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08년 신년말씀 제1강(벧전2:4-12)"왕 같은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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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신년말씀 제1강
말씀 베드로전서 2:4-12
요절 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 64년 경 네로의 대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로마에서 핍박받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디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을 “격려의 서신”, “나그네의 서신”, “희망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서신의 핵심 사상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 산소망을 통한 희망을 전하고, 이어서 2장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통한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합당한 정체성을 영접하고 2008년 새 희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4-8)
4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성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람에게는 안정과 중요성의 필요를 채움 받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중요성을 부인당하거나 안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 큰 고통과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마음에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하고 존재감을 흔들리게 합니다. 밥맛을 잃고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며칠씩 장막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헤매기도 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그 사회 속에서 버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복의 근원이 될 줄로 알았는데 도리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또 슬픈 생각과 함께 “내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그는 이들에게 ‘소아시아 땅 재테크 ABC’, ‘소아시아 유명한 먹거리를 찾아서’, ‘소아시아 명문대 입학을 위한 지침서’를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위로와 힘보다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만이 진정으로 위로와 힘을 얻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슬픈 처지만 생각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집착하기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버림받는 상황에 부딪히면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자기 신세 한탄을 들어줄 비슷한 수준의 동역자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사단의 시험에 들어 더 헤매게 됩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심정이 들 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패배감으로 절망감이 들 때, 세상 소망이 좌절될 때, 인간갈등으로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느냐 나아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나아가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4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버림받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여관방에서조차 태어나지 못하시고 겨우 마구간에 누이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달려왔지만 영적인 떡을 주시겠다고 하자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자신과 그 시대의 기준으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자 버리고 떠났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철저히 버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대신 버림받으신 것입니다(사53:3-6).
그러면 베드로가 이처럼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들이 버림받은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택하여 보배로운 산 돌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계기로 삼도록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5절을 봅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흩어진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어 죽은 돌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날 뿐만 아니라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할 수 없고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성소에는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드렸는데 그 재물도 죽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흩어진 성도들이 이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흩어진 성도는 죽은 돌이 아니라 산 돌 같이 살아 있는 집, 움직이는 집이 되어 거룩한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령한 집이란 죽은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집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신령과 진정,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이것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을 봅시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버림받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7,8절을 보면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 되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 즉 삶의 기초가 되고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인생과 구원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마지막 날 부끄러운 심판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구원을 얻습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버림받는다고 불안해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기준이요 기초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반기독교 세력에 의해서 버림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100년사에 처음으로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세가 기울고 있습니다. 캠퍼스나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되면서 어떤 분은 세상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부모님이나 형제 친척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고 또 각오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아픈 것은 목자로서 양들에게마저 버림받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반기독교 세력이 득세하면서 인터넷과 책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양들은 더욱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피싱을 하다보면 양들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점점 목자의 권위, 신앙생활의 절대성, 주권신앙이 버림받는 상황들을 볼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버림받은 것은 그들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과 양들에게 버림받는 것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인생의 머릿돌로 삼기를 거부하고 그 가르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할 것이 아니라 때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예수님께 나아가 새롭게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먼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요 그 다음으로 교회가 편협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양들에게 버림받은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양들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잃어버리고 자기 것을 꾸리는데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보다도 자기 직장이나 자기 미래에 인생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양들을 감동시키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이때에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배우고 우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양들을 감당할 내면을 갖추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쓰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캠퍼스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위기가 도리어 소망의 때라고 믿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가 마음이 넓어지고 거룩해져서 다시 신령한 개인․요회․센터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왕 같은 제사장(9,10)
사도 베드로는 5절에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세상에서 신자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일깨워 줍니다. 9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첫째, 그들은 택하신 족속입니다. 여기서 ‘택하신 족속’이란 선택받은 자들, 뽑힘을 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택함 받은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택함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왕으로부터 버림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동족들의 버림을 받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게르솜’, 즉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도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양들의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 받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많은 거룩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이 버림받고 연단 받는 것은 그들이 택하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자신을 존귀하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왕 같이 고귀한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레위기 4:20절을 볼 때 제사장(祭司長)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33:10절에 보면 제사장은 “주의 법도와 율법을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돕는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또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제사장들은 양 어깨와 가슴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패를 달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역사에 주인공들로 쓰임 받는 족속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소아시아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왕의 권세와 왕의 인격을 갖춘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아시아 지역들은 대부분 절대왕정국가를 이루고 있었고 왕의 권세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전시에는 왕이 최고사령관이요 평시에는 최고사법권자였습니다. 보통 대제사장의 권한을 누리고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졌습니다. 왕은 자신의 권세로 백성들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이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죽일 권위를 가진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복음을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고 에 따라서 그 생명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가르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죄로 죽을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그냥 버려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택하신 족속들에게 주셨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아는 특별한 족속을 이루시고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12제자들을 구별하셨고 소아시아 성도들을 쓰셨으며 이제 우리를 우리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화려해 보이는 인생이라도 예수님을 정확히 믿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와 사단의 지배아래서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영혼들의 생사를 담당할 왕 같은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소아시아 성도들이 사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참다운 왕의 권위를 가지고 생명을 살려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구별된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아시아에는 이미 많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본성대로 감정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귀신과 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소아시아에 성도들을 흩으시고 이런 나라들과는 다른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들을 샘플로 삼아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지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지금 그들이 버림받는 것에 절망하기보다 도리어 소속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른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불편하고 힘들지만 이 세상에서 거룩한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란 하나님이 얻고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는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고 챙깁니다. 특히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속량’하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세상이 그들을 소유할 수가 없고 맘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들은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기시고 챙기시고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위험과 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그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시편 8:4,5절을 보면 그는 그 감격과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또 이사야서 43: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은 자기 소유 삼으신 백성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히 사랑하십니다(사43:4).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상 4가지 신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셔서 특별히 주신 특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훈련을 받을 지라도 늠름하게 감당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각성 시키실 때 즉시 깨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08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이 함께 하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소아시아 성도들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지만 그 가운데서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가르쳐 줍니다. 9b절 봅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힘을 얻고 죄구덩이에 살면서 신음하던 자들이 죄 사함을 얻고 그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온 인류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소아시아 성도들을 택하셨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생애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아름다운 덕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생 열등감과 정욕에 종 되어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죄인을 목자로 불러주시고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고 놀랍습니다. 특히 주님의 기이한 빛 안에서 마음의 여러 어두움이 해결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아픔을 겪으면서 도리어 왕의 내면성을 갖도록 훈련해 주셨습니다. 2008년을 앞두고 저 자신 주님 앞에 가지게 된 한 가지 결단은 올해 저를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부지런히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담대하게 열두 제자양성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거룩한 생활(11,12)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소아시아 성도들이 정체성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11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기적인 욕망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릅니다.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자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변태적인 행위를 용납하고 인정하며 즐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욕망은 신자의 영혼을 거스릅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며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었습니다. 벧전4:3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권면합니다. 육신의 만족을 좇느라, 영혼의 부패를 방치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정체성이 추락하면서 소중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들은 힘써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금․토․일 홍대 주변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욕정의 도가니와 같습니다. ‘원나윗스텐드’를 위해 전국의 논다고 소문난 퀸카․킹카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주말 밤 홍대와 신촌에서 여관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고 합니다. 과거 인디문화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주도하던 터줏대감들마저 눈살을 찌푸리고 변태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홍대 문화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의 한 가운데서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욕적인 문화는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마저 세상적인 욕망과 정욕적인 문화에 오염된다면 이곳은 정말 소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올해 홍익대 가운데 거룩한 흐름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봅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하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신자라고 하면서 불신자와 똑같이 정욕적인 삶을 살거나 세상 욕심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사는 생활인지라 영육 간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주는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일들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올 한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계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므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우리를 보배롭게 여기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특히 세상에서 버림받는 삶을 통해서 우리를 구별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연단하시는 주님의 소망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베드로전서 2:4-12
요절 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 64년 경 네로의 대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로마에서 핍박받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디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을 “격려의 서신”, “나그네의 서신”, “희망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서신의 핵심 사상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 산소망을 통한 희망을 전하고, 이어서 2장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통한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합당한 정체성을 영접하고 2008년 새 희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4-8)
4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성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람에게는 안정과 중요성의 필요를 채움 받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중요성을 부인당하거나 안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 큰 고통과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마음에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하고 존재감을 흔들리게 합니다. 밥맛을 잃고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며칠씩 장막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헤매기도 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그 사회 속에서 버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복의 근원이 될 줄로 알았는데 도리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또 슬픈 생각과 함께 “내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그는 이들에게 ‘소아시아 땅 재테크 ABC’, ‘소아시아 유명한 먹거리를 찾아서’, ‘소아시아 명문대 입학을 위한 지침서’를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위로와 힘보다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만이 진정으로 위로와 힘을 얻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슬픈 처지만 생각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집착하기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버림받는 상황에 부딪히면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자기 신세 한탄을 들어줄 비슷한 수준의 동역자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사단의 시험에 들어 더 헤매게 됩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심정이 들 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패배감으로 절망감이 들 때, 세상 소망이 좌절될 때, 인간갈등으로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느냐 나아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나아가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4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버림받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여관방에서조차 태어나지 못하시고 겨우 마구간에 누이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달려왔지만 영적인 떡을 주시겠다고 하자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자신과 그 시대의 기준으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자 버리고 떠났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철저히 버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대신 버림받으신 것입니다(사53:3-6).
그러면 베드로가 이처럼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들이 버림받은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다시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택하여 보배로운 산 돌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계기로 삼도록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5절을 봅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흩어진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어 죽은 돌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날 뿐만 아니라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할 수 없고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성소에는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드렸는데 그 재물도 죽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흩어진 성도들이 이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흩어진 성도는 죽은 돌이 아니라 산 돌 같이 살아 있는 집, 움직이는 집이 되어 거룩한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령한 집이란 죽은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집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신령과 진정,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이것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을 봅시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버림받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7,8절을 보면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 되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 즉 삶의 기초가 되고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인생과 구원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마지막 날 부끄러운 심판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구원을 얻습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버림받는다고 불안해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기준이요 기초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반기독교 세력에 의해서 버림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100년사에 처음으로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세가 기울고 있습니다. 캠퍼스나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되면서 어떤 분은 세상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부모님이나 형제 친척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고 또 각오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아픈 것은 목자로서 양들에게마저 버림받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반기독교 세력이 득세하면서 인터넷과 책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양들은 더욱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피싱을 하다보면 양들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점점 목자의 권위, 신앙생활의 절대성, 주권신앙이 버림받는 상황들을 볼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버림받은 것은 그들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과 양들에게 버림받는 것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인생의 머릿돌로 삼기를 거부하고 그 가르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할 것이 아니라 때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예수님께 나아가 새롭게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먼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요 그 다음으로 교회가 편협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양들에게 버림받은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양들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잃어버리고 자기 것을 꾸리는데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보다도 자기 직장이나 자기 미래에 인생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양들을 감동시키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이때에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배우고 우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양들을 감당할 내면을 갖추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쓰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캠퍼스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위기가 도리어 소망의 때라고 믿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가 마음이 넓어지고 거룩해져서 다시 신령한 개인․요회․센터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왕 같은 제사장(9,10)
사도 베드로는 5절에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세상에서 신자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일깨워 줍니다. 9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첫째, 그들은 택하신 족속입니다. 여기서 ‘택하신 족속’이란 선택받은 자들, 뽑힘을 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택함 받은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택함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왕으로부터 버림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동족들의 버림을 받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게르솜’, 즉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도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양들의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 받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많은 거룩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이 버림받고 연단 받는 것은 그들이 택하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자신을 존귀하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왕 같이 고귀한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레위기 4:20절을 볼 때 제사장(祭司長)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33:10절에 보면 제사장은 “주의 법도와 율법을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돕는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또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제사장들은 양 어깨와 가슴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패를 달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역사에 주인공들로 쓰임 받는 족속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소아시아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왕의 권세와 왕의 인격을 갖춘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아시아 지역들은 대부분 절대왕정국가를 이루고 있었고 왕의 권세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전시에는 왕이 최고사령관이요 평시에는 최고사법권자였습니다. 보통 대제사장의 권한을 누리고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졌습니다. 왕은 자신의 권세로 백성들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이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죽일 권위를 가진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복음을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고 에 따라서 그 생명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가르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죄로 죽을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그냥 버려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택하신 족속들에게 주셨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아는 특별한 족속을 이루시고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12제자들을 구별하셨고 소아시아 성도들을 쓰셨으며 이제 우리를 우리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화려해 보이는 인생이라도 예수님을 정확히 믿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와 사단의 지배아래서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영혼들의 생사를 담당할 왕 같은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소아시아 성도들이 사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참다운 왕의 권위를 가지고 생명을 살려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구별된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아시아에는 이미 많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본성대로 감정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귀신과 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소아시아에 성도들을 흩으시고 이런 나라들과는 다른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들을 샘플로 삼아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지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지금 그들이 버림받는 것에 절망하기보다 도리어 소속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른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불편하고 힘들지만 이 세상에서 거룩한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란 하나님이 얻고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는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고 챙깁니다. 특히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속량’하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세상이 그들을 소유할 수가 없고 맘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들은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기시고 챙기시고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위험과 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그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시편 8:4,5절을 보면 그는 그 감격과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또 이사야서 43: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은 자기 소유 삼으신 백성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히 사랑하십니다(사43:4).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상 4가지 신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셔서 특별히 주신 특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훈련을 받을 지라도 늠름하게 감당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각성 시키실 때 즉시 깨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08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이 함께 하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소아시아 성도들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지만 그 가운데서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가르쳐 줍니다. 9b절 봅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힘을 얻고 죄구덩이에 살면서 신음하던 자들이 죄 사함을 얻고 그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될 때 온 인류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소아시아 성도들을 택하셨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생애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아름다운 덕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생 열등감과 정욕에 종 되어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죄인을 목자로 불러주시고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고 놀랍습니다. 특히 주님의 기이한 빛 안에서 마음의 여러 어두움이 해결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아픔을 겪으면서 도리어 왕의 내면성을 갖도록 훈련해 주셨습니다. 2008년을 앞두고 저 자신 주님 앞에 가지게 된 한 가지 결단은 올해 저를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부지런히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담대하게 열두 제자양성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거룩한 생활(11,12)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소아시아 성도들이 정체성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11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기적인 욕망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릅니다.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자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변태적인 행위를 용납하고 인정하며 즐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욕망은 신자의 영혼을 거스릅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며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었습니다. 벧전4:3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권면합니다. 육신의 만족을 좇느라, 영혼의 부패를 방치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정체성이 추락하면서 소중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들은 힘써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금․토․일 홍대 주변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욕정의 도가니와 같습니다. ‘원나윗스텐드’를 위해 전국의 논다고 소문난 퀸카․킹카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주말 밤 홍대와 신촌에서 여관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고 합니다. 과거 인디문화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주도하던 터줏대감들마저 눈살을 찌푸리고 변태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홍대 문화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의 한 가운데서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욕적인 문화는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마저 세상적인 욕망과 정욕적인 문화에 오염된다면 이곳은 정말 소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올해 홍익대 가운데 거룩한 흐름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봅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하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신자라고 하면서 불신자와 똑같이 정욕적인 삶을 살거나 세상 욕심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사는 생활인지라 영육 간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주는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일들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올 한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계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므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우리를 보배롭게 여기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특히 세상에서 버림받는 삶을 통해서 우리를 구별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연단하시는 주님의 소망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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