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0강(6:7-15) 제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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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0 강
말씀 마태복음 6:7-15
요절 마태복음 6:9
제자의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
오늘은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첫째, 기도를 가르치신 배경(7-8)이 나옵니다. 이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대조적입니다. 이방인들이 중언부언 기계적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인격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아버지를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9-10). 이방인들의 자기중심적인 기도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셋째로,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11-1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가르치신 배경(7-8) : 7,8절을 보십시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말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남묘호랑개교는 이 말을 계속 반복하고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대부분의 종교는 주문을 외웁니다. 우리도 주기도문을 생각 없이 암송하면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격이 아니라 기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사랑과 신뢰 속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고,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구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찬양과 감사함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턱대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롬8:26). 기도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성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36:37)”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그럴지라도 지혜로운 스승들은 구하기 전에 주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도 구하기 전에 주면 감사를 모르고 당연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또 너무 풍족하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결정력이 약해지고 책임감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구함으로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고, 자녀는 받아서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단 하고 보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알아서 해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면 영적인 성장이 더딥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7-8).”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교감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는데 그 물질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건강을 달라고 하는데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한 인생을 살 때 진정 행복합니다.
둘째, 아버지를 위한 기도(9-10) :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신관에 비교하면 가히 혁명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훈련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과 얼마나 친밀한가를 말해줍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 아버지 하고 신음을 하며 탄식을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토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힘든 인생을 살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분들은 게임이나 음악으로 풀기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마음을 쏟아놓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쉼을 덧입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으시도록, 우상과 구별되신 분으로서 참 하나님으로서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한 존재를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 3 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홀로 높임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돌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 때문에 사업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만한 것이요 은혜를 모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요15:8).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살전5:18).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삶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성실한 시민으로서 덕이 있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분명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롬12:1-2).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란 우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이 세상은 마귀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음란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부정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의 교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의 캠퍼스와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짐으로 창조 목적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타락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각자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의 역할, 가정에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한 목자님은 직장에서 밤을 새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제자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 우리가 할 일, 우리가 결단해야 할 일, 우리가 청구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중 대다수가 내 일을 조금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계속해서 나열합니다. 여기에 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누구의 뜻이 관철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셋째,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11-15) : 11,12절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이란 현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은 오늘뿐입니다. 바로 오늘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해 볼 수 있는 날은 오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을 감사하고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과거에 내게 주신 은총들을 기억하게 되고, 캄캄한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하라고 하십니다. 원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라는 말씀은 나 개인적인 필요만을 구하지 말고 공동체의 필요를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배와 나눔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불공정한 분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서도 음식은 남아돌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식량을 바다에 그냥 던져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난한 나라에 어느 정도 식량을 주고 있지만 경제 논리로 그냥 버리게 됩니다. 또 가난한 나라에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탐욕으로 인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먹고 사는 것에 써야 할 돈을 무기를 만드는데 쓰기 때문입니다. 빌게이츠는 30조에 달하는 돈을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재산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우리도 오늘 미얀마와 중국과 북한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하여 이 말씀을 몸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주기를 원하십니다. 경쟁이 치열해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때입니다. 그들은 집 밖에 나가서 매일 만나를 주워야 했습니다. 이틀 치를 모아 놓으면 썩어서 다음 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매일 신선한 것을 그릇에 담아다가 먹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매일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오늘도 은혜가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하고, 매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한편 이 기도 속에는 ‘아무 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다’는 암시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시시각각 오는 대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 매일 그 수고로 만나를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기도는 자신의 양식과 필요에 관해서 하나님께 기억시켜 드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는 오늘, 이러한 염려 속에서 하나님과 이해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와 그날과 지금 나를 둘러싼 것들이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그날 감당해야 할 일들에 필요한 능력, 지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실수하지 않고 맡겨주신 일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직장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이렇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그는 가정과 직장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고 나서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는 빚을 상징합니다. 빚은 책임이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이행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하도록 허용할 수 없는 어떤 일이 행하여졌거나, 행해졌어야 하는 일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지키도록 요구되는 그것은 거룩함이고 선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일반적인 법률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추상적인 법률에서 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긋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부채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소원해집니다. 미궁 속으로 표류해 가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경우에만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수치심이나 의기소침이나 죄의 대가에 대한 두려움 등을 가진 상태가 아닌 내게 죄지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의 죄를 가진 채로 또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함으로 하나됨이 없다면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도 벽을 쌓는 것입니다. 내가 나와 이웃 사이에 벽을 쌓도록 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똑같은 벽이 쌓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을 용서를 하지 못하게 되면 예의라는 가면을 쓰게 됩니다. 매너를 지킴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피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의 상태에 있지 못하고 용서를 얻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잘못한 것들 즉 모욕, 공격, 위해, 화난 말들, 비방, 잔인한 판단, 무례한 행위와 모든 잘못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저항감을 극복할수록, 나의 증오나 미워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할수록, 더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용서를 베풀수록,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할 때 신뢰의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마음과 육체도 건강하게 됩니다. 우리는 형제나 동역자에게 서운한 것이 있거나 다툼이 있었으면 해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 자신도 행복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행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잘하면 교만해지고 행위를 잘 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죄책감과 정죄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가치감, 낮은 자존감, 자기 경멸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무력감과 분노로 채웁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남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은총이 오늘날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삽니다. 의인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었지만 평생 죄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가 있음을 마음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참 제자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와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말합니다. 악이란 내 속에 있는 악과 악한 사람, 또 인격적인 실체를 가진 사단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순례를 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엄청난 범죄 뒤에는 정욕과 돈 문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인해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돈은 없을 때보다 좀 생길 때 더 큰 유혹이 됩니다.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집니다. 시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믿음이 연약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습니다. 실패하면 시험이고 성공하면 형통이고, 건강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아프면 사단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릇된 생각입니다. 시험은 내가 성공한 뒤에도 교만해지게 함으로 찾아옵니다. 건강한 때에도 자기를 과신하도록 함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하고자 엎드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라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 우주, 물질계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말합니다. 권세는 나라와 한 쌍을 이룹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된 나라를 말하는 것이요, 권세는 실제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권세 없는 나라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권세는 능력 이상의 무한한 권한과 권위를 말합니다.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누구에게든지 불만이 있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시험을 피하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인의 예배요, 진정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제자의 기도를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마태복음 6:7-15
요절 마태복음 6:9
제자의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
오늘은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첫째, 기도를 가르치신 배경(7-8)이 나옵니다. 이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대조적입니다. 이방인들이 중언부언 기계적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인격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아버지를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9-10). 이방인들의 자기중심적인 기도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셋째로,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11-1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가르치신 배경(7-8) : 7,8절을 보십시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말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남묘호랑개교는 이 말을 계속 반복하고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대부분의 종교는 주문을 외웁니다. 우리도 주기도문을 생각 없이 암송하면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격이 아니라 기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사랑과 신뢰 속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고,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구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찬양과 감사함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턱대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롬8:26). 기도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성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36:37)”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그럴지라도 지혜로운 스승들은 구하기 전에 주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도 구하기 전에 주면 감사를 모르고 당연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또 너무 풍족하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결정력이 약해지고 책임감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구함으로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고, 자녀는 받아서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단 하고 보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알아서 해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면 영적인 성장이 더딥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7-8).”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교감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는데 그 물질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건강을 달라고 하는데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한 인생을 살 때 진정 행복합니다.
둘째, 아버지를 위한 기도(9-10) :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신관에 비교하면 가히 혁명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훈련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과 얼마나 친밀한가를 말해줍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 아버지 하고 신음을 하며 탄식을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토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힘든 인생을 살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분들은 게임이나 음악으로 풀기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마음을 쏟아놓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쉼을 덧입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으시도록, 우상과 구별되신 분으로서 참 하나님으로서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한 존재를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 3 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홀로 높임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돌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 때문에 사업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만한 것이요 은혜를 모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요15:8).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살전5:18).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삶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성실한 시민으로서 덕이 있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분명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롬12:1-2).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란 우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이 세상은 마귀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음란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부정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의 교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의 캠퍼스와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짐으로 창조 목적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타락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각자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의 역할, 가정에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한 목자님은 직장에서 밤을 새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제자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 우리가 할 일, 우리가 결단해야 할 일, 우리가 청구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중 대다수가 내 일을 조금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계속해서 나열합니다. 여기에 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누구의 뜻이 관철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셋째,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11-15) : 11,12절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이란 현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은 오늘뿐입니다. 바로 오늘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해 볼 수 있는 날은 오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을 감사하고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과거에 내게 주신 은총들을 기억하게 되고, 캄캄한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하라고 하십니다. 원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라는 말씀은 나 개인적인 필요만을 구하지 말고 공동체의 필요를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배와 나눔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불공정한 분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서도 음식은 남아돌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식량을 바다에 그냥 던져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난한 나라에 어느 정도 식량을 주고 있지만 경제 논리로 그냥 버리게 됩니다. 또 가난한 나라에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탐욕으로 인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먹고 사는 것에 써야 할 돈을 무기를 만드는데 쓰기 때문입니다. 빌게이츠는 30조에 달하는 돈을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재산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우리도 오늘 미얀마와 중국과 북한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하여 이 말씀을 몸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주기를 원하십니다. 경쟁이 치열해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때입니다. 그들은 집 밖에 나가서 매일 만나를 주워야 했습니다. 이틀 치를 모아 놓으면 썩어서 다음 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매일 신선한 것을 그릇에 담아다가 먹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매일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오늘도 은혜가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하고, 매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한편 이 기도 속에는 ‘아무 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다’는 암시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시시각각 오는 대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 매일 그 수고로 만나를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기도는 자신의 양식과 필요에 관해서 하나님께 기억시켜 드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는 오늘, 이러한 염려 속에서 하나님과 이해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와 그날과 지금 나를 둘러싼 것들이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그날 감당해야 할 일들에 필요한 능력, 지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실수하지 않고 맡겨주신 일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직장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이렇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그는 가정과 직장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고 나서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는 빚을 상징합니다. 빚은 책임이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이행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하도록 허용할 수 없는 어떤 일이 행하여졌거나, 행해졌어야 하는 일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지키도록 요구되는 그것은 거룩함이고 선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일반적인 법률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추상적인 법률에서 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긋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부채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소원해집니다. 미궁 속으로 표류해 가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경우에만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수치심이나 의기소침이나 죄의 대가에 대한 두려움 등을 가진 상태가 아닌 내게 죄지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의 죄를 가진 채로 또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함으로 하나됨이 없다면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도 벽을 쌓는 것입니다. 내가 나와 이웃 사이에 벽을 쌓도록 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똑같은 벽이 쌓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을 용서를 하지 못하게 되면 예의라는 가면을 쓰게 됩니다. 매너를 지킴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피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의 상태에 있지 못하고 용서를 얻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잘못한 것들 즉 모욕, 공격, 위해, 화난 말들, 비방, 잔인한 판단, 무례한 행위와 모든 잘못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저항감을 극복할수록, 나의 증오나 미워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할수록, 더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용서를 베풀수록,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할 때 신뢰의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마음과 육체도 건강하게 됩니다. 우리는 형제나 동역자에게 서운한 것이 있거나 다툼이 있었으면 해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 자신도 행복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행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잘하면 교만해지고 행위를 잘 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죄책감과 정죄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가치감, 낮은 자존감, 자기 경멸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무력감과 분노로 채웁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남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은총이 오늘날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삽니다. 의인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었지만 평생 죄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가 있음을 마음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참 제자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와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말합니다. 악이란 내 속에 있는 악과 악한 사람, 또 인격적인 실체를 가진 사단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순례를 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엄청난 범죄 뒤에는 정욕과 돈 문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인해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돈은 없을 때보다 좀 생길 때 더 큰 유혹이 됩니다.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집니다. 시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믿음이 연약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습니다. 실패하면 시험이고 성공하면 형통이고, 건강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아프면 사단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릇된 생각입니다. 시험은 내가 성공한 뒤에도 교만해지게 함으로 찾아옵니다. 건강한 때에도 자기를 과신하도록 함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하고자 엎드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라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 우주, 물질계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말합니다. 권세는 나라와 한 쌍을 이룹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된 나라를 말하는 것이요, 권세는 실제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권세 없는 나라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권세는 능력 이상의 무한한 권한과 권위를 말합니다.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누구에게든지 불만이 있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시험을 피하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인의 예배요, 진정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제자의 기도를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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