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강 (2:1-23)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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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2 강
말씀 마태복음 2:1-22
요절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수님은 많은 별명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죄인들의 친구, 선한 목자, 선한 선생, 하나님께로부터 온 랍비 등등.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을 흔히 왕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히 혁명적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단의 나라가 파괴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의 백성들조차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죄와 슬픔을 담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무시, 아픔, 그 이상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왕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왕 : 헤롯 왕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 박사들은 옛 페르시아 지역(지금의 이라크)에서 현자요, 제사장이요, 천문학자요, 박수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들은 학자로서 많은 서적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해준 성경을 통해서 야곱의 별을 찾았습니다(민24:17).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진정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먼 길을 많은 돈을 투자하고 고생을 하면서 찾아왔을까요? 이는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유대인의 왕은 다스리는 분이신데 목자로서 다스리십니다. 아버지와 같이 다스리십니다.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범한 이후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반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서 힘들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잘 되면 모두 자기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쾌락을 즐깁니다.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자 동성애자가 되고 변태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죄의식이 없어지고 미움과 시기, 거짓과 속임, 간음을 행하고 무자비한 마음으로 폭력과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는 길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악한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왕들이 이 세상에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자기 죄로 고통하며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씻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생긴 컴퓨터를 잘 쓰기 위해서는 포맷을 하던지, 백신을 써서 치료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다윗 왕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혜로 유대인의 왕을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징표를 야곱의 별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의 별이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왕이십니다. 그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일하시는 동안 선한 목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양인 우리에게 생명의 꼴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갈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왕이지만 종과 같이 섬기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들이 배반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시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지 그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27:1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그 머리 위에 붙여져 있었습니다(마 27:37).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그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 같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원수 사단의 권세가 깨뜨려졌습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도록 합니다. 인간이 늙고 병들며 죽고 또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전쟁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상태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의 본성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근원인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박살을 내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는 우리가 이제 어두움의 세력에 정복되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육에 따라’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육 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정욕은 기회가 있을 때마가 꿈틀거립니다. 그런데 왕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도우십니다. 요한일서 5:18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기서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왕 되신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같은 죄를 계속 반복적으로 범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이끌어 내사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사역을 통해 우리가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 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왕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여러분 마음의 왕좌에 모셔 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마음에 왕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여러분은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자유와 절제와 친절과 오래 참음을 누리게 됩니다.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여러분은 그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귀신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왕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왕의 도우심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 한 몸을 돌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영향력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진정한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의 탄원을 들으십니다. 왕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데 더 이상 염려하지 맙시다. 도리어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렇게 할 때 그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거룩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경배할 대상을 찾았고, 찾았을 때 아낌없이 자신들의 보배를 드리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이런 가치를 알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께 온전한 경배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진정한 경배입니다. 내 욕심, 내 생각, 자존심 등 나를 비우고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인격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둘째, 나사렛 사람 예수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요셉은 일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23).
그러면 ‘나사렛’이란 동네는 어떤 곳입니까? 나사렛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이름이 없는 동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언급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던 동네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앗수르 사람들과 피가 섞인 곳이기 때문에 이방 지역 취급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 받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란 것 때문에 무시를 당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53:2-3절에는 이렇게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시고 나사렛 사람으로 불림으로써 별 볼일 없는 지역의 사람인 것처럼 경멸당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나사렛 사람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사렛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의 생애를 살아가셨습니다. 헤롯이 에돔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왕으로 살았던 것과 달리 그는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헤롯처럼 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나사렛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을까요? 그는 들레지 않고 조용하게 말씀 사역과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소외감과 버림받음, 열등감을 감당하고자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고 비천하게 되셨습니다. 그는 따뜻한 방이나 병원이 아니라 짐승들의 거처인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30년 동안 사셨습니다. 그는 공생애 기간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벌레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그는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천 번이나 까무러친다는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시편 22편 14-15절은 말씀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이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그가 버림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망 없던 우리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의 특권을 얻었습니다. 장래의 소망이 없던 우리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비천하고 무가치하기만 했던 우리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벌레와 같았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의 무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문제로 스스로 무시를 받습니다. 나는 이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사생자다, 나는 지방대 출신이다, 나는 가방 끈이 짧다, 나는 잘 생기지 못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양도 없다, 목자 생활에서도 실패했다, 나는 가진 것도 없다 등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로 인해서 위축이 되고 무시를 받습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서 사단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영적인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낮은 자존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으로 삶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료하셨습니다. 그가 나사렛 사람으로 사심으로써 모든 소외된 자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실패한 자들, 열등감이 깊은 자들, 무시 받는 자들이 그를 통해서 회복되는 소망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는 나사렛 사람으로서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섬길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왕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잘 받고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무시를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치료를 받고 부요하게 되는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양들을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는 삶을 기쁨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2:1-22
요절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수님은 많은 별명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죄인들의 친구, 선한 목자, 선한 선생, 하나님께로부터 온 랍비 등등.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을 흔히 왕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히 혁명적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단의 나라가 파괴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의 백성들조차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죄와 슬픔을 담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무시, 아픔, 그 이상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왕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왕 : 헤롯 왕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 박사들은 옛 페르시아 지역(지금의 이라크)에서 현자요, 제사장이요, 천문학자요, 박수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들은 학자로서 많은 서적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해준 성경을 통해서 야곱의 별을 찾았습니다(민24:17).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진정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먼 길을 많은 돈을 투자하고 고생을 하면서 찾아왔을까요? 이는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유대인의 왕은 다스리는 분이신데 목자로서 다스리십니다. 아버지와 같이 다스리십니다.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범한 이후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반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서 힘들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잘 되면 모두 자기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쾌락을 즐깁니다.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자 동성애자가 되고 변태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죄의식이 없어지고 미움과 시기, 거짓과 속임, 간음을 행하고 무자비한 마음으로 폭력과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는 길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악한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왕들이 이 세상에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자기 죄로 고통하며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씻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생긴 컴퓨터를 잘 쓰기 위해서는 포맷을 하던지, 백신을 써서 치료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다윗 왕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혜로 유대인의 왕을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징표를 야곱의 별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의 별이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왕이십니다. 그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일하시는 동안 선한 목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양인 우리에게 생명의 꼴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갈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왕이지만 종과 같이 섬기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들이 배반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시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지 그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27:1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그 머리 위에 붙여져 있었습니다(마 27:37).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그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 같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원수 사단의 권세가 깨뜨려졌습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도록 합니다. 인간이 늙고 병들며 죽고 또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전쟁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상태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의 본성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근원인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박살을 내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는 우리가 이제 어두움의 세력에 정복되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육에 따라’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육 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정욕은 기회가 있을 때마가 꿈틀거립니다. 그런데 왕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도우십니다. 요한일서 5:18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기서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왕 되신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같은 죄를 계속 반복적으로 범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이끌어 내사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사역을 통해 우리가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 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왕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여러분 마음의 왕좌에 모셔 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마음에 왕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여러분은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자유와 절제와 친절과 오래 참음을 누리게 됩니다.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여러분은 그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귀신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왕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왕의 도우심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 한 몸을 돌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영향력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진정한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의 탄원을 들으십니다. 왕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데 더 이상 염려하지 맙시다. 도리어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렇게 할 때 그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거룩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경배할 대상을 찾았고, 찾았을 때 아낌없이 자신들의 보배를 드리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이런 가치를 알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께 온전한 경배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진정한 경배입니다. 내 욕심, 내 생각, 자존심 등 나를 비우고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인격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둘째, 나사렛 사람 예수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요셉은 일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23).
그러면 ‘나사렛’이란 동네는 어떤 곳입니까? 나사렛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이름이 없는 동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언급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던 동네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앗수르 사람들과 피가 섞인 곳이기 때문에 이방 지역 취급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 받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란 것 때문에 무시를 당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53:2-3절에는 이렇게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시고 나사렛 사람으로 불림으로써 별 볼일 없는 지역의 사람인 것처럼 경멸당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나사렛 사람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사렛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의 생애를 살아가셨습니다. 헤롯이 에돔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왕으로 살았던 것과 달리 그는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헤롯처럼 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나사렛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을까요? 그는 들레지 않고 조용하게 말씀 사역과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소외감과 버림받음, 열등감을 감당하고자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고 비천하게 되셨습니다. 그는 따뜻한 방이나 병원이 아니라 짐승들의 거처인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30년 동안 사셨습니다. 그는 공생애 기간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벌레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그는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천 번이나 까무러친다는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시편 22편 14-15절은 말씀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이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그가 버림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망 없던 우리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의 특권을 얻었습니다. 장래의 소망이 없던 우리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비천하고 무가치하기만 했던 우리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벌레와 같았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의 무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문제로 스스로 무시를 받습니다. 나는 이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사생자다, 나는 지방대 출신이다, 나는 가방 끈이 짧다, 나는 잘 생기지 못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양도 없다, 목자 생활에서도 실패했다, 나는 가진 것도 없다 등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로 인해서 위축이 되고 무시를 받습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서 사단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영적인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낮은 자존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으로 삶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료하셨습니다. 그가 나사렛 사람으로 사심으로써 모든 소외된 자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실패한 자들, 열등감이 깊은 자들, 무시 받는 자들이 그를 통해서 회복되는 소망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는 나사렛 사람으로서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섬길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왕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잘 받고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무시를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치료를 받고 부요하게 되는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양들을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는 삶을 기쁨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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