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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1강(10:16-11:1) 뱀같은 지혜, 비둘기 같은 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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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30회 작성일 08-08-2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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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21강                                                       
말씀 마태복음 10:16-11:1
요절 마태복음 10:16

뱀 같은 지혜, 비둘기 같은 순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지난 주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 죄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제 가을 학기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캠퍼스로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대상들은 온순하게 말씀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박해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첫째,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16)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보내는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당할 어려움을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사탕발림으로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어린 양과 같지만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미움을 받을지라도 보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야 합니다. 저는 퍼듀 수양회에서 로버트 콜만 박사의 강의를 통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해안 경비대라고 불리는 미군의 한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해변을 지키고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구조 작업을 돕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저녁, 한 기지에서 침몰하는 배로부터 구조요청 신호를 받았습니다. 장교는 그의 부하들에게 즉시 구조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신병 한 사람이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는 한 밤중 폭풍우 속에서 바다 한 가운데 나가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그는 지휘관에게 말했습니다. “대장님, 오늘 밤 출동한다면, 우리는 못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자네,” 그 장교가 대답했습니다. “명심하게. 우리는 꼭 돌아올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출동해야만 한다.” 그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것이 해안 경비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헌신이 없으면 우리는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리고 연약하다고 해서 꽁무니만 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리지만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나아가 그들과 부딪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무서워하기만 하던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감당할 지혜와 힘을 기르기를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우리가 연약한 양에 불과하지만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장차는 사자처럼 강하고 늠름한 목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연약하다고 해서 약하게만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조금 상하겠지만 그들을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렵다고 꽁무니를 빼기보다 연단을 받아서 믿음의 용사로 성장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뱀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뱀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자취도 남기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돌아다닙니다. 그렇지만 위험이 생기면 쏜살같이 도망가고, 먹이를 잡을 기회가 생기면 순식간에 물어버리고 또 먹이를 한 번 물면 칭칭 동여감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습니다. 뱀은 이렇게 해서 잡은 자기보다 큰 짐승을 큰 입으로 단번에 삼켜버립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 먹이를 소화를 시킵니다. 뱀이 지혜롭다고 할 때 그 뜻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공회에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바울은 대적들의 공격을 받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적절히 처신을 잘 했습니다.

박해에 직면한 제자는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무대책으로 당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잘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함으로써 불필요한 피해와 박해를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지 위기를 자초해서 영웅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피할 때와 고난을 감당해야 할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자는 지혜로우면서도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비둘기는 평화롭고 순결하게 생겼습니다. 실제로 비둘기는 짝을 잃으면 구구구 하면서 슬퍼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절대로 다른 짝을 얻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당부하신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적인 순결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힘들고 우리는 능력이 없다고 해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만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중심을 굳게 지키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사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질 도리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순결을 흠 없이 지켜 나가는 것은 자칫 서로 충돌될 수도 있지만 제자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균형을 적절히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핍박 중에 견디면서 복음 증거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17-23). : 제자들은 만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제자들을 공회나 회당에 넘겨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채찍질을 할 것입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칼빈이나 루터를 공격한 사람들은 교황이고 죤 웨슬레를 핍박한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입니다. 동유럽의 선교지에서 우리 선교사님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동방 정교회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와 별 관계가 없지만 그들은 항상 종교를 이용해왔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를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지도자들의 핍박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당시 하류 계층인 제자들이 상류층, 귀족과 왕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끌려가서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우리 아버지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대제사장의 문중은 제자들이 공회에 끌려와서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습니다(행4:13). 제자들의 논리 정연한 말을 듣고 그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장차 제자들은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 버릴 수 있어도 가족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가족을 버리는 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할 때 가족 간에 불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런 갈등이 일어날 때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변화와 소망에 대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박해는 무엇입니까? 방송과 언론 매체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기독교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반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견디어야 하고, 캠퍼스 양들의 차디찬 반응과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들을 견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마음의 상처와 손해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24-28) : 24,25절을 보십시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는 자기 스승만큼 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고 종도 그의 주인만큼 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자 주인이신 그리스도보다 크게 될 수는 없지만 그를 닮고자 하는 열망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가져야 합니다(25).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고 모든 병든 자를 치료하자 원수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자 주이신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비난과 박해를 받습니다.

제자들은 박해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과도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박해를 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죽음 너머 저 세상도 지배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비해야 할 삶은 나그네의 삶과 같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입니다. 노후 준비보다 영원한 삶에 대한 준비가 없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외면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어야 합니다(29-39). : 29절을 보십시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운명에 대해서 까지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의 관할권 밖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700원짜리 참새보다 더 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머리를 감을 때 머리털이 얼마나 빠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제자들은 참새나 머리털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관심과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거절과 박해 심지어는 죽음에 직면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지 않았던 예수님과 같이 어떤 시련 앞에서도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그 믿음이 드러나야 하고 입으로나 삶으로 시인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도 그를 부인할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악한 대적들의 핍박을 허용하실까요? 이는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핍박이 오래가면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크다는 것을 믿음이 있는 신자들은 다 체험을 하였습니다. 핍박 속에서 신자들은 영적인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이 핍박 속에 피어나는 신비입니다. 네로 황제는 크리스천들을 콜롯세움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웃으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의 믿음이 승리하였습니다. 사실 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속주의입니다. 세상의 쾌락, 안정, 재미를 즐기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해지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영적인 타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사랑하사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깨어지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십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자기 발견을 하게 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가 제대로 믿고자 할 때 여기저기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성경도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뒤로 하고 부모님의 요구에 따르며 타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지 않는 자도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세상은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쾌락주의, 성공 지향적인 가치관이 팽배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고자 할 때, 장차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포기할 때 어떻게 됩니까? 그는 제자의 삶을 포기한 대가로 세상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생 목표를 성취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아 좀 더 안정된 자리를 얻고 삶에 좀 더 여유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잃을 것입니다. 무엇을 잃을 것입니까? 결국 예수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들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얻을 것입니다. 천국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됩니다. 그는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섯째, 제자를 섬기는 자에게 상급이 있습니다(40-42). :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41). “선지자의 이름으로”, 또는 “의인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가 의인이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그가 의인이므로 그를 영접하고 그가 하는 일을 돕습니다. 그리할 때 그도 곧 의인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 동참한 것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를 귀하게 여기고 그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할 것입니다. 근동지역에서 손님에게 냉수 한 잔을 제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기본적 예절로서 무엇인가 보상을 받을 만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그러한 사소한 섬김마저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세상에 대하여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1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제자들의 전도 사역은 당시 사회에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을 통한 천국복음 전파는 당시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가 활발히 일어날 때 핍박도 활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가 적으면 핍박도 적습니다. 우리는 가을 학기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이때 핍박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관계전도에 힘쓰고 전에 만났던 양들을 회복하는 일에 힘을 쓰기를 바랍니다. 새 학기가 되어서 보다 진지해진 학생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의 순결을 지키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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