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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7강(5:6-16) 세상의 소금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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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432회 작성일 08-05-1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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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7 강                                                       
말씀 마태복음 5:6-16
요절 마태복음 5:13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팔복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다섯 가지 복 있는 사람과 팔복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6)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십니다(고전1:30).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세상의 향락 대신에 하나님의 뜻과 의를 찾아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필요한 모든 복을 더해 주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마6:33).

  의로운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 되니 다시 배가 고픕니다. 우리는 한 번의 식사로 굶주림이나 목마름을 채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굶주림과 목마름은 살아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일생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싶은 배고픔,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거룩하게 살고 싶은 소원을 갖는 것은 건강한 표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살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알지 못한 그는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이후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빌3:12). 세상에서 거짓은 일시적이지만 진실은 영원합니다. 정직과 성실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계속적이고 끊임없는 욕구는 계속해서 채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실 때 몸의 구속을 받은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의롭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의만 있고 긍휼이 없으면 그 사회는 참으로 메마르고 삭막할 것입니다. 의가 팔복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를 감싸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함께 느끼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행동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병들 때 부모는 아이를 간호하기 위해서 밤을 새우고 갖가지 수고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긍휼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밉살맞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해서 서너번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빚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30조원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친구가 나에게 진 빚은 200만원 정도입니다. 친구가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 갚지 않는다고 형제의 멱살을 잡고 돈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긍휼을 구했지만 빚진 친구를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에게는 동정심도 없고 자비심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왕은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그는 왕의 진노를 사서 모든 빚을 갚기까지 다시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친구를 불쌍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판단과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사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 감격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하여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3).” 우리는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다보면 신뢰가 생기고 그를 마음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의 생각과 중심이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으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삶 가운데서 체험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본다는 말씀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영접을 받아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 분에게 넘치는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 사심, 야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막7:21-23).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3-14).”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음을 받을 때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고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충만하시고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일곱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9)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고, 신뢰를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시고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던 두꺼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피스 메이커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과 화평하게 되어야 사람들에게 화평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한다고 해서 중립에 서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다 진리에 복종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진리를 기초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화평이 오래 갑니다. 자기 유익이나 거짓된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자기 마음이 청결하거나 자기에게 평화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10)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은 그들의 삶의 원칙과 목표 그리고 행복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제자들의 구별된 모습은 세상에 불편함을 주게 되고 따라서 세상은 그들을 박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지만 세상은 가정 중심, 물질 중심으로 살도록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박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박해를 받을 때 그 사실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받는 박해는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언어폭력도 포함이 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크리스천들을 미워합니다. 물론 신자들의 허물을 들먹거리며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만 사실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박해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잘 못해도 욕을 먹지만 잘 해도 욕을 먹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했는데도 욕을 먹는다면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잘못해서 욕을 먹으면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투쟁입니다.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뻐한다는 것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하다가 사두개인들에게 붙잡혀서 채찍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5:40-41). 네로의 박해 시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웃으면서 죽는 것을 보고 네로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크리스천들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핍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사랑을 맛봅니다. 핍박을 받는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 깊은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핍박을 통해서 우리는 총독들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유대에 있는 왕들과 심지어 로마 황제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를 겁내기보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이런 핍박을 받았고 우리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통해서 더욱 순수해지고 복음은 힘 있게 전파됩니다. 지금은 교회가 너무나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때에 깊이 회개하고 팔복의 원리를 따라서 삶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건강한 교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이런 정화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임은 홍대 주변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꼭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또는 캠퍼스 학생들에게 무슨 맛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와 제자 양성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넘어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정말 홍대 캠퍼스와 신촌에 더 나아가 한국과 세계에 맛을 내는 모임으로 세워지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 세상의 소금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은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팔복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제자들이 세상의 맛을 냅니다. 제자들이 있음으로 세상은 살맛이 나는 곳이 됩니다.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사회가 됩니다. 팔복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제자들은 소금과 같이 자기를 희생하고 비움으로서 세상에 맛을 냅니다. 이 세상에 소금의 맛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단 맛은 많은 방식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꿀, 사탕수수, 고구마 등등 수 없이 많습니다. 매운 맛, 신맛, 쓴 맛 등등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짠 맛은 대용이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이 세상의 소망은 교회에 있습니다. 제자들만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짠 맛을 내는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서 각 재료가 그 맛을 내도록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나물무침, 치킨 요리, 제육 복음 등은 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간을 잘 맞추면 먹음직스럽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맛을 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각 사람의 장점이 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각 사람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신자는 신자다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을 욕하지만 속으로는 존경합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사는 것이 힘들다고 타협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고 밟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세상의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불신자와 구별되지 않으면 자기도 함께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고, 같이 타락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면서 맛을 내는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경우에 맛을 잃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성을 잃어버릴 때 그렇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사 3:8).”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믿을 때 우리는 맛을 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빛의 자녀들이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1:5b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9절은 말씀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생의 방향이 없어서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빛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하나님의 등불로서 역할을 다 할 때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은 비추어야 하고 감추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서 등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둡니다. 이같이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빛은 착한 행실입니다.

  신자의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소금이 맛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팔복의 원리에 따라서 사는 행실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 구제하는 일에 뛰어났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이 악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완악한 사울의 마음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착한 행실은 서로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 특별나게 행동하지 않더라도 덕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진실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제자들의 삶이 세상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세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들입니다. 소금의 짠 맛은 음식에 들어갔을 때에라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빛도 그 주변의 어두움을 비추었을 때에라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자는 그 주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제자로서의 독특한 맛을 내고 빛을 비춤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의 진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팔복과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제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소금은 맛을 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와 긍휼을 간직하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갈등이 많은 사회에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에 핍박이 있지만 기쁨으로 이를 감당하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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