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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7년 성탄4강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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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느헤미야
댓글 0건 조회 3,566회 작성일 07-12-2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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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성탄 제 4 강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말씀: 누가복음 2:1-14
요절: 누가복음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거리에는 귀에 익은 즐거운 종소리가 울리고 연인들은 선물들을 꾸리며 마냥 기뻐합니다. 애들도 조잘 거리며 즐겁게 징글벨을 콧노래로 부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바라던 경제 대통령을 뽑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새로운 한해가 다가와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그 정답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구주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각 심령에 성탄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1-7)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의 탄생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다스리는 로마시대였습니다. 로마는 쥴리어스 시이저의 긴 정복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쥴리어스 시이저가 암살당하자 로마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투스의 삼두정치를 하게됩니다. 그러나 레피투스는 전쟁에서 죽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어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하지만 결국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로마는 일인 집권체제를 이루어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고 ‘가이사 아구스도’ 즉 ‘존엄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다스려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그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룩할려고 힘쓴 결과, 세계는 표면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명령은 변개치 못할 법령이 되어  방방곡곡에 하달되었습니다. 호적명령은 인구조사에 그 목적이 있으며, 인두세 징수는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데 경제적 발판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번영하면 할수록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과 슬픔은 더해만 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은 천하 모든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날 벌어 그날 품삯을 받아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해 처자식을 굶겨야 했습니다. 심지어 어머님을 장사지내는 일까지도 연기해야만 했습니다. 요셉도 이스라엘 민족으로 고통받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요셉도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40km나 되었습니다. 교통수단이 없었던 당시에는 참으로 먼 거리입니다. 무엇보다 마리아는 이미 만삭인 임산부였습니다. 그런 몸으로 고향에 호적하러 가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먼 길을 고생 고생하면서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마리아의 산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산통 주기는 점점 빨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산통이 시작되자 “아이고, 아이고 배야! 요셉, 요셉, 김요셉목자님!”하며 배를 부여 잡았습니다. 요셉도 다급해졌습니다. 요셉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빈방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숙, 하숙집, 여관 등 다 돌아 다녔지만 빈방은 없었습니다. 요셉은 주인에게 매달려 “제∼발, 제∼발” 목이 메이면서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본래 ‘떡집“이란 뜻으로 인심이 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방 한 칸 내어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해산 준비를 위해 찾은 곳은 외양간이었습니다. 외양간에 들어간 요셉은 얼른 풀섶을 모으고 마리아를 뉘었습니다.

  마리아는 길고 긴 산고의 고통 후에 드디어 맏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손수건에 물을 적쳐서 아기 에수님의 몸을 딱았습니다. 그리고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강보‘란 깔깔한 삼베와 같은 천으로서, 찌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옷감입니다. ’구유‘란 짐승들의 밥그릇인 ’여물통‘을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삼베 천에 쌓여져 여물통위에 놓여져야만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방이 없어서, 외양간에서, 삼베 천에 싸여져, 여물통 위에 뉘어졌다. 얼마나 서럽고 불쌍합니까? 이 가엾은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마굿간의 짐승들은 얼굴을 돌린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찬 113장).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호적 명령에 밀려 나사렛에서 베들레험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밀려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겉으로 볼 때 가난과 힘없는 자의 슬픈 운명과 민족의 비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을까요?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모든 슬픈 운명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구주인 예수님은 가장 슬프고 운명적인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슬픈 운명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슬픈 운명에 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가난에 대한 운명주의, 파괴된 가정에 대한 운명주의, 외모로 인한 운명주의, 성격에 대한 운명주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운명주의 등등 갖가지 운명주의로 슬퍼하며 남몰래 웁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가 가장 크고 심각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생들의 모든 슬픈 운명을 이해하시고 담당하시기 위해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고후8:9),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사53:4).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인생들의 모든 허물과 죄짐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벧전2:24). 찬 94장은 예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아무런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친구요, 만민의 친구요, 세상의 구주가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들레험에서 탄생하신 것은 예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미가5:2). 하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의 절대 권력을 쓰셨습니다. 가이사는 로마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호적 명령을 발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를 쓰셔서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를 볼 때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는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흥하고 망하며 끊임없이 변천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 복음전파를 통해 인류 구속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십니다. 세상은 부시와 같은 강대국의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지내놓고 보면 그들은 결국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를 위해 기도했을 때 그 길을 여셨습니다. 한러수교(1990년), 한중수교(1992년)로 왕래가 가능하여 복음의 씨앗들이 뿌려져서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자금성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랐습니다. “아니, 내가 공산주의 국가의 산실인 중국 심장부에 서 있다니” 15년 전 만해도 상상치 못할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역사의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단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 북한 개척을 위해 꾸준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김정일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사 점차 개방정책을 쓰게 하시고 선교의 문도 열어가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북한 개척을 위해 꾸준히 기도할 때 김정일 대학의 지성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을 믿습니다. 모슬렘도 온전히 개척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도 친히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고 계십니다.

Ⅱ.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8-14)

  가이사의 호적 명령으로 온 세상이 분주한 가운데서 예수님은 소리없이 조용히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도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해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베들레험 근처 들에서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법정에서 증언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한 목자요, 밤에 깨어서 양떼를 지키는 충성된 자들이요, 무엇보다 깨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진리의 파숫군들입니다. 

  그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슬픈 소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모두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변심한 연인에게 심적부담을 주고자 민간인이 자동차로 군인을 치고 총을 탈취한 강화도 총기탈취사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4년간 취직재수에 실패한 대학 졸업생이 세상에 대한 미움과 부모님께 대한 죄스러움으로 자살한 소식 등등, 이러한 소식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간간이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자녀가 수학 영재시험 2차 관문을 통과했다든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든가, 상을 받게 되었다든가, 메시지를 잘 섬겼다든가 하는 소식 등등은 조금은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19일 대한민국호를 이끌 선장인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선자는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한 순간에 눈 놋듯 사라졌지만 탈락된 11명의 후보들에게는 슬픈 소식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소식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한쪽이 기뻐하면 다른 한쪽이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고 또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1:8)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왜 온 인류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부은 자’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소식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 낙원을 상실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b) 이는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람이 고생 고생하면서 집을 사고, 평수를 늘리고,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투자를 하지만 죽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생을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남은 년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 10년, 30년, 50년 년수가 다를 뿐이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죽게 됩니다. 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이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받는 것입니다(계 21:8). 또한 사는 날 동안에도 죄의 소욕과 사망권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 가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히2:14,15). 골로새서 1:13절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에도 생명의 세계, 빛의 세계에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요 좋은 소식입니다.

  또한 ‘오늘날’이란 바로 ‘지금’을 말합니다. 지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이 순간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심판에서 영생으로 옮기게 됩니다(요5:24). 지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탄생하셨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 비추인 그 영광의 빛이 내 마음속에 임하게 됩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할 구주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임을 알려줍니다. 구유에 뉘인 연약하고 초라한 아기가 어떻게 온 인류를 구원할 구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왕궁이 아니라 비천한 구유에 태어나심으로 한없이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용서할 수가 있어도 자존심을 건드는 상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Nothing" 보다 'Something'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존심을 버리시고 구유에 탄생하심으로써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겸손의 본체가 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하십니다. 말구유, 즉 말밥통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은 연약하고 무력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로마를 정복하였고, 세계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울밑에선 봉선화처럼 한 없이 연약했던 우리들, 밴댕이처럼 오그라져서 주기보다 받기만을 원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 반열에 서게하시고 세계경제의 11위를 랭크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불같은 선교열정으로 세계를 복음으로 먹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하여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과 나이지리아의 야바텍, 짐바브웨, 우간다 등 후진국과 모스크바, 타쉬켄트 등 공산주의 국가에도 복음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를 21세기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 세계의 지성인 구원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점점 자라서 2010년까지 주일예배 배가의 역사와 2041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세계 만방에 보내시고 세계 구원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나자 홀연히 허다한 천군들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2007년도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이 우리들 심령에 새롭게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각 심령에 죄와 죽음에서 온전히 해방된 기쁨이 넘치게 하여 주시고, 성탄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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