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8 사도행전 제14강(행16:6-17:34)"날마다 상고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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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도행전 제14강
말씀 사도행전 16:6-17:34
요절 사도행전 17:11
날마다 상고하므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Apostolic Journey)의 초반부 역사로서 빌립보(Ph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a), 베뢰아(Berea), 그리고 아덴(Athens)에서의 복음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서 아시아 개척역사를 힘차게 섬겼습니다. 그런데 유럽 선교에 있어서는 또 다른 장애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거대한 이방 세계에 어떻게 도전했고 어떻게 이방인 구원역사를 섬겼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16:6-10): 바울 일행은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했던 여러 곳을 심방하며 예루살렘 총회에서 작정한 규례를 전하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4,5). 아시아 선교의 전망이 매우 밝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더욱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런데 6절을 봅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어떻게 성령께서 막으셨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상 기온으로 봄인데도 100년 만에 폭설이 내려서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았다는 폭설설, 타고 가는 차마다 이상하게도 펑크가 났다는 펑크설, 가고자 하는 곳에 갑자기 조류독감이 발생하여 통제구역이 되었다는 조류독감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북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무시아(Mysia)에 이른 바울은 흑해 바로 밑쪽인 비두니아(Bithynia)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마다 막혔습니다. 때로는 버스를 놓치기도 하고, 버스를 탔는데 거꾸로 가는 것을 탔습니다. 이는 예수의 영, 곧 성령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7). 성령께서 막으시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 드로아(Troas)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 길이 막히자 답답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며 방향을 주셨습니다. 9절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이 환상 중에 본 마게도냐 사람은 노랑머리를 하고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럽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도 꽤 재재하고, 두 눈은 쑥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서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는 빼빼 마른 손가락을 흔들며 애원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제발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게도냐 사람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헬라 문화가 꽃핀 곳으로 선진문화가 지배했습니다. 로마의 물질문명 속에서 노예들의 섬김을 받으며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요 선진국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 문화가 아무리 발달을 해도 인간의 내면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미끈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피골이 상접한 빈민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에, 점쟁이 재벌들이 넘쳐났고, 정체불명의 신을 만들어 경배하는 온갖 우상문화가 득세했습니다.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사조가, 고린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명 이상의 매춘부가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쾌락에 빠진 사람들은 온갖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온갖 화음(禍音)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복음(福音)입니다. 자신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사죄의 복음이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줄 유능한 성경선생을 갈망했습니다.
10절을 봅시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긍휼한 마음이 들어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빌립보(16:11-40):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Samothrace)라는 섬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금 배를 타고 네압볼리(Neapolis)항구로 가고 거기서 마침내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서둘러 순종했지만 상황은 막막했습니다. 제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왔지만 아무도 피켓을 들고 그를 환영해 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보통 회당 하나를 건립하려면 적어도 열 명의 유대인이 있어야 했는데, 빌립보에는 그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빌립보 개척역사를 섬겼습니까?
13절을 봅시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문밖 강가에 이르렀을 때 아줌마들이 강가에서 빨래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세 사람만 모여 있어도 접시가 깨질 만큼 시끄럽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다가가서 “아주머니들, 설문지 좀 작성해주세요.”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바울이 여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자, 하나님께서 자주 옷감 상인 루디아(Lydia)의 마음을 여셨습니다(14). 이로써 루디아는 유럽에서의 첫 번째 회심자가 되었습니다. 곧 그녀와 그녀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장사하는 아줌마로서 여장부다운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괄괄한 목소리로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나를 주 믿는 자로 인정하시죠. 그러면 내 집에 들어와 머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토라질 거예요.” 그리고 바울의 팔을 잡아끌어서 자기 집에 유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빌립보에 첫 가정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 거닐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점치는 귀신’에 사로잡힌 여종 하나가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불경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바울의 인내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바울은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점치는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19절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그 여종의 주인은 그녀 때문에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요 빌립보 사람들은 앞날의 일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이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인물인 알렉산더의 본거지가 아닙니까? 마게도냐는 한때 세계를 재패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라로서, 인간 이성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의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 불안해했고, 앞날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쳤고 그로인해 그녀의 주인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인생살이에서의 불안의 문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날을 걱정하고 모든 일에 걱정이 끊임이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늘 미래가 불안하고 학점이 불안하고 앞으로 잘 될 것인가 잘 할 수 있는가 미래를 항상 걱정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조차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돈을 의지하고 재테크에 몰입합니다. 빌립보 사람들도 앞날의 문제를 점쟁이 귀신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녀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귀신은 쫓겨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소녀가 앞날을 점칠 수 없게 되자 그동안 그녀를 이용하여 수입을 올리던 주인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이처럼 바울의 역사는 빌립보 기존 사회를 심히 요란하게 하고 로마의 풍속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사회는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또 ‘돈 중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덕분에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마구 화를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장래의 불안의 문제, 인생의 불안의 문제, 모든 생사화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바울은 이 이름을 의지하여 빌립보의 불안의 문제, 귀신의 문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사람들은 일단 돈의 대한 소망이 끊어지자 성경선생을 비방하고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돈 중심이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신앙을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이라고 일컬으며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바울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2절부터 봅시다. 바울과 실라는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각목 몽둥이로 매를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맨 몸을 드러낸 채로 매를 맞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인 일입니다. 이들의 몸에 난 상처는 매우 깊었기 때문에 깨끗이 씻고 소독해야 했지만, 곧바로 투옥되었습니다. 상관들은 간수에게 단단히 타일러 말하길,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흉악범이나 가두는 지하옥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발에는 차고가 채워져 있었는데, 불편하기가 이룰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정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옥은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아 춥고 어두웠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여 이러실 수 있습니까? 마게도냐로 가라고 그렇게 꼬실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는 하나도 안 도와주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 선교사 안 해.”하며 온갖 불평과 불신적인 소리를 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25절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있었을 때 캄캄한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찬383)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의 2중창이 울려 퍼지자, 그때 큰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강한 진파에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그 충격에 감방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의 발을 묶고 있던 차고가 풀렸습니다(26).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 기도하고 찬송하게 되면 우리를 얽어매는 옥문이 열리고 마음에 매인 것들이 풀리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말했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 간수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전에 매를 휘두르고 옷을 찢고 감옥에 내동댕이치던 간수가 이제 순한 양이 되어서 바울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마침내 간수와 그 온 집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태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또 하나의 가정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이라도 마음에 복음을 믿고 기도하고 찬송할 때 모든 어려움은 복된 소식이 되어 돌아옵니다. 다음 날 아침,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분명히 밝히고 당당히 그 성에서 나갔습니다. 거대한 유럽 선교는 예상치 않게도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 아줌마와 옥중의 간수 아저씨를 동역자로 얻음으로 시작되는 기이한 역사였습니다.
셋째, 데살로니가(17:1-9):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Amphipolis)와 아볼로니아(Apollonia)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3주 연속으로 안식일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강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봅시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이렇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절에 보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첫째로,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기 때문입니다. ‘강론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알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인데 이는 관통하다는 ‘디아’(δια, through)와 논리를 가지고 말한다는 ‘레고’(λεγο)의 합성어입니다. 즉 ‘논리를 가지고 철저하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오실 메시야에 관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창3:15부터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고난 중에 처할 때마다 그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갈4:4). 바로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함으로써 성서적 메시야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이런 증명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영이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요5:3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바울의 핵심은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과거 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해를 입은 자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구원자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의와 인간의 행위로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 이루신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원하시며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연을 알 수 있고 또 성경을 알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福)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속사상을 연구하고 마침내 그 구속사상을 손에 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이요, 또한 성경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깨닫고 구속의 진리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왕 이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 18:37)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요 사랑과 평강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왕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진리와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실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1882년 10월 디엘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명문 캠브리지 대학생들에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디가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은 그 자체가 크나큰 웃음거리였습니다. 대학생들이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까지 왁자지껄했습니다. 의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무디가 기도할 때 사람들은 “옳소! 옳소!”라는 소리를 연발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식한 이 친구가 최고의 지성인인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는가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식으로 다리를 꼬고 거만한 태도를 하며 눈을 아래로 깔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디가 단순하게 왕이신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다리를 내려놓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외쳤습니다. “오직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품에 안겨 무거운 죄의 짐과 이기심을 그의 발아래 내려놓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로 캠브리지 세븐이 탄생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도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수많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영접할 뿐 아니라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살전 1:9).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방인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당시 시장바닥에서 놀고 있던 구마적, 신마적, 하야시, 긴또깡 유명한 깡패를 동원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6,7절을 봅시다.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그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고소했습니다. 그 시대는 황제 숭배와 우상문화와 물질주의로 고착화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왕되신 예수를 전하고 자신의 우상을 버리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발과 반대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그리스도는 기존의 잘못된 진리를 부정하고 이방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고 우리 인생의 유일한 왕이심을 강론하면 08학번 학우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면 뿌리 깊은 죄문제와 인생문제가 송두리째 변화될 것입니다.
넷째, 베뢰아(17:10-15): 데살로니가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면, 베뢰아에서는 성경을 배우는 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뢰아는 산악마을로서, 비옥한 토지를 자랑했고 농장은 갖가지 곡물들로 풍성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마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11,12절을 봅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너그럽다’는 말은 공동 번역에 보면 “Open-minded; 마음이 트였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해서 꽉 막힌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러한 마음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목이 마르게 되면 물을 찾기에 갈급하게 되고, 배가 고프게 되면 먹을 것을 찾기에 갈급하게 됩니다. 이처럼 심령이 공허하고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질병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가난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이성에게 채이고 나서 가난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사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 교만하고 자기발견없는 제자들과 임마누엘 하신 예수님을 알게 될 때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둘째로, 그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말씀을 받고 또한 받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감성세대요, 인스턴트 시대라서 그런지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커피도 조용히 물을 데워서 끓여 먹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동전 몇 개 집어넣으면 금방 3초 이내에 나와야 합니다. 자판기에서 조금만 커피가 늦어도 자판기를 두드리고 발로 차고 욕을 하고 난리를 피웁니다. TV도 좀 지루하다 싶으면 1분을 못 기다리고 계속해서 리모콘으로 돌려댑니다. 방송국은 그런 시청자의 필요를 의식해서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유머스럽고, 폭력적인 장면들을 주로 내보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사고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성경선생들로서 학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양마가 목자님은 저에게 “말씀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센터나 선교지는 항상 역사가 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편의적으로 말씀을 준비하는 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 영혼을 향하신 말씀을 알고자 상고하는 성경선생들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13절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질하여 소동케 했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바울만 먼저 배로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다섯째, 아덴(17:16-34): 바울 홀로 아덴에 도착했습니다. 아덴은 그리스 철학과 민주주의의 요람이었습니다. 인구 5만이 넘지 않는 그리스의 자유도시며 수많은 우상과 이방신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유명하고 대단한 아덴에 도착했을 때 약소국가 출신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위축되고, 한편으로는 선진국이 부러웠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도대체 언제나 이런 나라를 따라갈까?” 이런 감정적인 생각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에 문제의식을 가졌습니까? 16절을 봅시다. 우상과 신전이 아덴의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이방 신들의 형상이 거대한 숲을 이룬 것을 보고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회당과 시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러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에게 와서 쟁론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부활이 “어떤 이상한 것”(some strange ideas)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곧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앞에서 절망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희망의 철학이 아니라 허무의 철학이었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니 쾌락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먹고 즐기자고 했고 금욕주의자들은 그래도 자기 몸을 죽이며 금욕적으로 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에 매여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 새로운 것을 알고자 바울을 아레오바고(Areopagus)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이로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않도다.”며 그들의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점에서 또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 안에는 이성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은 자신의 뛰어난 이성으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인생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신교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아테네를 섬겼고, 사랑에 목마른 자들은 아프로디테를 섬겼습니다. 심지어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이름 없는 신,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 창세기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천지의 주재로서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은총을 통해 흐릿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27절을 봅시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한다” 는 것은 ‘시각 장애인이 더듬거리며 찾는 것처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곁에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데도, 하나님을 찾아보겠다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바울의 말씀공부가 끝나자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32). 다만 길가와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과 예수님을 가르치며 유럽을 개척하는 바울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양면성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유능한 성경선생이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성경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 세계를 그 뿌리로부터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영적 소원을 성경을 공부하며 이방세계의 물질주의와 귀신의 세력과 우상 문화 가운데서 생명을 구원하는 유능한 성경선생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16:6-17:34
요절 사도행전 17:11
날마다 상고하므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Apostolic Journey)의 초반부 역사로서 빌립보(Phlippi), 데살로니가(Thessalonia), 베뢰아(Berea), 그리고 아덴(Athens)에서의 복음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서 아시아 개척역사를 힘차게 섬겼습니다. 그런데 유럽 선교에 있어서는 또 다른 장애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거대한 이방 세계에 어떻게 도전했고 어떻게 이방인 구원역사를 섬겼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16:6-10): 바울 일행은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했던 여러 곳을 심방하며 예루살렘 총회에서 작정한 규례를 전하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4,5). 아시아 선교의 전망이 매우 밝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더욱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런데 6절을 봅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어떻게 성령께서 막으셨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상 기온으로 봄인데도 100년 만에 폭설이 내려서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았다는 폭설설, 타고 가는 차마다 이상하게도 펑크가 났다는 펑크설, 가고자 하는 곳에 갑자기 조류독감이 발생하여 통제구역이 되었다는 조류독감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북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무시아(Mysia)에 이른 바울은 흑해 바로 밑쪽인 비두니아(Bithynia)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마다 막혔습니다. 때로는 버스를 놓치기도 하고, 버스를 탔는데 거꾸로 가는 것을 탔습니다. 이는 예수의 영, 곧 성령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7). 성령께서 막으시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 드로아(Troas)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 길이 막히자 답답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며 방향을 주셨습니다. 9절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이 환상 중에 본 마게도냐 사람은 노랑머리를 하고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럽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도 꽤 재재하고, 두 눈은 쑥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서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는 빼빼 마른 손가락을 흔들며 애원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제발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게도냐 사람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헬라 문화가 꽃핀 곳으로 선진문화가 지배했습니다. 로마의 물질문명 속에서 노예들의 섬김을 받으며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요 선진국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 문화가 아무리 발달을 해도 인간의 내면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미끈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피골이 상접한 빈민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에, 점쟁이 재벌들이 넘쳐났고, 정체불명의 신을 만들어 경배하는 온갖 우상문화가 득세했습니다.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사조가, 고린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명 이상의 매춘부가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쾌락에 빠진 사람들은 온갖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온갖 화음(禍音)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복음(福音)입니다. 자신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사죄의 복음이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줄 유능한 성경선생을 갈망했습니다.
10절을 봅시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긍휼한 마음이 들어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빌립보(16:11-40):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Samothrace)라는 섬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금 배를 타고 네압볼리(Neapolis)항구로 가고 거기서 마침내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서둘러 순종했지만 상황은 막막했습니다. 제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왔지만 아무도 피켓을 들고 그를 환영해 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보통 회당 하나를 건립하려면 적어도 열 명의 유대인이 있어야 했는데, 빌립보에는 그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빌립보 개척역사를 섬겼습니까?
13절을 봅시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문밖 강가에 이르렀을 때 아줌마들이 강가에서 빨래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세 사람만 모여 있어도 접시가 깨질 만큼 시끄럽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다가가서 “아주머니들, 설문지 좀 작성해주세요.”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바울이 여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자, 하나님께서 자주 옷감 상인 루디아(Lydia)의 마음을 여셨습니다(14). 이로써 루디아는 유럽에서의 첫 번째 회심자가 되었습니다. 곧 그녀와 그녀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장사하는 아줌마로서 여장부다운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괄괄한 목소리로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나를 주 믿는 자로 인정하시죠. 그러면 내 집에 들어와 머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토라질 거예요.” 그리고 바울의 팔을 잡아끌어서 자기 집에 유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빌립보에 첫 가정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 거닐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점치는 귀신’에 사로잡힌 여종 하나가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불경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바울의 인내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바울은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점치는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19절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그 여종의 주인은 그녀 때문에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요 빌립보 사람들은 앞날의 일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이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인물인 알렉산더의 본거지가 아닙니까? 마게도냐는 한때 세계를 재패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라로서, 인간 이성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의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 불안해했고, 앞날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쳤고 그로인해 그녀의 주인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인생살이에서의 불안의 문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날을 걱정하고 모든 일에 걱정이 끊임이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늘 미래가 불안하고 학점이 불안하고 앞으로 잘 될 것인가 잘 할 수 있는가 미래를 항상 걱정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조차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돈을 의지하고 재테크에 몰입합니다. 빌립보 사람들도 앞날의 문제를 점쟁이 귀신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녀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귀신은 쫓겨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소녀가 앞날을 점칠 수 없게 되자 그동안 그녀를 이용하여 수입을 올리던 주인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이처럼 바울의 역사는 빌립보 기존 사회를 심히 요란하게 하고 로마의 풍속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사회는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또 ‘돈 중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덕분에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마구 화를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장래의 불안의 문제, 인생의 불안의 문제, 모든 생사화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바울은 이 이름을 의지하여 빌립보의 불안의 문제, 귀신의 문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사람들은 일단 돈의 대한 소망이 끊어지자 성경선생을 비방하고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돈 중심이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신앙을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이라고 일컬으며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바울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2절부터 봅시다. 바울과 실라는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각목 몽둥이로 매를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맨 몸을 드러낸 채로 매를 맞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인 일입니다. 이들의 몸에 난 상처는 매우 깊었기 때문에 깨끗이 씻고 소독해야 했지만, 곧바로 투옥되었습니다. 상관들은 간수에게 단단히 타일러 말하길,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흉악범이나 가두는 지하옥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발에는 차고가 채워져 있었는데, 불편하기가 이룰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정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옥은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아 춥고 어두웠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여 이러실 수 있습니까? 마게도냐로 가라고 그렇게 꼬실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는 하나도 안 도와주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 선교사 안 해.”하며 온갖 불평과 불신적인 소리를 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25절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있었을 때 캄캄한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찬383)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의 2중창이 울려 퍼지자, 그때 큰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강한 진파에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그 충격에 감방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의 발을 묶고 있던 차고가 풀렸습니다(26).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 기도하고 찬송하게 되면 우리를 얽어매는 옥문이 열리고 마음에 매인 것들이 풀리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말했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 간수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전에 매를 휘두르고 옷을 찢고 감옥에 내동댕이치던 간수가 이제 순한 양이 되어서 바울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마침내 간수와 그 온 집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태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또 하나의 가정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이라도 마음에 복음을 믿고 기도하고 찬송할 때 모든 어려움은 복된 소식이 되어 돌아옵니다. 다음 날 아침,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분명히 밝히고 당당히 그 성에서 나갔습니다. 거대한 유럽 선교는 예상치 않게도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 아줌마와 옥중의 간수 아저씨를 동역자로 얻음으로 시작되는 기이한 역사였습니다.
셋째, 데살로니가(17:1-9):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Amphipolis)와 아볼로니아(Apollonia)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3주 연속으로 안식일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강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봅시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이렇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절에 보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첫째로,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기 때문입니다. ‘강론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알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인데 이는 관통하다는 ‘디아’(δια, through)와 논리를 가지고 말한다는 ‘레고’(λεγο)의 합성어입니다. 즉 ‘논리를 가지고 철저하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오실 메시야에 관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창3:15부터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고난 중에 처할 때마다 그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갈4:4). 바로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함으로써 성서적 메시야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이런 증명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영이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요5:3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바울의 핵심은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과거 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해를 입은 자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구원자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의와 인간의 행위로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 이루신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원하시며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연을 알 수 있고 또 성경을 알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福)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속사상을 연구하고 마침내 그 구속사상을 손에 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이요, 또한 성경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깨닫고 구속의 진리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왕 이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 18:37)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요 사랑과 평강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왕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진리와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실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1882년 10월 디엘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명문 캠브리지 대학생들에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디가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은 그 자체가 크나큰 웃음거리였습니다. 대학생들이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까지 왁자지껄했습니다. 의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무디가 기도할 때 사람들은 “옳소! 옳소!”라는 소리를 연발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식한 이 친구가 최고의 지성인인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는가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식으로 다리를 꼬고 거만한 태도를 하며 눈을 아래로 깔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디가 단순하게 왕이신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다리를 내려놓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외쳤습니다. “오직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품에 안겨 무거운 죄의 짐과 이기심을 그의 발아래 내려놓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로 캠브리지 세븐이 탄생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도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수많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영접할 뿐 아니라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살전 1:9).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방인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당시 시장바닥에서 놀고 있던 구마적, 신마적, 하야시, 긴또깡 유명한 깡패를 동원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6,7절을 봅시다.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그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고소했습니다. 그 시대는 황제 숭배와 우상문화와 물질주의로 고착화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왕되신 예수를 전하고 자신의 우상을 버리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발과 반대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그리스도는 기존의 잘못된 진리를 부정하고 이방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고 우리 인생의 유일한 왕이심을 강론하면 08학번 학우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면 뿌리 깊은 죄문제와 인생문제가 송두리째 변화될 것입니다.
넷째, 베뢰아(17:10-15): 데살로니가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면, 베뢰아에서는 성경을 배우는 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뢰아는 산악마을로서, 비옥한 토지를 자랑했고 농장은 갖가지 곡물들로 풍성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마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11,12절을 봅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너그럽다’는 말은 공동 번역에 보면 “Open-minded; 마음이 트였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해서 꽉 막힌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러한 마음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목이 마르게 되면 물을 찾기에 갈급하게 되고, 배가 고프게 되면 먹을 것을 찾기에 갈급하게 됩니다. 이처럼 심령이 공허하고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질병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가난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은 이성에게 채이고 나서 가난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사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 교만하고 자기발견없는 제자들과 임마누엘 하신 예수님을 알게 될 때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둘째로, 그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말씀을 받고 또한 받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감성세대요, 인스턴트 시대라서 그런지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커피도 조용히 물을 데워서 끓여 먹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동전 몇 개 집어넣으면 금방 3초 이내에 나와야 합니다. 자판기에서 조금만 커피가 늦어도 자판기를 두드리고 발로 차고 욕을 하고 난리를 피웁니다. TV도 좀 지루하다 싶으면 1분을 못 기다리고 계속해서 리모콘으로 돌려댑니다. 방송국은 그런 시청자의 필요를 의식해서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유머스럽고, 폭력적인 장면들을 주로 내보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사고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성경선생들로서 학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양마가 목자님은 저에게 “말씀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센터나 선교지는 항상 역사가 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편의적으로 말씀을 준비하는 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 영혼을 향하신 말씀을 알고자 상고하는 성경선생들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13절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질하여 소동케 했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바울만 먼저 배로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다섯째, 아덴(17:16-34): 바울 홀로 아덴에 도착했습니다. 아덴은 그리스 철학과 민주주의의 요람이었습니다. 인구 5만이 넘지 않는 그리스의 자유도시며 수많은 우상과 이방신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유명하고 대단한 아덴에 도착했을 때 약소국가 출신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위축되고, 한편으로는 선진국이 부러웠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도대체 언제나 이런 나라를 따라갈까?” 이런 감정적인 생각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에 문제의식을 가졌습니까? 16절을 봅시다. 우상과 신전이 아덴의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이방 신들의 형상이 거대한 숲을 이룬 것을 보고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회당과 시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러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에게 와서 쟁론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부활이 “어떤 이상한 것”(some strange ideas)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곧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앞에서 절망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희망의 철학이 아니라 허무의 철학이었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니 쾌락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먹고 즐기자고 했고 금욕주의자들은 그래도 자기 몸을 죽이며 금욕적으로 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에 매여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 새로운 것을 알고자 바울을 아레오바고(Areopagus)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이로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않도다.”며 그들의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점에서 또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 안에는 이성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은 자신의 뛰어난 이성으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인생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신교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아테네를 섬겼고, 사랑에 목마른 자들은 아프로디테를 섬겼습니다. 심지어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이름 없는 신,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 창세기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천지의 주재로서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은총을 통해 흐릿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27절을 봅시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한다” 는 것은 ‘시각 장애인이 더듬거리며 찾는 것처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곁에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데도, 하나님을 찾아보겠다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바울의 말씀공부가 끝나자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32). 다만 길가와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과 예수님을 가르치며 유럽을 개척하는 바울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양면성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유능한 성경선생이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성경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 세계를 그 뿌리로부터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영적 소원을 성경을 공부하며 이방세계의 물질주의와 귀신의 세력과 우상 문화 가운데서 생명을 구원하는 유능한 성경선생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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