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8년 마태복음 19강(9:18-38)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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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19강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38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일이 많습니다. 8,9장은 예수님의 초창기 사역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귀신들린자, 중풍병자등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그리고 두 맹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 1장 믿음대로 축복하신 예수님(18-34)
18-34절에서 각기 다른 3가지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리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18-19, 27-31)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관리는 회당장인 야이로입니다. “예수님! 저의 딸이 죽었사오니 제발 오셔서 제 딸좀 살려주세요, 정말 부탁합니다. 예수님!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은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딸은 그의 유일한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일어나면 아빠!하고 달려와 뽀뽀를 하면 전날의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딸은 늘 집안의 분위기를 업(up)시키는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했습니다. 딸은 똑똑하여 항상 전교 1등을 하는 장래가 총망되는 아이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딸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남들 못지 않게 피아노, 발레, 영어, 웅변, 미술, 수영, 골프, 등 좋다는 것은 모두 시켰습니다. 딸을 훌륭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키우고자 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밖에 없는 귀하고 귀한 어린 딸이 갑자기 병명도 모른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회당장 야이로의 아픔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살아갈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딸만 살리기만 한다면 무슨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현재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가 평소에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고치신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딸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면몰수 하고 예수님께 나와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능히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시면 딸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25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믿은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야이로의 딸을 잠을 깨우듯이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마치 곤히 잠든 어린 딸을 깨우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요 부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이로의 딸은 단잠에서 깨어나듯 살아났습니다. 아빠, 이분은 누구야?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말하는 딸을 본 순간 야이로는 너무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주님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야이로와 같이 생명의 부요자요 죽은자를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양들도 살아날 것입니다.
둘째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20-22)
20절을 보면 혈루증으로 12년 동안 고생한 여인이 나옵니다. 현대 의학적병명은 자궁내막염입니다. 이 병은 부정기적으로 하혈을 하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당시 이 병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취급했습니다. 여인이 처음 하혈을 할 때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 5년 10년이 지나면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안후부터 이 여인은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친한 친구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예배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하는 고독한 삶,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평생 결혼도 할 수 없어 단란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면 자신의 인생을 저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저주스런 운명이 찾아온 것인가?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여인은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문은 그녀로 하여금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소문대로라면 자신의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뒤로하고 무조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뒤로 몰래와서 살짝 옷가에 손을 댔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혈루병이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여인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낫고자 하는 신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감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12년간 그를 괴롭혔던 혈루병이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순간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순간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당할까하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결혼의 소망도 생기고, 에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나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이 여인과 같이 오직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두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27-31)
27절을 보면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앞을 못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줄곧 앞을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껏 뛰고 싶어도 뛰지 못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TV도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며,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온몸에 상처투성이었습니다. 택시를 잡아도 택시기사들은 그들을 피해갔습니다. 그들의 삶은 앞을 볼 수 없다는 현실과 그로 인한 마음의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고침을 받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간절히 외쳤습니다. 27절하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맹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이샤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두 눈을 밝히 보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왜 이렇게 물어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소리 지르는 것인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아오는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주여 그러하오이다.” 라고 확신있게 대답했다. 진정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 눈을 만져주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백이 터져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눈먼자를 뜨게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으로 눈먼자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하시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적으로 감기워진 눈이 나음을 받아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위 세가지 기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각 사람의 믿음대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에게는 그가 갖고 있었던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대로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맹인들에게도 그들이 믿었던 메시야로서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만큼만 역사하십니다. 현재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자양성에 대한 믿음, 일대일에 도전하고자 하는 믿음, 직장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학업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반복되는 죄가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 장래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 여름수양회에 양이 참석해서 변화받을 수 있다는 믿음, 물질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세계적인 목자요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제2장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35-38)
지금까지 배운 8,9장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너무나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각종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감당 하시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양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볼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해결 받지 못한 인생문제로 인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
목자없는 양은 어떻습니까? 목자없는 양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서 목자의 인도 없이는 길을 찾아 갈 수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이리와 늑대의 밥이 될 정도로 연약합니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초장을 찾지 못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고생한다는 의미는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진하다’는 의미는 쓰러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겪는 삶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몰려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양으로 보였습니다. 괴로움 때문에 쓰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10만명당 OECD국가평균 11.2명보다 훨씬높은 21.5명입니다. 그중에서 청소년의 자살률이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해결받지 못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목자의 책임감이 무겁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목자가 없어 방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전도 없었습니다. 저는 죄로 인해 운명적인 삶, 부정적인 삶, 소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왜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군대에서 김이삭 선교사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생문제가 해결되고 비전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김이삭 목자님의 목자의 심정이 없었다면 저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김이삭 선교사님의 목자의 심정 때문에 제가 살게 되었습니다.
캠퍼스양들을 바라 볼 때 정말로 그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가?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들은 외형적으로 잘 먹고 잘 삽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핸드폰, MP3는 기본, 카메라, 심지어 PMP 등 첨단 기기들을 가지고 재미있고 멋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맘대로 사먹고, 사고 싶은 것 사고, 놀고 싶을 때 마음껏 놉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무엇이지 잘 모릅니다. 그냥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사는 양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모습에 불과 합니다.
그들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내시경 검사를 하면 무슨병에 걸렸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마찬가지로 양들을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로 병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면 양들은 어떤 병들을 앓고 죽어가고 있습니까?
무기력증, 열등감, 이기주의, 운명주의, 쾌락, 대인기피증, 인터넷.게임중독증, 부모에 대한 증오심, 장래문제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염려 등 각종 내면의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양들은 누구하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두통에 시달리며, 술과 담배로 자신의 아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서서히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불쌍히 여겨야 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목자이기에 당연히 이런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목자이면서 목자의 심정이 없다면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리방황하는 양들을 감당할 목자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양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을 감당할 일꾼이 적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모자라 추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농부는 추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여 벼를 제때 추수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본문에서 추수할 일꾼은 제자들을 상징합니다. 당시 양들은 많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양을 이용하는 파렴치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양성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자신과 함께 양들을 감당할 지원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자신과 같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섬길 제자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이렇게 기도하도록 간절히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전세계 희어져 추수하게 된 양들이 추수할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대로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극복하고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전체적으로는 204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전세계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간절한 기도제목입니다. 또한 우리 센터는 12명의 학생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번 퍼듀 국제수양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과 비전을 주신 수양회였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즉석에서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한 동역자들이 5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89개국에 2600명의 선교사가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반교회나 다른 선교단체서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233개국중 우리가 개척해야할 나라는144개국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낮으로 시간만 나면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이 문제라고 양들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시대가 어려워서 제자 양성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이 문제가 아니요 시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요, 목자의 심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분명한 제자양성의 방향을 잡고 영적인 투쟁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대가운데 이 시대를 감당할 만한 제자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를 통해 홍대가 변화되고 전세계 캠퍼스가 복음으로 변화되는 비전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38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일이 많습니다. 8,9장은 예수님의 초창기 사역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귀신들린자, 중풍병자등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그리고 두 맹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 1장 믿음대로 축복하신 예수님(18-34)
18-34절에서 각기 다른 3가지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리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18-19, 27-31)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관리는 회당장인 야이로입니다. “예수님! 저의 딸이 죽었사오니 제발 오셔서 제 딸좀 살려주세요, 정말 부탁합니다. 예수님!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은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딸은 그의 유일한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일어나면 아빠!하고 달려와 뽀뽀를 하면 전날의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딸은 늘 집안의 분위기를 업(up)시키는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했습니다. 딸은 똑똑하여 항상 전교 1등을 하는 장래가 총망되는 아이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딸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남들 못지 않게 피아노, 발레, 영어, 웅변, 미술, 수영, 골프, 등 좋다는 것은 모두 시켰습니다. 딸을 훌륭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키우고자 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밖에 없는 귀하고 귀한 어린 딸이 갑자기 병명도 모른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회당장 야이로의 아픔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살아갈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딸만 살리기만 한다면 무슨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현재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가 평소에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고치신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딸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면몰수 하고 예수님께 나와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능히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시면 딸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25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믿은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야이로의 딸을 잠을 깨우듯이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마치 곤히 잠든 어린 딸을 깨우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요 부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이로의 딸은 단잠에서 깨어나듯 살아났습니다. 아빠, 이분은 누구야?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말하는 딸을 본 순간 야이로는 너무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주님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야이로와 같이 생명의 부요자요 죽은자를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양들도 살아날 것입니다.
둘째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20-22)
20절을 보면 혈루증으로 12년 동안 고생한 여인이 나옵니다. 현대 의학적병명은 자궁내막염입니다. 이 병은 부정기적으로 하혈을 하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당시 이 병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취급했습니다. 여인이 처음 하혈을 할 때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 5년 10년이 지나면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안후부터 이 여인은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친한 친구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예배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하는 고독한 삶,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평생 결혼도 할 수 없어 단란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면 자신의 인생을 저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저주스런 운명이 찾아온 것인가?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여인은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문은 그녀로 하여금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소문대로라면 자신의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뒤로하고 무조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뒤로 몰래와서 살짝 옷가에 손을 댔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혈루병이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여인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낫고자 하는 신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감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12년간 그를 괴롭혔던 혈루병이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순간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순간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당할까하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결혼의 소망도 생기고, 에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나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이 여인과 같이 오직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두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27-31)
27절을 보면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앞을 못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줄곧 앞을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껏 뛰고 싶어도 뛰지 못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TV도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며,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온몸에 상처투성이었습니다. 택시를 잡아도 택시기사들은 그들을 피해갔습니다. 그들의 삶은 앞을 볼 수 없다는 현실과 그로 인한 마음의 병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고침을 받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간절히 외쳤습니다. 27절하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맹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이샤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두 눈을 밝히 보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왜 이렇게 물어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소리 지르는 것인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아오는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주여 그러하오이다.” 라고 확신있게 대답했다. 진정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 눈을 만져주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백이 터져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눈먼자를 뜨게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으로 눈먼자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하시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적으로 감기워진 눈이 나음을 받아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위 세가지 기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각 사람의 믿음대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에게는 그가 갖고 있었던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대로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맹인들에게도 그들이 믿었던 메시야로서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만큼만 역사하십니다. 현재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자양성에 대한 믿음, 일대일에 도전하고자 하는 믿음, 직장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학업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반복되는 죄가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 장래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 여름수양회에 양이 참석해서 변화받을 수 있다는 믿음, 물질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세계적인 목자요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제2장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35-38)
지금까지 배운 8,9장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너무나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각종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감당 하시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양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볼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해결 받지 못한 인생문제로 인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
목자없는 양은 어떻습니까? 목자없는 양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서 목자의 인도 없이는 길을 찾아 갈 수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이리와 늑대의 밥이 될 정도로 연약합니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초장을 찾지 못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고생한다는 의미는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진하다’는 의미는 쓰러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겪는 삶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몰려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양으로 보였습니다. 괴로움 때문에 쓰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10만명당 OECD국가평균 11.2명보다 훨씬높은 21.5명입니다. 그중에서 청소년의 자살률이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해결받지 못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목자의 책임감이 무겁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목자가 없어 방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전도 없었습니다. 저는 죄로 인해 운명적인 삶, 부정적인 삶, 소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왜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군대에서 김이삭 선교사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생문제가 해결되고 비전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김이삭 목자님의 목자의 심정이 없었다면 저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김이삭 선교사님의 목자의 심정 때문에 제가 살게 되었습니다.
캠퍼스양들을 바라 볼 때 정말로 그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가?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들은 외형적으로 잘 먹고 잘 삽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핸드폰, MP3는 기본, 카메라, 심지어 PMP 등 첨단 기기들을 가지고 재미있고 멋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맘대로 사먹고, 사고 싶은 것 사고, 놀고 싶을 때 마음껏 놉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무엇이지 잘 모릅니다. 그냥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사는 양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모습에 불과 합니다.
그들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내시경 검사를 하면 무슨병에 걸렸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마찬가지로 양들을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로 병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면 양들은 어떤 병들을 앓고 죽어가고 있습니까?
무기력증, 열등감, 이기주의, 운명주의, 쾌락, 대인기피증, 인터넷.게임중독증, 부모에 대한 증오심, 장래문제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염려 등 각종 내면의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양들은 누구하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두통에 시달리며, 술과 담배로 자신의 아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서서히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불쌍히 여겨야 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목자이기에 당연히 이런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목자이면서 목자의 심정이 없다면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리방황하는 양들을 감당할 목자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양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을 감당할 일꾼이 적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모자라 추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농부는 추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여 벼를 제때 추수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본문에서 추수할 일꾼은 제자들을 상징합니다. 당시 양들은 많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양을 이용하는 파렴치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양성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자신과 함께 양들을 감당할 지원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자신과 같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섬길 제자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이렇게 기도하도록 간절히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전세계 희어져 추수하게 된 양들이 추수할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대로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극복하고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전체적으로는 204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전세계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간절한 기도제목입니다. 또한 우리 센터는 12명의 학생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번 퍼듀 국제수양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과 비전을 주신 수양회였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즉석에서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한 동역자들이 5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89개국에 2600명의 선교사가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반교회나 다른 선교단체서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233개국중 우리가 개척해야할 나라는144개국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낮으로 시간만 나면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이 문제라고 양들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시대가 어려워서 제자 양성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이 문제가 아니요 시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요, 목자의 심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분명한 제자양성의 방향을 잡고 영적인 투쟁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대가운데 이 시대를 감당할 만한 제자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를 통해 홍대가 변화되고 전세계 캠퍼스가 복음으로 변화되는 비전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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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회 다운로드 | DATE : 2008-08-03 16: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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