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1강(6:19-34) 먼저 구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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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1 강
말씀 마태복음 6:19-34
요절 마태복음 6:33
먼저 구해야 할 것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의 물질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제자는 먼저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추구할 때 생기는 현실의 염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힘써 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경제관을 되돌아보고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19-24) :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둠으로써 이 세상의 행복과 안전, 미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유한 것의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평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을 어느 정도 소유했느냐, 주식이나 통장의 잔액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많은 돈이 있으면 다른 것들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교육도 잘 받을 수 있고, 권력이나 지위도 더 용이하게 얻습니다. 이런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은행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동전과 비단 등 돈이 되는 것들을 항아리나 궤짝에 넣고 땅에 묻어두거나 집 안의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전에는 녹이 슬고 비단에 좀이 먹어 못쓰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도둑이 흙벽돌로 지은 집에 구멍을 뚫어 도둑질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은행이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행도 도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제 공황이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 IMF를 통한 외환관리를 받음으로 하루 아침에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주가 폭락으로 하루 아침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도둑은 더욱 지능화되었습니다. 보이스 피싱, 인터넷 해킹 등을 하여 돈을 빼내 가기도 하고 사기를 칩니다. 잠언 23: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어떤 부자는 많은 돈을 모아 놓았는데 조금 써보기도 전에 암에 걸려 죽어버렸습니다. 한 과부는 지독하게 절약을 하였습니다. 집 안에 있는 우물물도 함부로 못쓰게 하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절약을 했습니다. 자신이 눈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절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하여 결국 군대의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돈을 낭비하여 다 써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모아 놓은 돈을 자기를 위해서도 못 쓰고 자식들에게도 인심을 쓰지 못했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에게 말하였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권면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이 저축이나 보험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보험을 들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고에 내가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도 더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17,18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잠19:17). 자신의 능력이면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안 벌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도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보물을 쌓아 두는 이유는 필요할 때 혹은 비상시에 쓰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까? 6:33절을 볼 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하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만 쌓이고 이 땅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게 하십니다. 내가 하늘에 쌓아 두면서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축복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직장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건강을 지켜 주시고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몇 주 전에 선교사 위기관리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습니다. 위기가 생기면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동분서주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이 닥치면 본국과 그에 관계된 사람들은 그를 돕기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직접적인 접촉이 없기 때문에 본국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서 주의 종들을 통한 지원부대가 부지런히 가동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개척 역사를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청춘을 드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을 희생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희생의 결과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임을 축복하시고 목자님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성장하여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좋은 동역자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초를 더 견고히 다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물질을 쓰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고후 4:17). 우리는 받을 것을 생각하고 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상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네게 갚을 수 없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캠퍼스 역사를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젊음을 드리는 삶은 손해 보는 장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볼 때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은밀하게 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러 모양으로 도우시고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재림하실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이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놀라서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1-40).” 우리는 돈을 모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지혜롭게 써야 할 것인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저금통을 두 개를 만들어 주는데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는 구제와 헌금을 위해서 저금하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은행에 계좌가 있고, 하나님 나라에도 계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은행에 있는 계좌는 지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계좌에 있는 돈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실로 인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보물과 마음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 생각에는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간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거기에 마음을 다 쏟습니다. 돈을 거기에 투자했기 때문에 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떨어졌는지에 따라서 울고 웃는 일을 반복합니다. 롯의 아내는 보물을 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불 심판 중에도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나님과 복음 역사에 드리면 마음도 거기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면 야망의 포로가 되고, 쾌락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부패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눈은 곧 마음이라는 유대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으면 그 인생이 환하게 빛이 납니다. 사물의 본질을 밝히 보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병들게 되면 그 인생이 병들게 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것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인생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재물은 수단인데 재물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재물에 눈이 멀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은 돈을 얻기 위해서 아내도 자식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립니다. 세리 마태는 이런 삶의 비극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종은 전인격을 드려서 주인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왜 주일마다 돈을 내는 교회에 가야 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셨다고 감사를 드립니다. NIV 영어 성경은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돈을 대문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전능한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돈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 만큼 돈은 대단한 권세와 마력이 있습니다. 돈이 왕 노릇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의 문제는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인간이 아니라 수익을 위한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내거는 슬로건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떠벌리며 자선 행위를 하지만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면이 있습니다. 돈 중심의 사회는 실용주의를 내세웁니다. 실용주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3:5). 탐심은 죽을 때까지 결코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돈은 쓸 만큼만 있으면 되는데 문제는 쓸 만큼이 과연 어느 정도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유한한데 욕망은 무한합니다. 물질세계에서 이 비싸디 비싼 욕망을 지탱하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일해야 하고, 결국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욕망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돈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기초한 경제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염려하지 마라(25-32) :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했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하고, 취직을 염려하고, 결혼을 염려하고, 자녀 교육시킬 것을 염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귀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귀중합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십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50센티미터를 더 크게 할 수도 없습니다. 야생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물질적인 필요가 생길 때 우리는 염려하기보다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대부분이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돈을 위해서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셋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34) :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결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3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제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먼저 받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이나 칭의가 아니라 제자의 더 나은 의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의란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리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세상도 주실 것이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시리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다른 것을 보너스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록펠러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한 이래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의 가치로 따져서 빌 게이츠의 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해서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근검절약 정신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생 회계장부를 철저히 썼으며, 수입을 온전히 계산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뒤에는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 부서에 직원을 40명이나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부를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쏟아 부음으로써 귀감이 된 그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신앙인 중의 한 분입니다.
지난 주 한경직 목사님 기념관에 들렀습니다. 그 분은 전쟁 후 이 민족이 어려울 때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고 무엇보다 복음 운동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리고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만달러의 상금을 북한 선교를 위해서 내 놓았습니다. 그는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유품은 마지막에 쓰던 휠체어, 지팡이, 모자와 몇 가지 소품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닮은 그의 삶을 본 받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해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고 있으면 오늘 해야 할 일에 써야 할 에너지를 소진해 버립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는 미래의 일,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오늘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힘쓰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한 번에 하루를 취해야 합니다. 오늘의 어려움은 오늘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염려해야 할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채우심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는 대신에 하늘 아버지를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6:19-34
요절 마태복음 6:33
먼저 구해야 할 것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의 물질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제자는 먼저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추구할 때 생기는 현실의 염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힘써 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경제관을 되돌아보고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19-24) :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둠으로써 이 세상의 행복과 안전, 미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유한 것의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평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을 어느 정도 소유했느냐, 주식이나 통장의 잔액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많은 돈이 있으면 다른 것들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교육도 잘 받을 수 있고, 권력이나 지위도 더 용이하게 얻습니다. 이런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은행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동전과 비단 등 돈이 되는 것들을 항아리나 궤짝에 넣고 땅에 묻어두거나 집 안의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전에는 녹이 슬고 비단에 좀이 먹어 못쓰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도둑이 흙벽돌로 지은 집에 구멍을 뚫어 도둑질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은행이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행도 도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제 공황이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 IMF를 통한 외환관리를 받음으로 하루 아침에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주가 폭락으로 하루 아침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도둑은 더욱 지능화되었습니다. 보이스 피싱, 인터넷 해킹 등을 하여 돈을 빼내 가기도 하고 사기를 칩니다. 잠언 23: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어떤 부자는 많은 돈을 모아 놓았는데 조금 써보기도 전에 암에 걸려 죽어버렸습니다. 한 과부는 지독하게 절약을 하였습니다. 집 안에 있는 우물물도 함부로 못쓰게 하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절약을 했습니다. 자신이 눈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절약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하여 결국 군대의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돈을 낭비하여 다 써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모아 놓은 돈을 자기를 위해서도 못 쓰고 자식들에게도 인심을 쓰지 못했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에게 말하였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권면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이 저축이나 보험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보험을 들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고에 내가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도 더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17,18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잠19:17). 자신의 능력이면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안 벌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도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보물을 쌓아 두는 이유는 필요할 때 혹은 비상시에 쓰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까? 6:33절을 볼 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하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만 쌓이고 이 땅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게 하십니다. 내가 하늘에 쌓아 두면서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축복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직장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건강을 지켜 주시고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몇 주 전에 선교사 위기관리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습니다. 위기가 생기면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동분서주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이 닥치면 본국과 그에 관계된 사람들은 그를 돕기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직접적인 접촉이 없기 때문에 본국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서 주의 종들을 통한 지원부대가 부지런히 가동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개척 역사를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청춘을 드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을 희생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희생의 결과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임을 축복하시고 목자님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성장하여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좋은 동역자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초를 더 견고히 다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물질을 쓰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고후 4:17). 우리는 받을 것을 생각하고 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상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네게 갚을 수 없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캠퍼스 역사를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젊음을 드리는 삶은 손해 보는 장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볼 때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은밀하게 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러 모양으로 도우시고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재림하실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이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놀라서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1-40).” 우리는 돈을 모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지혜롭게 써야 할 것인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저금통을 두 개를 만들어 주는데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는 구제와 헌금을 위해서 저금하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은행에 계좌가 있고, 하나님 나라에도 계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은행에 있는 계좌는 지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계좌에 있는 돈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실로 인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보물과 마음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 생각에는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간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거기에 마음을 다 쏟습니다. 돈을 거기에 투자했기 때문에 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떨어졌는지에 따라서 울고 웃는 일을 반복합니다. 롯의 아내는 보물을 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불 심판 중에도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나님과 복음 역사에 드리면 마음도 거기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면 야망의 포로가 되고, 쾌락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부패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눈은 곧 마음이라는 유대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으면 그 인생이 환하게 빛이 납니다. 사물의 본질을 밝히 보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병들게 되면 그 인생이 병들게 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것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인생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재물은 수단인데 재물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재물에 눈이 멀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은 돈을 얻기 위해서 아내도 자식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립니다. 세리 마태는 이런 삶의 비극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종은 전인격을 드려서 주인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왜 주일마다 돈을 내는 교회에 가야 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셨다고 감사를 드립니다. NIV 영어 성경은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돈을 대문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전능한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돈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 만큼 돈은 대단한 권세와 마력이 있습니다. 돈이 왕 노릇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의 문제는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인간이 아니라 수익을 위한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내거는 슬로건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떠벌리며 자선 행위를 하지만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면이 있습니다. 돈 중심의 사회는 실용주의를 내세웁니다. 실용주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3:5). 탐심은 죽을 때까지 결코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돈은 쓸 만큼만 있으면 되는데 문제는 쓸 만큼이 과연 어느 정도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유한한데 욕망은 무한합니다. 물질세계에서 이 비싸디 비싼 욕망을 지탱하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일해야 하고, 결국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욕망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돈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기초한 경제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염려하지 마라(25-32) :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했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하고, 취직을 염려하고, 결혼을 염려하고, 자녀 교육시킬 것을 염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귀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귀중합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십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50센티미터를 더 크게 할 수도 없습니다. 야생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물질적인 필요가 생길 때 우리는 염려하기보다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대부분이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돈을 위해서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셋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34) :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결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3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제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먼저 받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이나 칭의가 아니라 제자의 더 나은 의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의란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리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세상도 주실 것이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시리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다른 것을 보너스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록펠러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한 이래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의 가치로 따져서 빌 게이츠의 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해서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근검절약 정신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생 회계장부를 철저히 썼으며, 수입을 온전히 계산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뒤에는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 부서에 직원을 40명이나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부를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쏟아 부음으로써 귀감이 된 그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신앙인 중의 한 분입니다.
지난 주 한경직 목사님 기념관에 들렀습니다. 그 분은 전쟁 후 이 민족이 어려울 때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고 무엇보다 복음 운동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리고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만달러의 상금을 북한 선교를 위해서 내 놓았습니다. 그는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유품은 마지막에 쓰던 휠체어, 지팡이, 모자와 몇 가지 소품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닮은 그의 삶을 본 받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해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고 있으면 오늘 해야 할 일에 써야 할 에너지를 소진해 버립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는 미래의 일,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오늘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힘쓰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한 번에 하루를 취해야 합니다. 오늘의 어려움은 오늘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염려해야 할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채우심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는 대신에 하늘 아버지를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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