤 기업이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기로 하고 정문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부터 숙대가 잘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대통령의 재임 때인 1963년 대법원은 “국립학교에서 성경교육을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980년에는 교실 벽에 십계명을 붙이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청소년과 학교가 얼마나 변질되었습니까? 학생들은 성경보다 팝송을 더 좋아했고 술과 마약과 섹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고 세계에 대하여 죄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패지 되었던 신앙교육을 부활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그 사람도, 그 학교도, 그 나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절을 봅시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축복 속에서 여호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새로운 세대들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 광야가 고향인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풍요로운 땅의 안일감은 여호와를 잊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에 빠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그 축복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여호와, 목자로 삼으시고, 이 날까지 복을 주신 여호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잊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새긴 말씀을 경외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긴 말씀을 기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맹세하는, 즉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 
  16-1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입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삶이 항상 쉽고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불리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어둡고 힘겨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거 1세대들은 신 광야 노정길에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며 여호와를 멸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하며 여호와의 임재를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다고 불신했고 짱돌을 들고 모세를 위협했습니다.(출17:1-7) 그러나 그때는 믿고 신뢰할 때이지 불평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18절에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이란 바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20-2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업적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구속(21-23)과 계시(24-25)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택하심을 받은 언약 백성의 의로운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 시절의 방황과 열매 없는 인생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크게 번성하기를 바라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주실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2008년이 다가고 내년 이 자리에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 한 해 동안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4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78 사도행전 문바울 3144 02-24
377 사도행전 문바울 3278 02-17
376 사도행전 문바울 3398 02-11
375 사도행전 문바울 3109 02-04
374 사도행전 문바울 3184 01-28
373 사도행전 문바울 3068 01-21
372 사도행전 문바울 3189 01-16
열람중 신년특강 문바울 3163 01-06
370 특강 윤성자 2710 01-06
369 신년특강 문바울 3199 12-30
368 누가복음 허느헤미야 3566 12-23
367 특강 정베드로 3074 12-16
366 누가복음 구마가 3280 12-09
365 특강 임요한 2899 12-02
364 사도행전 문바울 3241 11-27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