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강 (1:1-25) 예수 그리그도의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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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 강
말씀 마태복음 1:1-25
요절 마태복음 1:16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와 잉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가장 반복되는 단어는 “낳고”인데 42번 나옵니다. 이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생명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몇 가지 영적 진리를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족보는 조개껍데기와 같이 딱딱해 보이지만 그 안을 열어보면 부드러운 살과 같이 은혜로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고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1) :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계보는 족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뿌리라면 다윗은 믿음의 꽃이고 예수님은 그 열매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뿌리가 있는 분이시오 유대인의 왕으로서 메시야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2, 22:18). 그 약속을 기초로 구속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 약속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이삭, 야곱, 유다를 통해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간적으로 약점과 허물과 실수가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이삭은 연약했으며, 야곱은 사기를 잘 쳤고, 유다는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이들은 행위로 하면 도저히 쓰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또 이 역사는 육적인 혈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75세나 되어 쓸모없는 아브라함을 은혜로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은 이스마엘이었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택하셔서 구속역사의 계승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이삭에게도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관습을 좇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야곱을 통해 축복의 물줄기가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요, 다윗은 여덟째아들로서 막내였습니다. 이를 볼 때 장자를 통해 계승된 경우가 오히려 드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인간의 전통과 관습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조건이나 전통이나 행위에 관계없이 택하신 자들을 통해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주권적인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복의 근원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왕이요,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그 역사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둘째,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 예수님 족보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간혹 여인 중에서 왕비가 되었다든가 하면 특별히 기록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사라나 리브가와 같은 여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그 중에서도 이방 여인들이 나타납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아무리 그 시대에 후사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다말이 창녀 모양을 하고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말의 옳음을 시인했습니다(창38:26). 다말은 여인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찌하든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위해서 믿음의 후손들을 세워야 합니다. 생명의 줄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복음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몸을 던지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어느 한계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런 한계를 믿음으로 넘어섰습니다. 다말의 책임성 있는 자세가 유다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다는 무책임한 사람에서 아버지 야곱과 역사와 하나님께 책임성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서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수2:8-13).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젊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재혼을 할 수 있었는데도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장래를 생각해서 돌아가라고 강권하지만 그녀는 고백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룻의 이런 충성과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보아스의 사랑을 받아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명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는 말은 간결하지만 다윗의 죄를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같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죄인이었습니다.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의 간음죄와 살인죄로 인해서 사단이 많은 공격을 했고 하나님의 마음도 슬프시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들 대신에 솔로몬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서 다윗의 위를 잇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족보에 기록된 남성들. 7-11절을 보면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보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말년은 우상숭배로 더럽혀졌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했습니다. 아사는 말년에 발에 병이 생겼으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는 타협의 악을 행함으로 자녀들이 타락과 부패의 길을 가도록 했습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 하나님이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웃시야는 강성해지자 교만하였고 제사장의 일을 하려 들다가 문둥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습니다. 히스기야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지 못하다가 병이 낫고, 분별력 없이 보물 창고를 바벨론 사신에게 다 보여주고 아들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상 숭배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고 결코 끌 수 없었습니다. 그의 넘치는 죄로 인해서 유다는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몬, 여고냐(즉 여호야긴) 등도 악하였습니다. 구약 역사가 전체적으로 그러하지만, 특히 열왕들의 역사 천년은 어두운 기간이었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증거한 기간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인간적, 법적 계보는 이렇게 흘러내려왔습니다. 인간의 많은 죄와 부족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민 구원 계획을 그의 열심으로 친히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하실 구주를 보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가히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악한 자들로 인해, 지금 우리의 연약함과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실패하지 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만이라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힘을 씁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전념합시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고 해 놓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기록한 예를 따르면 ‘요셉은 그리스도를 낳고’ 하든지 아니면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를 낳고’ 해야 마땅한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창세기 3:15절의 예언대로 여자의 후손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비어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이루려면 양의 위치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신뢰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죄는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인간의 죄를 속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속량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탄생 배경을 저자 마태는 18절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참으로 특이한 출생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에서 정혼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고, 1년 동안 순결을 지킨 후에 결혼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마리아는 법적으로 요셉의 아내였으나, 실제로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믿음으로 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당장 임신한 마리아를 사람들에게 끌고 가서 돌에 맞아 죽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저주하지 않고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정혼관계만 끊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의에는 은혜와 진리가 조화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생각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아담의 죄의 피를 이어 받지 않아서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딤전2:5).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되 무엇보다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는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십니다. 질병에서 치료하시고, 죄사함을 주시고 귀신의 세력에서 자유를 주시고 죽음에서 건지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온전해지도록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마태복음의 시작을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은 그 앞에 설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 위엄 앞에 두려워하고 짓눌리고 기를 펼 수도 없고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계급장 단 군인만 봐도 우리는 긴장합니다. 법복 입은 판사만 봐도, 호루라기를 입에 문 경찰관만 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센터에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사모님이 등장하면 다 반가워합니다. 서로 달려들어서 웃고 즐거워합니다.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한 없이 작아지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죄인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더러운 것으로 보시고 그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우리는 자기 힘으로는 죄의 세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음란한 막달라 마리아가 성결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이던 자가 긍휼이 넘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자 마태입니다. 그는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기 위해서 악명 높은 세리가 되어 악착같이 세금을 모으느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와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모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쌓이는 스트레스와 고독으로 밥맛을 잃어버리고, 허무와 불안과 두려움으로 밤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담스러운 그와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사 희생적이고, 베푸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히기까지 자기를 죄인들과 동일시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죄인들을 향한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나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말씀은 고정된 문자가 아니라 역동적인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음과 인내와 친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제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학생 리더 수련회에 참가했을 때 자기를 비우고 학생들과 함께 하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때 메리 비세고비치는 저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말씀 안에서 교제할 때 우리는 세대 차이, 문화 차이, 인종의 벽을 넘어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친구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 고독할 때, 누군가에게 버림 받은 기분이 들 때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가장 친한 친구 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할 때 쓰시고 악인이라도 그 뜻을 따라서 쓰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도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동역자들과 그리고 양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는 가운데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1:1-25
요절 마태복음 1:16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와 잉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가장 반복되는 단어는 “낳고”인데 42번 나옵니다. 이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생명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몇 가지 영적 진리를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족보는 조개껍데기와 같이 딱딱해 보이지만 그 안을 열어보면 부드러운 살과 같이 은혜로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고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1) :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계보는 족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뿌리라면 다윗은 믿음의 꽃이고 예수님은 그 열매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뿌리가 있는 분이시오 유대인의 왕으로서 메시야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2, 22:18). 그 약속을 기초로 구속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 약속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이삭, 야곱, 유다를 통해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간적으로 약점과 허물과 실수가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이삭은 연약했으며, 야곱은 사기를 잘 쳤고, 유다는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이들은 행위로 하면 도저히 쓰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또 이 역사는 육적인 혈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75세나 되어 쓸모없는 아브라함을 은혜로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은 이스마엘이었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택하셔서 구속역사의 계승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이삭에게도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관습을 좇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야곱을 통해 축복의 물줄기가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요, 다윗은 여덟째아들로서 막내였습니다. 이를 볼 때 장자를 통해 계승된 경우가 오히려 드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인간의 전통과 관습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조건이나 전통이나 행위에 관계없이 택하신 자들을 통해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도 주권적인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복의 근원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왕이요,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그 역사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둘째,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 예수님 족보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간혹 여인 중에서 왕비가 되었다든가 하면 특별히 기록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사라나 리브가와 같은 여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그 중에서도 이방 여인들이 나타납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아무리 그 시대에 후사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다말이 창녀 모양을 하고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말의 옳음을 시인했습니다(창38:26). 다말은 여인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찌하든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위해서 믿음의 후손들을 세워야 합니다. 생명의 줄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복음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몸을 던지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어느 한계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런 한계를 믿음으로 넘어섰습니다. 다말의 책임성 있는 자세가 유다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다는 무책임한 사람에서 아버지 야곱과 역사와 하나님께 책임성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서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수2:8-13).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젊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재혼을 할 수 있었는데도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장래를 생각해서 돌아가라고 강권하지만 그녀는 고백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룻의 이런 충성과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보아스의 사랑을 받아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명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는 말은 간결하지만 다윗의 죄를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같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죄인이었습니다.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의 간음죄와 살인죄로 인해서 사단이 많은 공격을 했고 하나님의 마음도 슬프시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들 대신에 솔로몬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서 다윗의 위를 잇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족보에 기록된 남성들. 7-11절을 보면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보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말년은 우상숭배로 더럽혀졌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했습니다. 아사는 말년에 발에 병이 생겼으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는 타협의 악을 행함으로 자녀들이 타락과 부패의 길을 가도록 했습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 하나님이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웃시야는 강성해지자 교만하였고 제사장의 일을 하려 들다가 문둥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습니다. 히스기야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지 못하다가 병이 낫고, 분별력 없이 보물 창고를 바벨론 사신에게 다 보여주고 아들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상 숭배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고 결코 끌 수 없었습니다. 그의 넘치는 죄로 인해서 유다는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몬, 여고냐(즉 여호야긴) 등도 악하였습니다. 구약 역사가 전체적으로 그러하지만, 특히 열왕들의 역사 천년은 어두운 기간이었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증거한 기간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인간적, 법적 계보는 이렇게 흘러내려왔습니다. 인간의 많은 죄와 부족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민 구원 계획을 그의 열심으로 친히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하실 구주를 보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가히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악한 자들로 인해, 지금 우리의 연약함과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실패하지 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만이라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힘을 씁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전념합시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고 해 놓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기록한 예를 따르면 ‘요셉은 그리스도를 낳고’ 하든지 아니면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를 낳고’ 해야 마땅한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창세기 3:15절의 예언대로 여자의 후손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비어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이루려면 양의 위치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신뢰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죄는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인간의 죄를 속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속량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탄생 배경을 저자 마태는 18절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참으로 특이한 출생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에서 정혼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고, 1년 동안 순결을 지킨 후에 결혼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마리아는 법적으로 요셉의 아내였으나, 실제로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믿음으로 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당장 임신한 마리아를 사람들에게 끌고 가서 돌에 맞아 죽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저주하지 않고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정혼관계만 끊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의에는 은혜와 진리가 조화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생각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아담의 죄의 피를 이어 받지 않아서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딤전2:5).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되 무엇보다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는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십니다. 질병에서 치료하시고, 죄사함을 주시고 귀신의 세력에서 자유를 주시고 죽음에서 건지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온전해지도록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마태복음의 시작을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은 그 앞에 설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 위엄 앞에 두려워하고 짓눌리고 기를 펼 수도 없고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계급장 단 군인만 봐도 우리는 긴장합니다. 법복 입은 판사만 봐도, 호루라기를 입에 문 경찰관만 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센터에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사모님이 등장하면 다 반가워합니다. 서로 달려들어서 웃고 즐거워합니다.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한 없이 작아지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죄인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더러운 것으로 보시고 그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우리는 자기 힘으로는 죄의 세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음란한 막달라 마리아가 성결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이던 자가 긍휼이 넘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자 마태입니다. 그는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기 위해서 악명 높은 세리가 되어 악착같이 세금을 모으느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와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모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쌓이는 스트레스와 고독으로 밥맛을 잃어버리고, 허무와 불안과 두려움으로 밤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담스러운 그와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사 희생적이고, 베푸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히기까지 자기를 죄인들과 동일시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죄인들을 향한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나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말씀은 고정된 문자가 아니라 역동적인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음과 인내와 친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제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학생 리더 수련회에 참가했을 때 자기를 비우고 학생들과 함께 하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때 메리 비세고비치는 저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말씀 안에서 교제할 때 우리는 세대 차이, 문화 차이, 인종의 벽을 넘어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친구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 고독할 때, 누군가에게 버림 받은 기분이 들 때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가장 친한 친구 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할 때 쓰시고 악인이라도 그 뜻을 따라서 쓰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도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동역자들과 그리고 양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는 가운데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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