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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07 성탄3강(눅 1:57-80) 돌보사 속량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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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3,073회 작성일 07-12-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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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성탄 제 3 강
돌보사 속량하시며
말씀/누가복음1:57-80
요절/누가복음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성탄절이 설레이고 기다려지나요? 기쁨이 있나요? 아니면 그저 그런가요? 이 시간 먼저 우리의 마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탄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가 그저 그런 마음으로 아무런 기쁨도 감동도 없이 성탄절을 맞이하고 때우기 식으로 넘기길 바라실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번 성탄을 통해 각 사람을 찾아가 기쁨을 회복하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길 원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통해 모든 분주한 마음, 어두운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를 돌보사 속량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힘든 시대를 살던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기뻐할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찬송시에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말씀을 묵상하며 그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올 한해 우리를 돌보시고 속량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충만한 기쁨으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57,58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들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이 여기심을 듣고 모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율법에 따라 팔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하고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줍니다. 이때 보통 친족들과 집안의 어른들이 참여하는 것이 유대의 전통이었습니다. 친족들은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친족들의 결정이라면 잘 따르던 엘리사벳 사모님이 이를 반대하며 말하였습니다. “아니오, 아이예요. 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겁니다.” 친족들은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이는 사가랴의 가문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기쁘고 즐거워야 할 그 날에 엘리사벳과 친족들 사이에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로 실랑이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엘리사벳 사모님이 뜻을 굽히지 않자 친족들은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아이를 무엇이라 이름 하려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이에 친족들은 다 놀랐습니다.

당시 많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이름과 가문의 영광을 빛내주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가랴 가정은 아이가 가문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을 영광을 좇아 살도록 아이의 이름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친족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아이의 이름은 하나님의 뜻대로 “요한”이라고 지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또한번 놀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사람들은 주의 손이 아이와 함께 함을 보고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가랴의 가정과 같이 가문의 영광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아이들에게 영적인 이름을 짓고 주의 손이 함께 하사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자녀들이 되도록 축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64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말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사가랴가 서판에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사가랴는 10개월 동안을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훈련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고 훈련을 준 천사가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사가랴는 입이 열리자 천사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이를 통해 볼 때 사가랴는 침묵훈련을 받는 10개월 동안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그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가랴는 그의 아들 요한의 사명과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깨닫게 되었고 오실 메시야를 통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은혜, 곧 성탄의 은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역사 편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저자 누가는 사가랴의 찬송시를 예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가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고 찬양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곧 성탄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우리 모두 사가랴와 같이 감동적으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셨음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셨다는 말씀은 영어성경으로 보며 더욱 뜻이 분명해집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말씀이 "He has come."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셨다.” 곧 “우리를 찾아오셨다. 심방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찾아오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깨닫고 그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의미며 성탄의 은혜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각기 제 길로 같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합당치 못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반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가 되었습니다.(롬1:29,30)  한마디로 인간은 구제불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늘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방법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의미요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해야할 성탄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소년가장을 찾아가 위로하며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의 방문을 받고 도움을 약속받은 소년가장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아마도 그 소년은 그로인해 기쁨과 감사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도움을 주어도 큰 은혜인데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찾아오시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도바울은 그 은혜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1: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렇기에 성탄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기쁘고 즐거운 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오셨는데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만일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죄악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탄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올 한해 나를 어떻게 돌보셨는지를 깨닫고 사가랴와 같이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는 한량없는 은혜요 기쁨이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어떨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핏덩이로 태어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경험하시고 육체의 한계, 시간의 한계 속에 갇히셔야 했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마치 인간이 개미가 되었다. 구더기가 되었다 한들 비교도 되지 않는 자기 비하요 낮아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성탄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희생과 아픔의 결과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에 한분도 빠짐없이 찬송시를 쓰고 성탄 프로그램에 적극 동참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첫째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68절을 다시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보사 속량하시며.” “속량하셨다.”는 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자를 몸값을 치루고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의 살은 비참했습니다. 바로의 압제 아래 고통하고 신음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바로에게서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해방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은 죽음의 재앙으로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므로 죽음의 재앙을 피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로의 완악함이 꺾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데는 장자의 죽음, 어린 양의 피를 흘리는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된 적이 없다. 우리는 자유하다.”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34~36) 죄의 종된 우리가 자유로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값은 죽음이요 멸망입니다. 죄 값을 치르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과 질고를 지시고 대속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속량했습니다. 그 피가 이 땅의 죄를 씻었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우리는 과거 얼마나 비참한 죄인들이었습니까? 또한 현재적으로 얼마나 죄에 연약하고 넘어지는 쓸모없는 죄인들인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속량하십니다. 그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주님의 성탄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둘째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69~75) 69~7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를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구원의 뿔로 보내셨습니다. 뿔이란 동물의 머리 부분에 있는 뼈로 된 돌출물로 적을 공격하고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쓰임을 받습니다. 또한 뿔이라는 말은 종종 힘을 상징하는 의미로 많이 쓰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원의 뿔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힘과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원수,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원수는 사망의 권세 자은 자 사단입니다. 요한계시록13:1절 말씀을 보면 사단은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단은 힘이 강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쏘의 뿔은 얼마나 강한지 그 뿔에 찔리면  사자라도 쓰러지고 상처가 깊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의 뿔은 무쏘의 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찌르는 사단의 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사단의 뿔에는 두려움, 정욕, 분노와 미움의 뿔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뿔은 오늘날 청년 대학생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취업이 하도 어렵다보니 두려움에 사로잡혀 취업준비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학점 따랴, 봉사활동 하랴, 거기에다 자격증과 고시공부를 하느라 너무나 바쁩니다. 이런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는 일은 너무나도 두려워합니다. 또한 사단은 정욕의 뿔로 많은 청년들을 죄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특히 홍대주변 클럽들은 정욕의 뿔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입니다. 정욕의 뿔에는 쾌락이라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로인해 정욕의 뿔에 찔리면 이성없는 짐승처럼 그 쾌락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정욕문제로 인해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고 그로인해 상처받은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분노와 미움의 뿔은 더욱더 가공할만합니다. 얼마 전 모 대학 교수가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엄한 통제받으며 반복해서 꾸지람을 듣던 중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폭발하여 그만 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 부모님들에게 받은 상처, 친구들에게 받은 왕따의 경험, 성폭행의 경험들을 통해 분노와 미움에 뿔에 찔리게 되면 그 대상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 충동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의 뿔은 너무나도 무서운 것입니다. 사단의 뿔은 살짝만 찔려도 중상을 입힙니다. 한번 찔리면 일생을 고통해야 합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 힘들어서 고통을 잊고자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의 뿔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을 입히고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의 뿔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뿔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원의 뿔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뿔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정죄의 뿔을 꺾으셨습니다. 부활로써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어떠한 사단의 뿔도 꺾으시고 어떠한 상처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 종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는 우리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사단의 뿔에 찔려 원치 않게 죄에 끌려다니며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로인해 정죄와 두려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보내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두려움이 없이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요즘 고용이 불안하다보니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 공기업은 신의 직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의 직장도 60세가 되면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정년이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중간에 잘리는 일도 없습니다. 정리해고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종신토록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캠퍼스 목자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목자의 직분은 종신직입니다. 캠퍼스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우리 목자님들은 항상 청년의 마음으로 사시기 때문에 마음이 늙지 않습니다.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에 대해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이 시간 주님을 종신토록 섬길 수 있도록 정년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셋째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78~7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은 돋는 해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어둡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해 마음이 어둡니다. 또한 너무나 물질문제가 힘들어서, 많은 빚을 져서 마음이 어두운 분들도 있습니다. 취업이 안 되고 시험을 잘못 봐서 마음이 어두운 분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불화와 힘든 가정문제로 마음이 어두운 분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모에 대한 불만족과 인간조건에 대한 열등감으로 마음이 어두운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경기가 너무나 어려고 장사가 안되고 직장생활이 힘들어서 마음이 어두운 분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런 저로 이유로 마음이 어둡습니다. 그로인해 연말연시 성탄절이 다가오는데도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그늘에 앉아 고통하고 있습니다. 실직한 30대 가장이 살길이 막막해 지자 자신의 승용차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두 아들과 함께 동반자살하려다 두 아들은 죽고 자신은 심각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기사를 보고 너무나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최근에는 이처럼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녀들과 함께 동반자살하려고 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의 소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울증과 강박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인터넷은 자살사이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주변에는 불치병으로 살 소망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기다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가족 중에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있으면 온 가족들이 죽음의 그늘에 앉아 고통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 문제, 심각한 인생문제로 인해 죽은 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드러누워지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어떻게 희망을 가지며 평강의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78,7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는 아무리 촛불의 켜고 등불을 밝혀도 마음이 어둡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허무하고 외롭습니다. 어떠한 세상의 즐거움도 참평강을 주지 못합니다. 이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칠수록 더욱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집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78절 상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절망하고 울부짖고 고통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측은하시고 불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돋는 해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돋는 해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평강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한 학사님은 마음이 너무나도 어두워 그토록 동경하던 프랑스로 가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목자님을 통해 그가 근무하던 부서까지 찾아가셨습니다. 그는 그 목자님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내면의 어둠이 해결되자 그는 살소망을 회복하고 목자의 삶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대기업 연구소에 최종면접까지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간염판정을 받고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비전을 잃어버린 채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돋는 해되신 예수님은 어두운 장막 방에 누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대학원의 방향을 주시고 다시금 도전할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직문제도 믿음으로 도전하여 승리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어떠한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돋는 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찾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어둠을 치유하시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도 어두웠습니다. 나는 결혼도 하지 못하고 결혼을 해도 이혼당하여 쓸쓸히 여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운명적인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처럼 내면이 어두운 죄인을 하나님은 대학1학년 때 창세기 말씀을 통해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비로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는 평강이 임하였습니다. 최근 저는 우리 가운데 있는 어두운 일로 성탄절이 다가오는데도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어둠이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말씀을 통해 찾아와 주셨습니다. 우리를 돌아보시고 속량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실 소망을 바라보며 평강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보사 속량하신 성탄의 은혜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이 여기사 구원의 뿔,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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