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6강(행20장)"모든 겸손과 눈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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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도행전 제16강
말씀 사도행전 20장
요절 사도행전 20:19
모든 겸손과 눈물로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오늘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목자생활의 간증입니다. 여기에는 목자가 가져야 할 자세, 사명인의 자세, 장로로서의 자세, 그리고 물질관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목자가 되고 싶지만, 한편으로 바울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울이고, 나는 나다. 바울과 나는 체질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체질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잘 배우고자 했던 바울을 생각하고 오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바울의 부활신앙(1-12)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소요가 진정되자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2절을 봅시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교회들, 즉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또한 헬라의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겨울을 지내며 복음의 진수를 담은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2,3a). 바울이 에베소 개척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로마 선교에 대한 불타는 비전을 보았는데, 이 비전이 불후의 명작 로마서를 낳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바울은 동편으로 나아가 시리아의 안디옥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한다는 사실을 안뒤, 북쪽으로 방향을 변경, 마게도냐의 빌립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후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 도착하여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일주일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3b).
그들은 이곳에서 ‘그 주간의 첫날’ 에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애찬을 가리키며, 그 주간의 첫날은 오늘날 우리가 모이는 주일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켰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날은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세력을 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도 강론했는데 밤중까지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내일이면 그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9절을 봅시다. 성도들은 인슐라(insula), 즉 로마의 공동주택건물의 3층에서 모였습니다. 여러 개의 횃불을 켜서 환하게 한 뒤, 그곳에 모였기 때문에 방안의 공기는 연기로 자욱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보여 앉을 곳이 없었는지, 유두고라 하는 청년은 창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두고는 축구를 열심히 하고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바울의 메시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끝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후에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끝으로, 마지막으로, 종말로 하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유두고는 자신도 모르게 졸기 시작했습니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졸릴 때 눈꺼풀이 아래로 누르는 힘은 3만 톤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절대로 졸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 불상사를 보면서 성도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겠으며, 또 얼마나 어두운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바울은 말씀을 전하다 말고 유두고가 떨어진 데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기도하자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신앙이 유두고를 살린 것입니다. 잠시 어두운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로를 얻었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은 다시 3층으로 올라가 성만찬을 나누며 날이 새기까지 바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 사도 바울의 부활신앙은 한 청년을 살릴 뿐만 아니라 어두운 모임을 살렸습니다. 바울이 죽은 사람, 즉 끝난 사람 앞에서 같이 죽거나 같이 근심했다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까? 사도는 절망하는 사람들과 같이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요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같이 힘들어 하는 자가 아니라, 부활신앙을 가지고 죽은 자, 끝난 자에게 도전하는 자입니다. 이 시대 영적으로 죽은 청년들, 영적으로 어두운 현실들을 보며 슬퍼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 사도로서 부활신앙을 가지면 모임 안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로인해 큰 위로와 힘이 임할 것입니다.
제2장 바울의 밀레도 설교(17-38)
바울 일행은 드로아를 떠나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까지 숨 가쁘게 항해했습니다. 그가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에베소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위해서 에베소를 지나쳐 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이 문장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알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목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19,20). 19절을 봅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간계 때문에 힘든 시험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먼저 모든 겸손으로 주(the Lord)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단순히 사람에게 온유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께 대한 자세인데, ‘자기의 무력함과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즉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아 죽을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이런 나를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 은총을 인정합니다. 자기는 종이요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자기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로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던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생각할 때에 자신을 항상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다고 했습니다(고전 15:8). 이후 그는 누구보다 겸손한 자가 되어서 주님을 섬기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특히 그는 에베소 교회를 겸손하게 섬겼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마음이 굳어서 순종치 않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삿대질을 하며 그 도를 비방하며 대적할 때에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히 참고 인내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양들을 인격적으로 섬길 때도 양들이 수도 없이 삐치고 토라지고 뒤집어졌겠지만 바울은 참고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또 낮아져 섬기고 또 겸손하게 권면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겸손을 통해서 에베소의 그 교만하고 똑똑한 지식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배운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바울은 이 예수님을 닮고자 했고, 높아지려는 마음, 동등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기 힘든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양에게 저줄 수 없고, 이 자존심 때문에 괴롭히는 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동등한 관계를 주장합니다. 이 자존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의, 자기생각, 자기체면, 자기자존심을 비우신 예수님을 배우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430)은 주님을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을 말할 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저희들이 사도바울처럼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참고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양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또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 ‘눈물’은 ‘아픔’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영광과 축복도 있었지만, 또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픔이 없는 영광은 헛되 것이요 거짓입니다. 쉬운 길, 십자가 없는 길은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특히 바울은 유대인들의 간계 때문에 아픔을 많이 겪었습니다.
바울은 과거 동정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연약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것을 보아도 초기의 바울은 아주 냉정하고 철저한 원칙론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으로 갈수록 바울은 교회와 양들을 섬기고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아픔을 알고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가면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파 울고, 양들이 오면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양들이 죄악에 빠지면 눈물을 흘리면서 책망을 했고, 양들이 변화되거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양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아파하면서 울었고 양들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서 울었습니다. 양들이 도망가면 불쌍해서 울고, 그를 제대로 돕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파서 울었고, 자기가 너무 부족해서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이래저래 바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야 말로 울보목자가 되었습니다.
고후2:4에 여러 가지 죄악으로 목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린도 교회 양들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양들에게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깊이 동참하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마음 고생할 필요도 없고, 눈물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원 없어 도망가면 니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가서 고생 죽어라고 해 봐라.” 이렇게 생각하면 속이 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불신하고 반발한다 하더라도 소망을 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양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양들을 돕되 의무감이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나 사람들의 인정을 향한 야심 때문에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섬기는 영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이 눈물이 걸핏하면 흘러 넘쳤습니다. 양들은 이런 바울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사실 한심한 설교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무디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목사님 설교문에서 문법이 약 100군데가 틀렸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조리가 없고 앞뒤가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심정이 담긴 눈물의 말씀 때문에 수많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회심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의 눈물은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고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그 눈물에는 그리스도의 아픔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이 아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 7:17에서 주님은 장차 천국에 오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너는 뭐하다 왔냐?’ 물어 보시면, ‘저는 맨날 즐겁게 노느라고 웃다가 왔어요.’ 주님께서 얼마나 당황하실까요? 저희들이 이 땅에서 힘든 영혼들로 아파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모든 아픔을 눈 녹듯 해결해주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도 눈물로 씨를 뿌림으로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시126:5,6)
한편 바울이 이처럼 눈물이 많은 목자였지만 나약한 목자는 아니었습니다. 19b절을 봅시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 시험을 당할 때는 참았습니다. 주님의 역사를 섬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동족들의 음모’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뒤흔드는 악성 루머를 끊임없이 퍼뜨리고 이간질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양들에 대해서는 어떠했습니까? 20절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 말씀의 핵심은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밥을 먹을 때나 운동을 할 때에도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거리낌이 없이 현장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때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양들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소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21절을 봅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조교제사범이나 은행 강도와 같은 소문난 죄인에게는 회개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싱싱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도서관에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자기 신념과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대학생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내가 도리어 회개심정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성서적인 인간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등합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 못에 참예하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롬 6:23b; 히 9:27; 계 21:8). 이러한 분명한 성서적 인간관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이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서로 분리할 수 없고 동시에 전해야 합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의를 주장하게 되고, 믿음이 없는 회개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자기 불의만 주장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될 때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15).
둘째, 사명인 바울(22-28): 22절을 봅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 또 거룩하신 하나님을 할례도 받지 않은 오랑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다닌다고 알렸고, 예루살렘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가만 두지 않겠다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23:21을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면서, 바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40명의 극렬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런 성령의 계시 앞에서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세상에 중한 일이 많이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있을까요? 이 일을 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되고,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단 12:3b).
그런데 바울은 이 사명을 주 예수께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명은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사명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세상에서는 하기 싫으면 사표를 내면 그만이지만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사표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일생동안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은 만유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 예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코자 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잘 달리다가 마지막 골인 지점에 와서 주저앉아 버린다면 결코 예비된 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사명에 우선을 두고 끝까지 감당하고자 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사명에는 복음증거와 함께 아픔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사명을 맡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9:16). 그런데 그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끝까지 가고자 합니다. 25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후회도 없습니다. 특히 사명을 감당한 것에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2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여 그는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27절을 봅시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는 에베소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사람치고 바울에게 ‘전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1대1 성경공부’ 안 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계인’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생명을 다 바쳐 사명을 감당한 투철한 사명인이었습니다.
셋째, 감독자(28-32). 28절을 봅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 리더들에게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시기하여 이를 공격하는 원수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부의 원수로는 흉악한 이리가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고, 내부의 원수로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는 이단사상과 물질주의와 같은 것들이 될 수 있고, 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 영적 분위기를 흐려 놓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양들에게 불신을 심고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이를 감독하고 양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목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감독자로서 어떤 본을 보여주었습니까? 3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없이 양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양들은 바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면 진실한 훈계임을 알고 권면을 하시든 책망을 하시든 마음으로부터 영접했습니다. 눈물이 섞인 말씀은 위기의 상황에서 양들을 돌이키는 역사를 이룹니다. 32절을 봅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는 간절한 마음으로 심었던 말씀이 능히 그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바울의 물질생활(33-35): 바울은 물질생활에서 깨끗하고 모범적이었습니다. 33절을 보면 바울은 양들의 가진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일을 해서 자신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동역자들의 생활비를 마련했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도 모범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신 말씀을 늘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6-38절을 봅시다.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의 목자로서의 자세, 사명인으로서의 자세, 감독자로서의 자세, 그리고 자신의 물질생활을 정말 거리낌 없이 전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별 메시지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기도하며 목이 메고 급기야 모두가 크게 울었습니다. 모두가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다시 보지 못할 그를 생각하며 배에까지 나와 그를 전송했습니다. 바울과 그의 양들은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사명인의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겸손과 눈물로 섬기고, 회개와 믿음을 가르치고, 자기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명의 길을 달려가면 반드시 이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얻는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의 목자생활을 살펴 볼 때 그가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발견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 그리고 “거리낌 없이 가르친 바울의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저희가 올해 이 두 가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겸손과 아픔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20장
요절 사도행전 20:19
모든 겸손과 눈물로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오늘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목자생활의 간증입니다. 여기에는 목자가 가져야 할 자세, 사명인의 자세, 장로로서의 자세, 그리고 물질관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목자가 되고 싶지만, 한편으로 바울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울이고, 나는 나다. 바울과 나는 체질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체질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잘 배우고자 했던 바울을 생각하고 오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바울의 부활신앙(1-12)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소요가 진정되자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2절을 봅시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교회들, 즉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또한 헬라의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겨울을 지내며 복음의 진수를 담은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2,3a). 바울이 에베소 개척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로마 선교에 대한 불타는 비전을 보았는데, 이 비전이 불후의 명작 로마서를 낳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바울은 동편으로 나아가 시리아의 안디옥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한다는 사실을 안뒤, 북쪽으로 방향을 변경, 마게도냐의 빌립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후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 도착하여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일주일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3b).
그들은 이곳에서 ‘그 주간의 첫날’ 에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애찬을 가리키며, 그 주간의 첫날은 오늘날 우리가 모이는 주일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켰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날은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세력을 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도 강론했는데 밤중까지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내일이면 그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9절을 봅시다. 성도들은 인슐라(insula), 즉 로마의 공동주택건물의 3층에서 모였습니다. 여러 개의 횃불을 켜서 환하게 한 뒤, 그곳에 모였기 때문에 방안의 공기는 연기로 자욱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보여 앉을 곳이 없었는지, 유두고라 하는 청년은 창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두고는 축구를 열심히 하고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바울의 메시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끝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후에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끝으로, 마지막으로, 종말로 하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유두고는 자신도 모르게 졸기 시작했습니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졸릴 때 눈꺼풀이 아래로 누르는 힘은 3만 톤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절대로 졸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 불상사를 보면서 성도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겠으며, 또 얼마나 어두운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바울은 말씀을 전하다 말고 유두고가 떨어진 데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기도하자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신앙이 유두고를 살린 것입니다. 잠시 어두운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로를 얻었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은 다시 3층으로 올라가 성만찬을 나누며 날이 새기까지 바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 사도 바울의 부활신앙은 한 청년을 살릴 뿐만 아니라 어두운 모임을 살렸습니다. 바울이 죽은 사람, 즉 끝난 사람 앞에서 같이 죽거나 같이 근심했다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까? 사도는 절망하는 사람들과 같이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요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같이 힘들어 하는 자가 아니라, 부활신앙을 가지고 죽은 자, 끝난 자에게 도전하는 자입니다. 이 시대 영적으로 죽은 청년들, 영적으로 어두운 현실들을 보며 슬퍼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 사도로서 부활신앙을 가지면 모임 안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로인해 큰 위로와 힘이 임할 것입니다.
제2장 바울의 밀레도 설교(17-38)
바울 일행은 드로아를 떠나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까지 숨 가쁘게 항해했습니다. 그가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에베소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위해서 에베소를 지나쳐 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이 문장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알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목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19,20). 19절을 봅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간계 때문에 힘든 시험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먼저 모든 겸손으로 주(the Lord)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단순히 사람에게 온유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께 대한 자세인데, ‘자기의 무력함과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즉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아 죽을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이런 나를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 은총을 인정합니다. 자기는 종이요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자기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로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던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생각할 때에 자신을 항상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다고 했습니다(고전 15:8). 이후 그는 누구보다 겸손한 자가 되어서 주님을 섬기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특히 그는 에베소 교회를 겸손하게 섬겼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마음이 굳어서 순종치 않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삿대질을 하며 그 도를 비방하며 대적할 때에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히 참고 인내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양들을 인격적으로 섬길 때도 양들이 수도 없이 삐치고 토라지고 뒤집어졌겠지만 바울은 참고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또 낮아져 섬기고 또 겸손하게 권면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겸손을 통해서 에베소의 그 교만하고 똑똑한 지식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배운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바울은 이 예수님을 닮고자 했고, 높아지려는 마음, 동등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기 힘든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양에게 저줄 수 없고, 이 자존심 때문에 괴롭히는 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동등한 관계를 주장합니다. 이 자존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의, 자기생각, 자기체면, 자기자존심을 비우신 예수님을 배우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430)은 주님을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을 말할 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저희들이 사도바울처럼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참고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양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또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 ‘눈물’은 ‘아픔’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영광과 축복도 있었지만, 또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픔이 없는 영광은 헛되 것이요 거짓입니다. 쉬운 길, 십자가 없는 길은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특히 바울은 유대인들의 간계 때문에 아픔을 많이 겪었습니다.
바울은 과거 동정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연약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것을 보아도 초기의 바울은 아주 냉정하고 철저한 원칙론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으로 갈수록 바울은 교회와 양들을 섬기고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아픔을 알고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가면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파 울고, 양들이 오면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양들이 죄악에 빠지면 눈물을 흘리면서 책망을 했고, 양들이 변화되거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양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아파하면서 울었고 양들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서 울었습니다. 양들이 도망가면 불쌍해서 울고, 그를 제대로 돕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파서 울었고, 자기가 너무 부족해서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이래저래 바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야 말로 울보목자가 되었습니다.
고후2:4에 여러 가지 죄악으로 목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린도 교회 양들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양들에게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깊이 동참하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마음 고생할 필요도 없고, 눈물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원 없어 도망가면 니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가서 고생 죽어라고 해 봐라.” 이렇게 생각하면 속이 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불신하고 반발한다 하더라도 소망을 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양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양들을 돕되 의무감이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나 사람들의 인정을 향한 야심 때문에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섬기는 영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이 눈물이 걸핏하면 흘러 넘쳤습니다. 양들은 이런 바울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사실 한심한 설교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무디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목사님 설교문에서 문법이 약 100군데가 틀렸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조리가 없고 앞뒤가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심정이 담긴 눈물의 말씀 때문에 수많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회심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의 눈물은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고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그 눈물에는 그리스도의 아픔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이 아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 7:17에서 주님은 장차 천국에 오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너는 뭐하다 왔냐?’ 물어 보시면, ‘저는 맨날 즐겁게 노느라고 웃다가 왔어요.’ 주님께서 얼마나 당황하실까요? 저희들이 이 땅에서 힘든 영혼들로 아파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모든 아픔을 눈 녹듯 해결해주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도 눈물로 씨를 뿌림으로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시126:5,6)
한편 바울이 이처럼 눈물이 많은 목자였지만 나약한 목자는 아니었습니다. 19b절을 봅시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 시험을 당할 때는 참았습니다. 주님의 역사를 섬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동족들의 음모’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뒤흔드는 악성 루머를 끊임없이 퍼뜨리고 이간질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양들에 대해서는 어떠했습니까? 20절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 말씀의 핵심은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밥을 먹을 때나 운동을 할 때에도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거리낌이 없이 현장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때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양들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소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21절을 봅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조교제사범이나 은행 강도와 같은 소문난 죄인에게는 회개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싱싱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도서관에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자기 신념과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대학생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내가 도리어 회개심정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성서적인 인간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등합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 못에 참예하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롬 6:23b; 히 9:27; 계 21:8). 이러한 분명한 성서적 인간관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이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서로 분리할 수 없고 동시에 전해야 합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의를 주장하게 되고, 믿음이 없는 회개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자기 불의만 주장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될 때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15).
둘째, 사명인 바울(22-28): 22절을 봅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 또 거룩하신 하나님을 할례도 받지 않은 오랑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다닌다고 알렸고, 예루살렘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가만 두지 않겠다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23:21을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면서, 바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40명의 극렬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런 성령의 계시 앞에서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세상에 중한 일이 많이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있을까요? 이 일을 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되고,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단 12:3b).
그런데 바울은 이 사명을 주 예수께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명은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사명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세상에서는 하기 싫으면 사표를 내면 그만이지만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사표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일생동안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은 만유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 예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코자 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잘 달리다가 마지막 골인 지점에 와서 주저앉아 버린다면 결코 예비된 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사명에 우선을 두고 끝까지 감당하고자 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사명에는 복음증거와 함께 아픔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사명을 맡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9:16). 그런데 그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습니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끝까지 가고자 합니다. 25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후회도 없습니다. 특히 사명을 감당한 것에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2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여 그는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27절을 봅시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는 에베소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사람치고 바울에게 ‘전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1대1 성경공부’ 안 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계인’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생명을 다 바쳐 사명을 감당한 투철한 사명인이었습니다.
셋째, 감독자(28-32). 28절을 봅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 리더들에게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시기하여 이를 공격하는 원수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부의 원수로는 흉악한 이리가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고, 내부의 원수로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는 이단사상과 물질주의와 같은 것들이 될 수 있고, 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 영적 분위기를 흐려 놓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양들에게 불신을 심고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이를 감독하고 양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목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감독자로서 어떤 본을 보여주었습니까? 3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없이 양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양들은 바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면 진실한 훈계임을 알고 권면을 하시든 책망을 하시든 마음으로부터 영접했습니다. 눈물이 섞인 말씀은 위기의 상황에서 양들을 돌이키는 역사를 이룹니다. 32절을 봅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는 간절한 마음으로 심었던 말씀이 능히 그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바울의 물질생활(33-35): 바울은 물질생활에서 깨끗하고 모범적이었습니다. 33절을 보면 바울은 양들의 가진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일을 해서 자신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동역자들의 생활비를 마련했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도 모범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신 말씀을 늘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6-38절을 봅시다.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의 목자로서의 자세, 사명인으로서의 자세, 감독자로서의 자세, 그리고 자신의 물질생활을 정말 거리낌 없이 전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별 메시지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기도하며 목이 메고 급기야 모두가 크게 울었습니다. 모두가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다시 보지 못할 그를 생각하며 배에까지 나와 그를 전송했습니다. 바울과 그의 양들은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사명인의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겸손과 눈물로 섬기고, 회개와 믿음을 가르치고, 자기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명의 길을 달려가면 반드시 이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얻는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의 목자생활을 살펴 볼 때 그가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발견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 그리고 “거리낌 없이 가르친 바울의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저희가 올해 이 두 가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겸손과 아픔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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