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08청천여름수양회 주제2강 "아버지,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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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청천 여름 수양회 제 2 강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26–49
요절 23:34a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세 가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에는 어떤 죄인도 믿기만 하면 고침을 받고 변화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6~34)
1-25절에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심문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심으로 인해 정죄 당하셨습니다. 그 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선고 받으셨습니다. 이에 병사들이 형을 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기 위해 그 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피가 예수님의 얼굴과 목을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온 몸이 피 범벅이 될 때까지 채찍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고 거리를 지나 형 집행 장소로 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병사들은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북아프리카 출신 시몬을 붙잡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십자가 행렬에서 여전히 무지한 죄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 중에 특히 슬피 우는 여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십자가 예수님을 보며 가슴을 치고 크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들을 향해 무슨 말씀 하십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29) 예수님은 여인들의 연민의 눈물로 위로 받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현실을 볼 때 그들을 향한 눈물을 흘리십니다. 장차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그들의 현실은 더욱 애통한 일입니다. 그때의 비참함이 어느 정도입니까? 29~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그때에는 인간이 세운 모든 영광은 무너지고 타서 재가됩니다. 심판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그 심판의 강도가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말씀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신다면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들의 죄를 애통히 회개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원하십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죄 없으신 예수님은 두 흉악범 사이에서 달리심으로 더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십자가형에 대해 모두 간략하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십자가형은 설명이 필요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혐오스런 사형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채찍으로 피범벅이 된 예수님의 몸은 십자로 된 나무 형틀에 던져졌습니다. 군병들은 두 팔을 잡아 당겨 거친 끈으로 나무에 휘감았습니다. 망치를 든 군병 한 사람이 10센티가 넘는 대못을 가지고 와 예수님의 손에 갖다 대고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순간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와 십자가와 온 주위를 물들였습니다. 대못은 살갗을 뚫고 신경다발을 지나 동맥을 끊고 나무아래로 깊숙이 박혔습니다. 무고한 피는 그 대못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손도 위치를 맞추려고 힘껏 잡아 당기자 끔찍한 전기적 고통이 예수님의 온 몸을 타고 지나 갔습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사정없이 대못을 다른 손에도 박았습니니다. 두발을 겹친 발등에는 더욱 큰 대못을 내리 꽂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씻기에는 한군데도 모자라 세 군데 아니 온몸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들어 올려질 때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한 채 주님의 몸은 점점 더 갈기갈기 찢기고 또 찢겨졌습니다. 십자가가 땅에 쿵 하고 박히는 순간 까무러치는 고통이 온몸을 내리 눌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수치 가운데 천천히 죽어 가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시22:14~15절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무지한 인간들이 주는 고통 때문에 그 뼈가 어그러지고 마음이 녹고 혀가 천장에 붙어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어떤 보복을 가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34b을 보십시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무지한 인간들이 저지른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있어서는 안될 인류 최악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자기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시기심의 종이 된 종교지도자들은 시뻘건 눈을 하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불법회합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환대했던 무리들은 닷새 만에 폭도로 변해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 해 댔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 피의 대가를 자기들에게 돌려도 좋다고 하지 못할 말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잔혹한 고문을 시켜 무리를 달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군병들은 피 맛을 본 짐승처럼 예수님의 육신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채찍을 가해 육신을 찢고 침을 뱉으며 희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예수님을 못박고도 그 십자가 밑에서 제비 뽑기를 하는 짐승 보다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이 십자가형벌이 얼마나 하지 못할 끔찍한 짓이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죄인들에 의해 몸과 마음과 영혼이 철저히 찢기고 피로 물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 의해 이런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무지한 나의죄, 무지한 너의 죄, 무지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자유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를 문화와 개성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매우 개성적인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여지게 합니다. 또는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고리를 끊을 수 없어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기도 합니다.
금요일 저녁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홍대 클럽 가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좋다는 홍대물을 좀 마셔보고자 몰려듭니다. 어떤 자매님들은 망사형 파티복을 입고 나타납니다. 어떤 분들은 겉옷을 속에입고 속옷을 겉에 입는 희안한 패션으로 형제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은 가판대에서 만원을 내고 무제한 클럽자유이용권을 구입합니다. 이 클럽 저 클럽을 옮겨 다니며 물 좋은 짝을 찾아 다닙니다. 라이브클럽에서 남모르는 사람들과 몸을 흔들고 부딪히며 화끈한 밤을 즐겨보고자 합니다. 결국 관심은 이성에게로 돌아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 선을 술과 쾌락의 유혹 때문에 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면 아무일 없는 듯 각자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제밤에 한 여인에게 받은 상처로 이 모군은 얼큰이 순대국에 해장술을 홀짝 홀짝 마시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사람들이 와 보고 싶어하는 홍대 클럽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뿐만 아니라 물질의 탐욕으로 가족도 버리고 서슴없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대학가의 원룸 촌에는 젊은 남녀들이 혼전 동거를 합리화 하며 순수한 사랑으로 끝날 수 없는 정욕의 상처로 젊은 날을 병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도덕과 윤리를 집어삼키고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은 죄악을 멈추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 내 생각과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죄 때문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뭔가 어그러지고, 깨지고, 고통스럽고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보실 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성경은 롬6:23a“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결국 죽음입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죄가 주는 달콤함은 크지만 결과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나와 너,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는 마치 마약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기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깨닫고 예수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제2장.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34~49)
우리는 종종 고통의 순간에 어떻게 합니까? 죽는 소리를 하거나 욕하고 저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육신의 본성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3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위대한 인격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향해 고통을 가해오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하십니다. 이 용서의 음성이 그토록 우리의 뇌리를 치고 가슴을 뒤집어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아버지.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조차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신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고통 받게 하시고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셨습니다.
둘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용서는 둘째치고 증오와 무관심이 더욱 자라나는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용서치 않음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관계성 파괴, 원한, 쓴뿌리, 복수의 뿌리가 됩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수많은 복수가 이어져 왔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악순환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심으로 이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해서 어떤 원한도 간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 우리의 모든 죄와 그 기록들을 깨끗이 지워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용서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며” (고전13:5)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녹화한 비디오와 같이 반복해서 재생하며 기억합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에 대한 쓴 뿌리와 분노를 무덤까지 싸가지고 갑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나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나에게 상처 준 그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들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복음입니다. 저희가 이 시간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해야겠습니다. 이 용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사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내 생각, 내 고집대로 살아 갈 수는 있지만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가 없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내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든 죄 짐을 한번에 내려놓게 하시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을 때 무지하게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들이 만왕의 왕을 조롱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기를 의롭다 하며 합리화합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 군병들같이 다른 사람들의 역경과 고난을 잔혹하게 비웃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 옆에 있던 범죄자들같이 게으르고 부정직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두려움과 연약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오늘날 남편과 아내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으로 수 많은 가정들이 파탄이 나고 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쾌락을 추구하고 부도덕한 생활에 탐닉함으로 수치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날 좀 내버려둬, 내 인생 내가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인생의 목적을 잃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무지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합이니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반항하는 아들이나 제 맘대로 사는 딸로 인해 애통해 하는 아버지와 같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고통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우리를 치료하여 하나님의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자녀로 온전히 회복케 하십니다.
넷째, 예수님의 용서의 복음은 질시와 반목하는 죄인들을 하나되게 합니다. 인간관계는 우리인생에서 풀어야 할 가장 어렵고 힘든 숙제 중 하나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시대가 도래하자 함께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 졌습니다. 뿌리부터 불신의 병에 걸리면 치료할 약이 마땅치 않습니다. 싫은 사람은 이유 없이 싫고 그 사람이 행복하면 곧 나의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속 마음을 열어버리면 바보가 될 듯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상적인 웃음을 던지는 것이 편안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요구나 싫은 소리는 더욱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무시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존심이 상처받기 싫은 자기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인 어느 조직이나 끊임없는 갈등과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고집적인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용서의 복음 안에서 조건 없는 은혜를 나눌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요구하는 마음보다 서로를 끌어 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도 용서의 사랑으로 하나로 섞이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흩어진 제자들은 다시 회복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명을 함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얕은 지식과 생각, 자존심으로 서로를 용납하기를 거절해왔습니다. 또 각자 자신의 가치관 스타일과 주관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십자가 앞에 내가 뭣 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갈등과 오해, 교만과 연약함을 모두 무력화 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각양각색의 죄인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합니다. 무지한 죄로 인해 고독하게 살다가 죽을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주님의 사명을 위해 불러 모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해야겠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되어 서로 용납하는 은혜, 하나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행복, 하나되어 함께 주를 섬기는 기쁨”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용서의 기도를 영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V.34b~43 말씀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갈라집니다. 군병들은 십자가 아래서 제비 뽑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은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며 여전히 비아냥 거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왼편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불신과 저주의 말, 모욕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들의 무지한 생각으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리스도답게 힘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편강도의 생각은 어떻게 틀립니까? “40~42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사람은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심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뜨여 하나님과 하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이를 기초로 그는 담대하게 간청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오늘”즉 그가 회개하고 영접한 그 순간부터 주님은 그 흉악한 범죄자를 용서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며 자신을 위해 이땅에 오신 구주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자라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용서함과 예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냉소적인 행악자는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홀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회개한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구하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6시간 동안 예수님은 고스란히 우리의 죄와 수치를 안고 십자가에 매달려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3시간 동안 범상치 않은 자연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로 찢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갈라놓은 휘장을 찢어놓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믿음으로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 찬송 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순종하시다가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 아버지께로 이끄는 거룩한 사명을 완수한 승리의 마침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까지 백부장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군인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그토록 거룩하고 은혜롭고 평화로운 죽음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무지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
저는 1969년 7월 서울 이문동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와 성공을 중시여겼던 형과 누나밑에서 자란 저는 성공하여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 라고 생각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꽃잎을 띄운 자스민 한잔은 저의 인생을 나타내는 심볼과 같았습니다. 저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 보다 자기세계에 심취하여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성을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저는 이기적인 yuppie와 같이 허무하게 인생을 살다 죽을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때 어머니의 위암사건으로 말미암아 저는 죽음을 알게되었고 벧전1:3,4절 산소망 말씀을 통해 허무한 이땅의 삶에 소원을 두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캠퍼스 목자로 부르시고 섬기는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89년 홍대건축학과를 들어온 이후로 미국유학과 성공의 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형을 보며 소망해 왔던 인간적인 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보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의미있고 감동적인 인생을 살고싶었습니다. 저는 97년 미국 일리노이대 어드미션을 버리고 순수한 선교사로서 살고자 결단케 도우셨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축복가운데 재미있고 쿨한 매력이 있는 김헬렌 선교사와 선교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며 프랑스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후보때 찍은 사진을 보면 제동역자는 제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세계에만 갇혀 살아와 사람을 잘 몰랐던 저는 먼나라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상처를 받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심령이 여리고 연약했던 저로서는 매우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내면의 불신과 상처, 분노를 지우지 못한 채 99년 겨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실패한 선교사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의식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 수 가 없었습니다. 저는 운명을 탓하며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모습을 나타내면 감정적인 분과 혈기를 터뜨렸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을 수 가 없는 병자와 같았습니다. 깨어진 저의 심성은 회복되기가 어려웠고 센터에서는 외로운 기러기요 회사에서는 고독한 로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쌍한 이 아들을 하나님은 돌아보시지 않는 듯 한국에 돌아온 지 5년, 결혼한지 7년이 지나도 원하는 자녀는 갖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육간에 깊은 실패의식, 사람들에 대한 분노, 자기사랑과 이기심은 저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저는 말을 잃고 사람을 잃고 행복을 잃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남의 탓과 불신이 지배했던 저의 삶에 도움이되는 것은 타이레놀 두알뿐인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마음과 영혼의 짐을 안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 죄인에게 “아버지, 요셉이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고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나의 병든 영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9년간의 국내생활을 정리하면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죄가운데 고통하며 살아왔던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의 음성을 영접할 때 제게있는 고통과 어색함 두려움이 사라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년간의 삶을 통해 삶을 치유하시는 주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자식으로는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요셉이와 에스더를, 영적인 자식으로는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효연형제님과 명숙자매님을 한 셋트씩 보내주셨습니다. 4차례나 방황하던 직장문제는 종지부를 찍고 웹관련 회사를 설립하고 30명대의 회사로 키워주셨습니다. 외로운 기러기와 같았던 신앙생활도 몇몇 목자님들과 마음을 열게 하시고 사랑을 회복하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사실 마음을 닫고 혼자 미움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본심은 주의 은혜와 사랑에 목말랐고 동역자의 사랑에 목말랐고 사람들의 사랑에 목마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을 영접할 때 그 십자가 앞에 모든 죄 문제가 눈 녹듯 녹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왜 저를 이렇게 구약의 요셉과 같이 인도하셨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은 죄인들을 품을 수 있는 목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용서의 복음을 가지고 상처받은 영혼들의 목자로 새롭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국 주님의 용서의 사랑은 나 한 사람을 죄의 수렁에서 건지사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축복의 음성입니다. 또 무지함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너,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강력한 메시지 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용서의 사랑이 그 피를 믿는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심지어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사 하나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행복을 회복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26–49
요절 23:34a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세 가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에는 어떤 죄인도 믿기만 하면 고침을 받고 변화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6~34)
1-25절에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심문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심으로 인해 정죄 당하셨습니다. 그 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선고 받으셨습니다. 이에 병사들이 형을 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기 위해 그 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피가 예수님의 얼굴과 목을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온 몸이 피 범벅이 될 때까지 채찍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고 거리를 지나 형 집행 장소로 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병사들은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북아프리카 출신 시몬을 붙잡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십자가 행렬에서 여전히 무지한 죄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 중에 특히 슬피 우는 여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십자가 예수님을 보며 가슴을 치고 크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들을 향해 무슨 말씀 하십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29) 예수님은 여인들의 연민의 눈물로 위로 받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현실을 볼 때 그들을 향한 눈물을 흘리십니다. 장차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그들의 현실은 더욱 애통한 일입니다. 그때의 비참함이 어느 정도입니까? 29~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그때에는 인간이 세운 모든 영광은 무너지고 타서 재가됩니다. 심판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그 심판의 강도가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말씀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신다면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들의 죄를 애통히 회개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원하십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죄 없으신 예수님은 두 흉악범 사이에서 달리심으로 더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십자가형에 대해 모두 간략하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십자가형은 설명이 필요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혐오스런 사형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채찍으로 피범벅이 된 예수님의 몸은 십자로 된 나무 형틀에 던져졌습니다. 군병들은 두 팔을 잡아 당겨 거친 끈으로 나무에 휘감았습니다. 망치를 든 군병 한 사람이 10센티가 넘는 대못을 가지고 와 예수님의 손에 갖다 대고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순간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와 십자가와 온 주위를 물들였습니다. 대못은 살갗을 뚫고 신경다발을 지나 동맥을 끊고 나무아래로 깊숙이 박혔습니다. 무고한 피는 그 대못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손도 위치를 맞추려고 힘껏 잡아 당기자 끔찍한 전기적 고통이 예수님의 온 몸을 타고 지나 갔습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사정없이 대못을 다른 손에도 박았습니니다. 두발을 겹친 발등에는 더욱 큰 대못을 내리 꽂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씻기에는 한군데도 모자라 세 군데 아니 온몸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들어 올려질 때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한 채 주님의 몸은 점점 더 갈기갈기 찢기고 또 찢겨졌습니다. 십자가가 땅에 쿵 하고 박히는 순간 까무러치는 고통이 온몸을 내리 눌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수치 가운데 천천히 죽어 가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시22:14~15절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무지한 인간들이 주는 고통 때문에 그 뼈가 어그러지고 마음이 녹고 혀가 천장에 붙어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어떤 보복을 가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34b을 보십시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무지한 인간들이 저지른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있어서는 안될 인류 최악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자기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시기심의 종이 된 종교지도자들은 시뻘건 눈을 하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불법회합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환대했던 무리들은 닷새 만에 폭도로 변해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 해 댔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 피의 대가를 자기들에게 돌려도 좋다고 하지 못할 말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잔혹한 고문을 시켜 무리를 달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군병들은 피 맛을 본 짐승처럼 예수님의 육신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채찍을 가해 육신을 찢고 침을 뱉으며 희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예수님을 못박고도 그 십자가 밑에서 제비 뽑기를 하는 짐승 보다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이 십자가형벌이 얼마나 하지 못할 끔찍한 짓이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죄인들에 의해 몸과 마음과 영혼이 철저히 찢기고 피로 물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 의해 이런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무지한 나의죄, 무지한 너의 죄, 무지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자유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를 문화와 개성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매우 개성적인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여지게 합니다. 또는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고리를 끊을 수 없어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기도 합니다.
금요일 저녁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홍대 클럽 가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좋다는 홍대물을 좀 마셔보고자 몰려듭니다. 어떤 자매님들은 망사형 파티복을 입고 나타납니다. 어떤 분들은 겉옷을 속에입고 속옷을 겉에 입는 희안한 패션으로 형제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젊은이들은 가판대에서 만원을 내고 무제한 클럽자유이용권을 구입합니다. 이 클럽 저 클럽을 옮겨 다니며 물 좋은 짝을 찾아 다닙니다. 라이브클럽에서 남모르는 사람들과 몸을 흔들고 부딪히며 화끈한 밤을 즐겨보고자 합니다. 결국 관심은 이성에게로 돌아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 선을 술과 쾌락의 유혹 때문에 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면 아무일 없는 듯 각자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제밤에 한 여인에게 받은 상처로 이 모군은 얼큰이 순대국에 해장술을 홀짝 홀짝 마시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사람들이 와 보고 싶어하는 홍대 클럽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뿐만 아니라 물질의 탐욕으로 가족도 버리고 서슴없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대학가의 원룸 촌에는 젊은 남녀들이 혼전 동거를 합리화 하며 순수한 사랑으로 끝날 수 없는 정욕의 상처로 젊은 날을 병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도덕과 윤리를 집어삼키고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은 죄악을 멈추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 내 생각과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죄 때문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뭔가 어그러지고, 깨지고, 고통스럽고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보실 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성경은 롬6:23a“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결국 죽음입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죄가 주는 달콤함은 크지만 결과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나와 너,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는 마치 마약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기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깨닫고 예수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제2장.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34~49)
우리는 종종 고통의 순간에 어떻게 합니까? 죽는 소리를 하거나 욕하고 저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육신의 본성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3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위대한 인격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향해 고통을 가해오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하십니다. 이 용서의 음성이 그토록 우리의 뇌리를 치고 가슴을 뒤집어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아버지.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조차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신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고통 받게 하시고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셨습니다.
둘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용서는 둘째치고 증오와 무관심이 더욱 자라나는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용서치 않음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관계성 파괴, 원한, 쓴뿌리, 복수의 뿌리가 됩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수많은 복수가 이어져 왔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악순환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심으로 이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해서 어떤 원한도 간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 우리의 모든 죄와 그 기록들을 깨끗이 지워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용서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며” (고전13:5)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녹화한 비디오와 같이 반복해서 재생하며 기억합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에 대한 쓴 뿌리와 분노를 무덤까지 싸가지고 갑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나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나에게 상처 준 그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들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복음입니다. 저희가 이 시간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해야겠습니다. 이 용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사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내 생각, 내 고집대로 살아 갈 수는 있지만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가 없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내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든 죄 짐을 한번에 내려놓게 하시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을 때 무지하게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들이 만왕의 왕을 조롱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기를 의롭다 하며 합리화합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 군병들같이 다른 사람들의 역경과 고난을 잔혹하게 비웃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 옆에 있던 범죄자들같이 게으르고 부정직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두려움과 연약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오늘날 남편과 아내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으로 수 많은 가정들이 파탄이 나고 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쾌락을 추구하고 부도덕한 생활에 탐닉함으로 수치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날 좀 내버려둬, 내 인생 내가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인생의 목적을 잃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무지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합이니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반항하는 아들이나 제 맘대로 사는 딸로 인해 애통해 하는 아버지와 같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고통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우리를 치료하여 하나님의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자녀로 온전히 회복케 하십니다.
넷째, 예수님의 용서의 복음은 질시와 반목하는 죄인들을 하나되게 합니다. 인간관계는 우리인생에서 풀어야 할 가장 어렵고 힘든 숙제 중 하나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시대가 도래하자 함께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 졌습니다. 뿌리부터 불신의 병에 걸리면 치료할 약이 마땅치 않습니다. 싫은 사람은 이유 없이 싫고 그 사람이 행복하면 곧 나의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속 마음을 열어버리면 바보가 될 듯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상적인 웃음을 던지는 것이 편안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요구나 싫은 소리는 더욱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무시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존심이 상처받기 싫은 자기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인 어느 조직이나 끊임없는 갈등과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고집적인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용서의 복음 안에서 조건 없는 은혜를 나눌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요구하는 마음보다 서로를 끌어 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도 용서의 사랑으로 하나로 섞이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흩어진 제자들은 다시 회복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명을 함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얕은 지식과 생각, 자존심으로 서로를 용납하기를 거절해왔습니다. 또 각자 자신의 가치관 스타일과 주관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십자가 앞에 내가 뭣 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갈등과 오해, 교만과 연약함을 모두 무력화 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각양각색의 죄인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합니다. 무지한 죄로 인해 고독하게 살다가 죽을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주님의 사명을 위해 불러 모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해야겠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되어 서로 용납하는 은혜, 하나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행복, 하나되어 함께 주를 섬기는 기쁨”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용서의 기도를 영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V.34b~43 말씀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갈라집니다. 군병들은 십자가 아래서 제비 뽑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은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며 여전히 비아냥 거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왼편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불신과 저주의 말, 모욕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들의 무지한 생각으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리스도답게 힘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편강도의 생각은 어떻게 틀립니까? “40~42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사람은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심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뜨여 하나님과 하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이를 기초로 그는 담대하게 간청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오늘”즉 그가 회개하고 영접한 그 순간부터 주님은 그 흉악한 범죄자를 용서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며 자신을 위해 이땅에 오신 구주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자라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용서함과 예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냉소적인 행악자는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홀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회개한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구하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6시간 동안 예수님은 고스란히 우리의 죄와 수치를 안고 십자가에 매달려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3시간 동안 범상치 않은 자연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로 찢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갈라놓은 휘장을 찢어놓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믿음으로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 찬송 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순종하시다가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 아버지께로 이끄는 거룩한 사명을 완수한 승리의 마침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까지 백부장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군인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그토록 거룩하고 은혜롭고 평화로운 죽음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무지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
저는 1969년 7월 서울 이문동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와 성공을 중시여겼던 형과 누나밑에서 자란 저는 성공하여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 라고 생각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꽃잎을 띄운 자스민 한잔은 저의 인생을 나타내는 심볼과 같았습니다. 저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 보다 자기세계에 심취하여 자기만족을 누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성을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저는 이기적인 yuppie와 같이 허무하게 인생을 살다 죽을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때 어머니의 위암사건으로 말미암아 저는 죽음을 알게되었고 벧전1:3,4절 산소망 말씀을 통해 허무한 이땅의 삶에 소원을 두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캠퍼스 목자로 부르시고 섬기는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89년 홍대건축학과를 들어온 이후로 미국유학과 성공의 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형을 보며 소망해 왔던 인간적인 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보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의미있고 감동적인 인생을 살고싶었습니다. 저는 97년 미국 일리노이대 어드미션을 버리고 순수한 선교사로서 살고자 결단케 도우셨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축복가운데 재미있고 쿨한 매력이 있는 김헬렌 선교사와 선교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며 프랑스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후보때 찍은 사진을 보면 제동역자는 제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세계에만 갇혀 살아와 사람을 잘 몰랐던 저는 먼나라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상처를 받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심령이 여리고 연약했던 저로서는 매우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내면의 불신과 상처, 분노를 지우지 못한 채 99년 겨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실패한 선교사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의식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 수 가 없었습니다. 저는 운명을 탓하며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모습을 나타내면 감정적인 분과 혈기를 터뜨렸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을 수 가 없는 병자와 같았습니다. 깨어진 저의 심성은 회복되기가 어려웠고 센터에서는 외로운 기러기요 회사에서는 고독한 로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쌍한 이 아들을 하나님은 돌아보시지 않는 듯 한국에 돌아온 지 5년, 결혼한지 7년이 지나도 원하는 자녀는 갖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육간에 깊은 실패의식, 사람들에 대한 분노, 자기사랑과 이기심은 저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저는 말을 잃고 사람을 잃고 행복을 잃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남의 탓과 불신이 지배했던 저의 삶에 도움이되는 것은 타이레놀 두알뿐인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마음과 영혼의 짐을 안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 죄인에게 “아버지, 요셉이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고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나의 병든 영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9년간의 국내생활을 정리하면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죄가운데 고통하며 살아왔던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의 음성을 영접할 때 제게있는 고통과 어색함 두려움이 사라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년간의 삶을 통해 삶을 치유하시는 주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자식으로는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요셉이와 에스더를, 영적인 자식으로는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효연형제님과 명숙자매님을 한 셋트씩 보내주셨습니다. 4차례나 방황하던 직장문제는 종지부를 찍고 웹관련 회사를 설립하고 30명대의 회사로 키워주셨습니다. 외로운 기러기와 같았던 신앙생활도 몇몇 목자님들과 마음을 열게 하시고 사랑을 회복하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사실 마음을 닫고 혼자 미움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본심은 주의 은혜와 사랑에 목말랐고 동역자의 사랑에 목말랐고 사람들의 사랑에 목마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을 영접할 때 그 십자가 앞에 모든 죄 문제가 눈 녹듯 녹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왜 저를 이렇게 구약의 요셉과 같이 인도하셨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은 죄인들을 품을 수 있는 목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용서의 복음을 가지고 상처받은 영혼들의 목자로 새롭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국 주님의 용서의 사랑은 나 한 사람을 죄의 수렁에서 건지사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축복의 음성입니다. 또 무지함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너,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강력한 메시지 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용서의 사랑이 그 피를 믿는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심지어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사 하나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행복을 회복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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