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8강(5:17-48) 너 나은 제자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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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8 강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20
더 나은 제자의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제자들도 온전하라는 목표를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구약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또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가지 예를 들어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가르친다거나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 가르치는 자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됩니다. 내가 당장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면 깊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방법은 선생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내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방법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더 많이 배웁니다. 그리고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진짜입니다. 성경 선생으로서 우리가 이것을 행하며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은 힘이 있습니다. 내가 행해보지도 않고 가르치기만 하면 “너나 잘해라”는 핀잔을 듣기 쉽습니다. 아니면 “해 봤어”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진정으로 위대한 제자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그릇을 닦고 십입조를 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가르치기에 힘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모르고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율법적인 자기 의를 주장했습니다. 자기 의는 누더기와 같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붙잡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열심히 지키고자 했을 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정신을 파괴하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으려면 철저하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깨닫고 지키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정신을 깨우쳐 주셨고 또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말씀을 지킬 힘을 주십니다. 또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의 의가 무엇인지 여섯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21-26) :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십계명 중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사람들은 칼과 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조차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의 시발점은 미움, 증오, 인간에 대한 멸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자가 받게 되는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대하여 ‘골빈 놈’, ‘바보’, ‘멍청이’,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형제에게 분노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증오심이 살인 행위에 해당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살인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사람을 때려죽이는 살인자만큼이나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감정 표현과 사소한 욕설까지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고 형제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자는 형제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에 나와서 찬송을 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화목하지 못한 관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실” 것입니다(시66:18).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자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형제와 화해를 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자신도 화를 내셨다고 주장하여 이 말씀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진노하셨습니다(막3:5).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몹시 화를 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은 종교 때문에 그 분이 선을 행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요 우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13-33). 그리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을 때 그것은 불의와 죄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의 화는 인신공격이 아니라 의의 열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혁으로 귀결되는 분노가 아니라 살인으로 끝을 맺는 분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한 죄를 회개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간음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정욕(27-30) :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은 오늘날 죄로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를 정욕적인 눈으로 볼 때 이미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자매들도 형제들의 마음을 빼앗고자 하고, 형제들의 눈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고자 한다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권면하십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만일 오른 눈이나 몸의 다른 지체로 죄를 짓는다면 당장에 빼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단호하게 죄의 소욕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절하게 죄와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옥으로 이끄는 정욕을 철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잡지나 시청하는 유선 방송이 우리에게 음욕을 품게 한다면 우리는 잡지 구독 신청이나 유선 방송 시청 신청을 취소해야 합니다. 음란한 영상물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죄에 물든다면 끊어버려야 합니다. 만일 스스로 타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도망친 요셉과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열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때 정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서로에 대한 헌신이 없는 이혼(31-32) : 31,32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이혼을 금지하셨습니다.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지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솔직히 전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부정하거나 부도덕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여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이 여자와 이혼할 수 있는 온갖 가능한 근거를 찾는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죄를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찾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린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함정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창세기 2장에 있는 결혼 진리로 대답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결혼 제도는 사회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결합입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헌신입니다. 결혼은 사랑이 계속되는 동안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계속되는 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배우자에게 한 약속이며 배우자에게서 받은 약속입니다. 오늘날 이혼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혼은 당장은 시원할 것 같지만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혼은 어떤 경우라도 피해야 합니다.
넷째, 신뢰할 수 없는 맹세(33-37) 33-3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맹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관계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맹세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국 시민의 말로서 절대적 진실을 가져야 합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제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실 되기에 맹세가 필요 없게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보복의 포기(38-42) 38-42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은 사실 은혜로운 규정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빨 한 개가 부러지면 다른 사람 이빨을 열 개를 뽑고자 하는 것이 본심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을 통해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인 해결을 제시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것은 오른 쪽 손 등으로 치는 것으로서 가장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모욕은 상처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왼편 뺨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만약 분노에 가득 차서 왼편 뺨을 돌려 댄다면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모욕하거나 헐뜯거나 내 뺨을 때린다고 할지라도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고소할 권리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구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과 오리를 가자고 하는 로마 군인에게 십리까지 가 주라는 것이라든가,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은 권리를 요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죽고 자아를 포기한 사람의 삶입니다. 무저항, 비폭력의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여섯째, 원수 사랑(43-48): 43-45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19세기 스페인 수상 라몬 나르바에즈는 임종의 자리에서 사제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적들을 모두 용서하십니까?” 이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적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소. 이미 그들을 모두 총살시켰으니까.” 우리는 종종 적들을 총살합니다. 우리가 적들을 총살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지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지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비방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우리는 예수님을 원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마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원수들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는 시각과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상이 없습니다. 조폭들도 이같이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같이 합니다.
4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성장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월감으로 교만해지거나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끊임없이 사람과 비교하느라 내적인 성장이 더디고 마음 고생만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푯대로 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과 섬김과 겸손과 온유하심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들을 때 마음의 가난을 느낍니다. 일종의 파산 상태를 느끼는데 그것은 내가 한참 멀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참 가난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의 의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부단히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20
더 나은 제자의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제자들도 온전하라는 목표를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구약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또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가지 예를 들어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가르친다거나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 가르치는 자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됩니다. 내가 당장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면 깊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방법은 선생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내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방법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더 많이 배웁니다. 그리고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진짜입니다. 성경 선생으로서 우리가 이것을 행하며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은 힘이 있습니다. 내가 행해보지도 않고 가르치기만 하면 “너나 잘해라”는 핀잔을 듣기 쉽습니다. 아니면 “해 봤어”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진정으로 위대한 제자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그릇을 닦고 십입조를 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가르치기에 힘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모르고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율법적인 자기 의를 주장했습니다. 자기 의는 누더기와 같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붙잡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열심히 지키고자 했을 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정신을 파괴하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으려면 철저하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깨닫고 지키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정신을 깨우쳐 주셨고 또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말씀을 지킬 힘을 주십니다. 또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의 의가 무엇인지 여섯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21-26) :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십계명 중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사람들은 칼과 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조차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의 시발점은 미움, 증오, 인간에 대한 멸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자가 받게 되는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대하여 ‘골빈 놈’, ‘바보’, ‘멍청이’,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형제에게 분노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증오심이 살인 행위에 해당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살인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사람을 때려죽이는 살인자만큼이나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감정 표현과 사소한 욕설까지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고 형제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자는 형제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에 나와서 찬송을 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화목하지 못한 관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실” 것입니다(시66:18).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자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형제와 화해를 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자신도 화를 내셨다고 주장하여 이 말씀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진노하셨습니다(막3:5).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몹시 화를 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은 종교 때문에 그 분이 선을 행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요 우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13-33). 그리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을 때 그것은 불의와 죄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의 화는 인신공격이 아니라 의의 열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혁으로 귀결되는 분노가 아니라 살인으로 끝을 맺는 분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한 죄를 회개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간음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정욕(27-30) :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은 오늘날 죄로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를 정욕적인 눈으로 볼 때 이미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자매들도 형제들의 마음을 빼앗고자 하고, 형제들의 눈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고자 한다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권면하십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만일 오른 눈이나 몸의 다른 지체로 죄를 짓는다면 당장에 빼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단호하게 죄의 소욕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절하게 죄와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옥으로 이끄는 정욕을 철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잡지나 시청하는 유선 방송이 우리에게 음욕을 품게 한다면 우리는 잡지 구독 신청이나 유선 방송 시청 신청을 취소해야 합니다. 음란한 영상물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죄에 물든다면 끊어버려야 합니다. 만일 스스로 타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도망친 요셉과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열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때 정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서로에 대한 헌신이 없는 이혼(31-32) : 31,32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이혼을 금지하셨습니다.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지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솔직히 전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부정하거나 부도덕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여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이 여자와 이혼할 수 있는 온갖 가능한 근거를 찾는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죄를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찾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린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함정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창세기 2장에 있는 결혼 진리로 대답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결혼 제도는 사회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결합입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헌신입니다. 결혼은 사랑이 계속되는 동안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계속되는 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배우자에게 한 약속이며 배우자에게서 받은 약속입니다. 오늘날 이혼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혼은 당장은 시원할 것 같지만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혼은 어떤 경우라도 피해야 합니다.
넷째, 신뢰할 수 없는 맹세(33-37) 33-3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맹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관계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맹세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국 시민의 말로서 절대적 진실을 가져야 합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제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실 되기에 맹세가 필요 없게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보복의 포기(38-42) 38-42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은 사실 은혜로운 규정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빨 한 개가 부러지면 다른 사람 이빨을 열 개를 뽑고자 하는 것이 본심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을 통해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인 해결을 제시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것은 오른 쪽 손 등으로 치는 것으로서 가장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모욕은 상처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왼편 뺨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만약 분노에 가득 차서 왼편 뺨을 돌려 댄다면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모욕하거나 헐뜯거나 내 뺨을 때린다고 할지라도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고소할 권리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구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과 오리를 가자고 하는 로마 군인에게 십리까지 가 주라는 것이라든가,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은 권리를 요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죽고 자아를 포기한 사람의 삶입니다. 무저항, 비폭력의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여섯째, 원수 사랑(43-48): 43-45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19세기 스페인 수상 라몬 나르바에즈는 임종의 자리에서 사제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적들을 모두 용서하십니까?” 이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적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소. 이미 그들을 모두 총살시켰으니까.” 우리는 종종 적들을 총살합니다. 우리가 적들을 총살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지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지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비방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우리는 예수님을 원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마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원수들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는 시각과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상이 없습니다. 조폭들도 이같이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같이 합니다.
4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성장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월감으로 교만해지거나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끊임없이 사람과 비교하느라 내적인 성장이 더디고 마음 고생만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푯대로 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과 섬김과 겸손과 온유하심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들을 때 마음의 가난을 느낍니다. 일종의 파산 상태를 느끼는데 그것은 내가 한참 멀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참 가난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의 의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부단히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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