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08년 마태3강(3:1-17) 가까이 온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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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마태복음 제 3 강
말씀 마태복음 3:1-17
요절 마태복음 3:2
가까이 온 천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우리는 오늘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삶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특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부담스럽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근막통증후군이 있는 분들에게 아프지만 시원하게 하는 마사지와 같습니다. 회개할 때 아프지만 사실은 속이 시원합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이 시간 우리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며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는 마음에 천국이 임합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천국은 미래적인 특성과 현재적인 것이 있습니다. 미래적인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그때는 죄와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21:4). 우리는 이 천국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고 그 나라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도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21). 로마서 14:1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셋집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그곳은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화평과 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웃음꽃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도 밝고 희망찹니다. 비전과 열정에 불탑니다.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고 삶이 환합니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천국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들어오도록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는 천국 대신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뜨거운 불에서 소금 치 듯함을 받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불안과 답답함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지옥은 존재가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지옥은 생생한 죄의 기억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목마름으로 혀에 물을 축이고 싶어도 물을 축일 수 없습니다. 갈증의 연속입니다. 지옥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살인 의지로 충만한 곳입니다. 눈물과 애통함,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찬 곳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있는 곳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지옥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지옥을 경험합니다. 로마서 2:9절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과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사단의 지배를 받고 고통을 합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서로 미워하고 이기적이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을 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고 서로 증오하고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자 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옥을 피하고 천국을 얻기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에 대한 통회의 감정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악 된 생각과 길, 행동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 불신의 생각, 믿음이 없어 자기를 정죄하는 생각, 정욕적인 생각, 예수님이 늦게 오시니까 죄를 더 짓다가 믿어야겠다는 무지한 생각 등등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5:7절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성령께서는 그 놀라우신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생각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외치게 됩니다(시5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시고 그의 죄를 그 앞에 차례대로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시50:2).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돌이키든지 그는 강제로 그 죄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은 이 사역을 위해서 율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히 4:12). 성령의 이런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범한 죄와 입술로 범한 죄, 하나님에 대한 죄와 타인에 대한 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죄와 하여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죄, 무지로 범한 죄와 고의적으로 범한 죄들이 차례로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죄의 모든 뻔뻔스러움, 더러움, 극악함이 밝히 드러나며, 죄인은 공포와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이로써 결국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를 지을 때 이를 깨닫고 고통을 느낍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애통합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 내면에서 치열한 변론이 오고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사1:18).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진리보다는 자기 생각, 순종보다는 고집을 부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주기 보다는 지독하게 욕심을 부리는 마음, 이기심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럼 나는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이 나라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우리는 회개를 청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청소력’의 저자 마쓰다 미쓰히로는 단지 ‘더러운 것을 치우는 행위’로서의 청소가 아니라, 청소를 통해 공간의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가 다시 행복한 자장을 만들어내며 그 행복한 자장이 내 마음과 주변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인생을 바꾸는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청소력이라 주장합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흐트러진 방,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사무실 등에서 생활을 계속하면 생리학적인 면에서도 심박 수나 혈압이 증가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목이나 어깨가 무거워지고 이유없이 초조해지거나 금방 화를 내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깨끗한 방은 행복한 자장이 형성되어 풍요롭고 행복한 마음을 안겨줍니다. 저자는 사업의 실패와 이혼으로 정신적인 위기까지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고교 동창이었던 한 친구의 도움으로 청소력을 실감하고 다시 새롭고 행복한 인생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단지 청소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번에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한국에 오셔서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이용할 기회가 있으셨습니다. 그때 너무나 화장실이 깨끗해서 화장실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들이 화장실을 깨끗하게 만든 이후 매출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이제는 세계에서 한국의 화장실을 배우고자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청소만 해도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있는데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 한 사람이 회개하고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자 그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웃으면서 잘 사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죄로 인해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은 가장 필요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떠나지 않고 비전이 넘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 베드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그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남자만 오천 명이 되었습니다. 회개도 전염성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심령들을 통해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우리나라는 1905년와 1980년대에 이런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였습니다.
둘째,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들을 매우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에게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나아온 이유는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들어 죄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천국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회개하기보다 감사기도만 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고 경륜이 쌓일수록 회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마음은 돌 같이 딱딱해졌습니다. 그들은 항상 심각했고 무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 그렇습니다. 실제 삶을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조적이고 습관적인 죄를 청산해야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한번 이상은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한번 왕창하고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때가 시커멓게 끼고 병에 걸립니다. 회개는 발을 씻는 것처럼 날마다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할 때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깨끗한 물과 공기가 있는 환경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회개를 잘 하고 깨끗한 삶에서 힘차게 자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작심삼일도 반복해서 일곱 번만 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한 더러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피와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자기의 연약한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 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음을 회개하였다면 사랑을 표현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섬기는 습관이 되기까지 연습해야 합니다.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보요 삶의 변화입니다. 스피릿으로 나타납니다. 헌금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매가 섬기는 일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어 자신도 천국을 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 :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돕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그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물세례는 회개의 표시로 주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 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불같은 소원을 주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요한이 말리며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의”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 내지 성취”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자신을 하나같이 여기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날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예수님께 지상 메시아이자 진정한 왕으로서 모든 것을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메시야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멸시와 천대, 때로는 환영과 상관없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회개하고 천국을 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작년과는 다른 올 해 지난 달과는 다른 더 성숙한 이번 달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 이루어주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 마태복음 3:1-17
요절 마태복음 3:2
가까이 온 천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우리는 오늘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삶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특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부담스럽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근막통증후군이 있는 분들에게 아프지만 시원하게 하는 마사지와 같습니다. 회개할 때 아프지만 사실은 속이 시원합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이 시간 우리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며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는 마음에 천국이 임합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천국은 미래적인 특성과 현재적인 것이 있습니다. 미래적인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그때는 죄와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21:4). 우리는 이 천국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고 그 나라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도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21). 로마서 14:1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셋집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그곳은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화평과 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웃음꽃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도 밝고 희망찹니다. 비전과 열정에 불탑니다.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고 삶이 환합니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천국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들어오도록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는 천국 대신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뜨거운 불에서 소금 치 듯함을 받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불안과 답답함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지옥은 존재가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지옥은 생생한 죄의 기억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목마름으로 혀에 물을 축이고 싶어도 물을 축일 수 없습니다. 갈증의 연속입니다. 지옥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살인 의지로 충만한 곳입니다. 눈물과 애통함,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찬 곳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있는 곳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지옥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지옥을 경험합니다. 로마서 2:9절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과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사단의 지배를 받고 고통을 합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서로 미워하고 이기적이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을 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고 서로 증오하고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자 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옥을 피하고 천국을 얻기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에 대한 통회의 감정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악 된 생각과 길, 행동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 불신의 생각, 믿음이 없어 자기를 정죄하는 생각, 정욕적인 생각, 예수님이 늦게 오시니까 죄를 더 짓다가 믿어야겠다는 무지한 생각 등등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5:7절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성령께서는 그 놀라우신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생각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외치게 됩니다(시5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시고 그의 죄를 그 앞에 차례대로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시50:2).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돌이키든지 그는 강제로 그 죄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은 이 사역을 위해서 율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히 4:12). 성령의 이런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범한 죄와 입술로 범한 죄, 하나님에 대한 죄와 타인에 대한 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죄와 하여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죄, 무지로 범한 죄와 고의적으로 범한 죄들이 차례로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죄의 모든 뻔뻔스러움, 더러움, 극악함이 밝히 드러나며, 죄인은 공포와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이로써 결국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를 지을 때 이를 깨닫고 고통을 느낍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애통합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 내면에서 치열한 변론이 오고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사1:18).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진리보다는 자기 생각, 순종보다는 고집을 부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주기 보다는 지독하게 욕심을 부리는 마음, 이기심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럼 나는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이 나라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우리는 회개를 청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청소력’의 저자 마쓰다 미쓰히로는 단지 ‘더러운 것을 치우는 행위’로서의 청소가 아니라, 청소를 통해 공간의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가 다시 행복한 자장을 만들어내며 그 행복한 자장이 내 마음과 주변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인생을 바꾸는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청소력이라 주장합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흐트러진 방,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사무실 등에서 생활을 계속하면 생리학적인 면에서도 심박 수나 혈압이 증가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목이나 어깨가 무거워지고 이유없이 초조해지거나 금방 화를 내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깨끗한 방은 행복한 자장이 형성되어 풍요롭고 행복한 마음을 안겨줍니다. 저자는 사업의 실패와 이혼으로 정신적인 위기까지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고교 동창이었던 한 친구의 도움으로 청소력을 실감하고 다시 새롭고 행복한 인생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단지 청소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번에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한국에 오셔서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이용할 기회가 있으셨습니다. 그때 너무나 화장실이 깨끗해서 화장실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들이 화장실을 깨끗하게 만든 이후 매출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이제는 세계에서 한국의 화장실을 배우고자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청소만 해도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있는데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 한 사람이 회개하고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자 그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웃으면서 잘 사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죄로 인해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은 가장 필요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떠나지 않고 비전이 넘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 베드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그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남자만 오천 명이 되었습니다. 회개도 전염성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심령들을 통해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우리나라는 1905년와 1980년대에 이런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였습니다.
둘째,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들을 매우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에게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나아온 이유는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들어 죄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천국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회개하기보다 감사기도만 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고 경륜이 쌓일수록 회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마음은 돌 같이 딱딱해졌습니다. 그들은 항상 심각했고 무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 그렇습니다. 실제 삶을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조적이고 습관적인 죄를 청산해야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한번 이상은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한번 왕창하고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때가 시커멓게 끼고 병에 걸립니다. 회개는 발을 씻는 것처럼 날마다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할 때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깨끗한 물과 공기가 있는 환경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회개를 잘 하고 깨끗한 삶에서 힘차게 자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작심삼일도 반복해서 일곱 번만 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한 더러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피와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자기의 연약한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 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음을 회개하였다면 사랑을 표현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섬기는 습관이 되기까지 연습해야 합니다.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보요 삶의 변화입니다. 스피릿으로 나타납니다. 헌금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매가 섬기는 일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어 자신도 천국을 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 :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돕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그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물세례는 회개의 표시로 주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 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불같은 소원을 주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요한이 말리며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의”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 내지 성취”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자신을 하나같이 여기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날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예수님께 지상 메시아이자 진정한 왕으로서 모든 것을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메시야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멸시와 천대, 때로는 환영과 상관없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회개하고 천국을 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작년과는 다른 올 해 지난 달과는 다른 더 성숙한 이번 달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 이루어주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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