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8년 부활 특강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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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부활절 특강
말씀 요한복음 11:1-44
요절 요한복음 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00층 이상의 높은 빌딩, 우주 정거장, 놀라운 의술, 항공 공학, 그리고 생명 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동물 복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누리게 되는 삶의 변화 등을 보면 인간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우리를 가련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기력과 패배감과 피해의식 등 죽음의 요소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1.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l-l6)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그들은 그 지방에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였습니다(요 12:1-3).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그 마을을 지날 때에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섬기던 그 자매였습니다(눅 10:38-42).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오라버니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 그런데 예수님은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걸린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죽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할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몇 년 동안 양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양이 없으면 인생의 의미를 못 느끼고 자신은 목자 체질이 아니라며 운명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연단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자녀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양으로서 거룩하심과 사랑에서 자라나는 것도 중요한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당하는 환란을 믿음을 배우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훈련하는 사랑이요, 차원이 높은 사랑입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 이게 어찌된 불행인가! 난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하며 슬퍼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환난이나 질병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 데는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연단을 받을 때 잠시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더 큰 믿음을 가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의 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요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새로운 도전이 있습니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생활수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를 토인비는 『풍요 속의 빈곤』 속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남부는 날씨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전의 기회를 갖기가 어렵지만, 북부는 변화가 심한 날씨로 인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변화에 적응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부는 변화에 응전을 하면서 더 잘 살게 되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과 같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본래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 동안 베다니의 두 자매들은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요? 예수님은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신 것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무관심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기대하고 구하는 것 이상의 선물인 부활의 믿음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 55:8-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시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도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한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잘 고치는 분이라는 정도에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당한 불행을 방치한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은 사랑을 하셨습니다. 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보다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가 로스엔젤리스에서 흰 눈이 덮인 대머리 산을 등산했을 때입니다. 산을 오르는데 산불에 탄 거목들이 그슬린 채 자라고 있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잔챙이들은 견디지를 못하고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거목들은 산불을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거목들의 껍질은 불에 탄 흔적으로 숯덩이 같았지만 그 속에서는 줄기들이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거목으로 자라려면 불같은 시험들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그러자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며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는 의리 때문에, 체면 때문에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억지로, 괴로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기뻐하십니다.
2.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조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원망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마르다에게 이보다 더 듣고 싶은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는 조금 전에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안다고 말을 했지만 지금 주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이를 받아들일 믿음이 없었습니다. 밥상을 차려 주는데 먹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나겠지요 뭐.”라며 자기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 안에서 나름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시오, 지금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이란 늙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란 말씀은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권능자시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자란 뜻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동안 깊은 잠을 잘 뿐입니다.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잠은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사실 잠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아침도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그와 같습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신령한 새 몸, 거룩한 새 몸, 강건한 새 몸을 입고(고전 15:44) 천국에서 새 아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의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는 것, 즉 죽은 나사로가 지금 살아나리라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 물으셨을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동문서답을 합니다(27). 물론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셔서 나사로가 어떤 병에 걸렸더라도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하게 될 것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난다는 것만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아나겠지 뭐” 하는 식으로,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나름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한계를 두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죽음이 주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죄로 인해 영혼이 죽어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겐 비전이 없고 정열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과 현실적인 유익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런 생각이 더 일찍 찾아왔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게 보여서 목련 꽃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고 허무한 생각을 잊고자 미친 듯이 공부를 했습니다. 허무한 생각은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게 되었을 때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기고 참된 만족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에 잇대어 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삶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같이 우리가 한계적인 생각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지만 실제적인 부활 신앙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3.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마리아에게 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 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3-35). 비통하다는 뜻은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 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아래서 희망도 없이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을 슬퍼하는 인생들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할 때 이런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심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눈물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며 비꼬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앞에 놓고도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는 인생들의 모습을 볼 때 매우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잠잠히 무덤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가 보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코를 움켜쥐며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 지내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지만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의 가슴 속에는 무거운 불신의 돌, 체념의 돌, 절망의 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현재 나사로가 묻힌 무덤을 보며 절망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가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믿음으로 돌을 옮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마지못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시오,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에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장사지내러 가는 길에서 만나 관 속에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친히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 되던 날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키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때는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요 살아 있는 자는 변화되어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산 소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의 능력을 마음에 새기도록 성경 말씀을 주시고 세례와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넘는 일에 도전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활의 믿음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을 살리고,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려 하실 때 먼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빠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을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명에게 더 복음을 전하고 한 팀의 일대일을 하고, 한 번 더 기도하고, 양들에게도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울 때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십니다.
무덤에 있는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큰 소리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그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먼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소감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순종하게 됩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 대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시간 우리가 “네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시다. 죽은 사람도 살리신 예수님께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 어려움 때문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있는 슬픔과 실패, 어두움과 허무, 불가능과 운명 등의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도 승리하고, 자녀 교육과 가정생활, 목자생활도 더욱 알차게 열매를 맺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1:1-44
요절 요한복음 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00층 이상의 높은 빌딩, 우주 정거장, 놀라운 의술, 항공 공학, 그리고 생명 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동물 복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누리게 되는 삶의 변화 등을 보면 인간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우리를 가련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기력과 패배감과 피해의식 등 죽음의 요소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1.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l-l6)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그들은 그 지방에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였습니다(요 12:1-3).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그 마을을 지날 때에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섬기던 그 자매였습니다(눅 10:38-42).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오라버니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 그런데 예수님은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걸린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죽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할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몇 년 동안 양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양이 없으면 인생의 의미를 못 느끼고 자신은 목자 체질이 아니라며 운명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연단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자녀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양으로서 거룩하심과 사랑에서 자라나는 것도 중요한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당하는 환란을 믿음을 배우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훈련하는 사랑이요, 차원이 높은 사랑입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 이게 어찌된 불행인가! 난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하며 슬퍼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환난이나 질병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 데는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연단을 받을 때 잠시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더 큰 믿음을 가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의 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요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새로운 도전이 있습니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생활수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를 토인비는 『풍요 속의 빈곤』 속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남부는 날씨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전의 기회를 갖기가 어렵지만, 북부는 변화가 심한 날씨로 인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변화에 적응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부는 변화에 응전을 하면서 더 잘 살게 되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과 같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본래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 동안 베다니의 두 자매들은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요? 예수님은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신 것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무관심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기대하고 구하는 것 이상의 선물인 부활의 믿음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 55:8-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시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도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한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잘 고치는 분이라는 정도에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당한 불행을 방치한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은 사랑을 하셨습니다. 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보다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가 로스엔젤리스에서 흰 눈이 덮인 대머리 산을 등산했을 때입니다. 산을 오르는데 산불에 탄 거목들이 그슬린 채 자라고 있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잔챙이들은 견디지를 못하고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거목들은 산불을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거목들의 껍질은 불에 탄 흔적으로 숯덩이 같았지만 그 속에서는 줄기들이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거목으로 자라려면 불같은 시험들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그러자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며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는 의리 때문에, 체면 때문에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억지로, 괴로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심기를 기뻐하십니다.
2.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조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원망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마르다에게 이보다 더 듣고 싶은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는 조금 전에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안다고 말을 했지만 지금 주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이를 받아들일 믿음이 없었습니다. 밥상을 차려 주는데 먹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나겠지요 뭐.”라며 자기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 안에서 나름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시오, 지금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이란 늙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란 말씀은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권능자시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자란 뜻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동안 깊은 잠을 잘 뿐입니다.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잠은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사실 잠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아침도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 그와 같습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신령한 새 몸, 거룩한 새 몸, 강건한 새 몸을 입고(고전 15:44) 천국에서 새 아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의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는 것, 즉 죽은 나사로가 지금 살아나리라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 물으셨을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동문서답을 합니다(27). 물론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셔서 나사로가 어떤 병에 걸렸더라도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하게 될 것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난다는 것만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아나겠지 뭐” 하는 식으로,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나름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한계를 두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죽음이 주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죄로 인해 영혼이 죽어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겐 비전이 없고 정열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과 현실적인 유익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런 생각이 더 일찍 찾아왔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게 보여서 목련 꽃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고 허무한 생각을 잊고자 미친 듯이 공부를 했습니다. 허무한 생각은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게 되었을 때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기고 참된 만족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에 잇대어 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삶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같이 우리가 한계적인 생각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지만 실제적인 부활 신앙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3.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마리아에게 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 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3-35). 비통하다는 뜻은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 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아래서 희망도 없이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을 슬퍼하는 인생들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할 때 이런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죽음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심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눈물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며 비꼬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앞에 놓고도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는 인생들의 모습을 볼 때 매우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잠잠히 무덤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가 보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코를 움켜쥐며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 지내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지만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의 가슴 속에는 무거운 불신의 돌, 체념의 돌, 절망의 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현재 나사로가 묻힌 무덤을 보며 절망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가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믿음으로 돌을 옮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마지못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시오,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에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장사지내러 가는 길에서 만나 관 속에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친히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 되던 날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키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때는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요 살아 있는 자는 변화되어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산 소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의 능력을 마음에 새기도록 성경 말씀을 주시고 세례와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넘는 일에 도전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활의 믿음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을 살리고,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려 하실 때 먼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빠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을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명에게 더 복음을 전하고 한 팀의 일대일을 하고, 한 번 더 기도하고, 양들에게도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울 때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십니다.
무덤에 있는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큰 소리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그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먼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소감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순종하게 됩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 대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시간 우리가 “네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시다. 죽은 사람도 살리신 예수님께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 어려움 때문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있는 슬픔과 실패, 어두움과 허무, 불가능과 운명 등의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도 승리하고, 자녀 교육과 가정생활, 목자생활도 더욱 알차게 열매를 맺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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