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6강(5:1-5) 천국을 가진 사람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411회 작성일 08-05-04 14:06

본문

2008 마태복음 제 6 강                                                               
말씀 마태복음 5:1-5
요절 마태복음 5:3

천국을 가진 사람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유명한 팔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팔복은 천국을 가진 사람들의 윤리입니다. 팔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지고한 복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수준 높은 삶에 따라 살기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자신들에게 이 명령을 적용하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모든 제자들이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이 표준에 따라서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대의 혁명가들보다 훨씬 더 철저한 사랑의 혁명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의 메시지를 더욱 고귀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두가 산상 수훈을 따라 삶으로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이 무리들은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과 무리 중에서 영적인 소원이 있는 자들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팔복이었습니다. 그러면 팔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궁핍을 압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배우고자 하고 자라고자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목마른 사슴 같이 갈급해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불행으로 인해서 부자보다 더 겸손하기가 쉽고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더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난과 재앙을 동의어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가난은 행복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가난을 재앙으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행복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누가는 사회적인 가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할 여지도 없이 생존을 위한 기본 욕구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하루하루의 생존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인 절망적인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절대 빈곤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발적인 가난은 빛을 잃고 맙니다. 이런 극심한 가난을 당해본 마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가난하면서 더욱 탐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이 영적인 교만에 빠진다면 이것도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난을 의로 삼아 부자들을 비판하는 삶을 살면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부의 개념으로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불행을 당해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에 대해 이해를 더 잘 해보기 위해서 부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부자는 탐욕을 가진 자들,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자들, 돈을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잔치 초대에 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자들, 그들의 문에 있는 나사로를 못 본체 하는 자들, 쾌락적인 삶을 사나 동시에 부에 대한 염려로 곤고해 하는 자들(눅8:14), 맘몬의 숭배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일에만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불경건한 자들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들입니다(눅 12:21).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헐벗은 거지들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인지 알지 못하는, 심령이 부요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고귀한 부자는 미덕을 풍부히 갖춘 사람이며 성실하게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재산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외적인 어려움을 당하면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훈련하시는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가난해 지게 됩니다. 인생 실패를 통해서 가난해 지기도 합니다. 형제들은 대개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군 교회에 나가서 믿음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작은 초코파이 하나에도 감사하고 찬송도 매우 은혜스럽게 부릅니다. 외적인 힘에 의해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고 기꺼이 가난을 택한 것입니다. 이를 자발적 가난이라고 합니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쓸모없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슬로부터 풀려나고 재산에 구속되지 않는 좀 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체험하고 더 큰 영적 부요함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요 장군이요 시인이요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주님께 갈급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62:1).”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해지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부요함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부해졌음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물질을 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매주 말씀을 듣고 소감을 쓰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면 가난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누리게 될 복은 무엇입니까? 그 복은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거하심으로 깊은 평화, 기쁨, 자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즉 내면이 최고로 복된 상태, 대단히 행복한 상태입니다. 현재 상태가 더 이상의 행복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이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심오한 내적 기쁨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10절에 나오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누리는 것과 함께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령의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서 고독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친구들,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서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자신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오고 깊은 평강과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가난을 즐기십시오. 천국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접할 때 일종의 영적인 충격을 느꼈습니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인데 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면 나는 정말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축복과 부요함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필요를 구할 때마다 얼마나 신실하게 채워주셨는가 기억하고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나의 영적인 현실을 볼 때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자신의 낙관적인 태도로 인해서 쉽게 자족하고 영적으로 치열하게 싸우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부요한 마음으로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성인들이 성숙해갈수록 영적으로 가난한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주님만을 사모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풍요로 치우친 시대에 심령의 가난을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며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4) :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양들의 죄로 인해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는 자입니다. 애통해 하는 자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입니다.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애통을 죄만으로 한정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한 애통도 있습니다. 민족의 죄로 인한 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앞에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 마음 애통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요, 내면이 부드럽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즐거움으로 마음의 애통을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가벼운 개그로 내면의 아픔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영적인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볼 때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책망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주의 종의 책망을 듣고 근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고후 7:10).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외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40:1-2).” 그리고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나옵니다. 바로 선구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죄사함을 주시고 다시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양들을 양육하면서 흘리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살전 4:18). 이 세상에서의 슬픔은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끝이 있습니다. 슬플 때 수동적으로 슬픔에 몰두하지 마십시오. “울고 싶을 만큼 울어라”는 충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슬프다고 술이나 퍼 마시면 안 됩니다. 슬픔의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애통은 현재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자원이 됩니다. 현재 애통함이 있는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노하기를 더디하고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부드러움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대하지 않고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마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잘 되는 것을 시기하여 생명과 같은 우물을 돌과 흙과 쓰레기로 메울 때 사람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양보를 하면서 아버지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더 큰 지경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혈기가 충만한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하셨습니다. 그 후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를 불러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모세는 그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광야 생활을 이끌었습니다.

  온유의 반대는 분노, 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지만 속으로 삭히다가 화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화가 나면 풀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화풀이는 할수록 더욱 화가 나도록 할 뿐이지 가라앉히지를 못합니다. 화풀이로 화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 연장될 뿐입니다. 티벳의 현인은 분노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억누르지는 말아라. 그렇다고 그것에 의해 행동해서도 안 된다.” 인간관계에서 혈기를 부릴 때 사람을 잃기 쉽습니다. 혈기를 부리면 신뢰를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고 마음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자기 합리화가 더욱 많이 만들어 집니다. 골똘한 생각은 분노의 불꽃을 더욱 타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이때의 위험의식은 물리적인 위협만이 아니라 자존심이나 명예에 대한 상징적인 위협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즉 부당하거나 무례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모욕을 당했다거나 자존심을 손상당한 경우, 또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좌절 등이 이에 포함됩니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이성으로 제어하기 불가능한 격노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쉽게 폭력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사람들은 용서를 모르게 되고 합리적인 사고를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사고는 보복과 앙갚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화가 날 때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분노 상황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조용한 공원으로 가서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에서는 화가 날 때 누워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이나 혼자서 운전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쇼핑이나 식사로 기분 전환을 하려고 하는 것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백화점을 순회하거나 쵸코 케익을 먹는 동안은 화나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날 때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타인에게 대처하여 그와의 논쟁을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이 이에서 남이라고 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잠17:32).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온유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이 받게 되는 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납고 전투적인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살아나가려면 악착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의 복을 받습니다. 건강, 안전, 부, 좋은 영향력, 좋은 인간관계, 인정 등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안락하고 조용한 기쁨을 얻기 때문에 복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수하기 보다는 손해와 상처를 입을 때 마음으로 용서해 줍니다.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원수도 친구로 만듭니다. 온유한 사람은 은근과 끈기로 일을 해 나갑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려면 온유한 사람들이 필요로 합니다. 합력해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동역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사나운 늑대는 멸종 위기이지만 온유한 개는 이제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유한 개는 인간에게 가장 친한 친구요 심지어 가족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를 이끌어간 위대한 리더들은 모두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으며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넷째부터 여덟째까지의 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말씀을 대하며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계속해서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3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93 마태복음 이엘리야 2567 06-08
392 마태복음 이엘리야 2461 06-01
391 마태복음 이엘리야 2410 05-25
390 마태복음 이엘리야 2323 05-18
389 마태복음 이엘리야 2433 05-11
열람중 마태복음 이엘리야 2412 05-04
387 마태복음 이엘리야 2394 04-27
386 마태복음 이엘리야 2431 04-20
385 마태복음 이엘리야 2365 04-13
384 마태복음 이엘리야 2477 04-06
383 마태복음 이엘리야 2533 03-30
382 요한복음 이엘리야 2772 03-23
381 사도행전 문바울 3223 03-16
380 사도행전 문바울 3223 03-10
379 사도행전 문바울 3184 03-0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