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8강(9:9-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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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18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태복음 9:9-17
요절 :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저는 요즘 메스컴을 통해서, 여러 부류의 형사적인 죄인들을 보게됩니다. 피서지 유흥비 마련을 위한 절도와 강도, 세상이 싫다며 관공서에 난입한 뭇지마 살인 등등. 외형적인 죄는 이렇게 드러나고 법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지은 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 탁구 레슨을 받고 땀이 뒤범벅이 된 체 버스를 탔는데 뒷자석에 앉은 어린 녀석이 ‘엄마 냄새나, 에이”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저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이고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부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허바울‘, ’이효연‘, ’김비젼‘, 심마태‘. .........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을 끌어 않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심령으로 영접하는 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마태야, 나를 따르라(9-13)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허물과 아픔, 죄 까지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시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가버나움은 아름다운 도시로서, 북쪽 시리아와 남쪽 이집트를 이어주는 국제 도로가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마다 하이패스나 통행권을 끊어야 되는 것 처럼, 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선 세관에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으므로 세관 수입은 모두 로마제국 유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금징수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촛불시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교활하게도 일정 시험을 패스한, 일정 자격을 갖춘 이스라엘 사람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였습니다. 식민지로서 고달프고, 서럽고, 슬픈 민족적 아픔을 함께 나누기 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였습니다. 징수 금액의 일정액은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갖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백성들 수입의 30% 이상을 세금으로 착취해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법정 증인으로 설 자격조차 주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혼혈족인 사마리아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남자는 사마리아 여자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여자는 사마리아 멍멍이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멍멍이는 세리를 멸시하였다.’
이토록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리의 자리에 바로 마태가 앉아있었습니다. 세리가 될 정도의 사람이므로 그는 똑똑하였습니다. ‘동족의 배신자요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는 사실도 역시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 길을 택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인생목적과 가치관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목적과 가치관은 바로 돈∼돈 돈이었습니다. 자신만이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여러 속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 뿐인 여동생이 ‘세금 철패’ 피켓을 들고 촛불시위 도중 척추를 다쳐, 돈 문제로 불구가 되버린 쓰라린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그들을 보다가 어머니가 홧병으로 위장암에 걸렸고, 돈이 없어서 돌아가시게 했던 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동생을 위해서, 어머니를 위해서 돈 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불끈 두 주먹을 쥐고 소리쳤습니다. “웬수 같은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거야!”
그는 공부하여 세리고시에 당당히 합격하였고 원하던 세금 징수원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직권을 이용하여 몰수이 재산을 축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승진도, 행복도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매국노라 손가락질 해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눈물 흘리며 “아버지 때문에 친구가 없어요! 차라리 노가다를 하세요. 엉..엉” 하고 울어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세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돈은 모았지만, 주위엔 사람이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돈이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놈의 돈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쉽사리 누구에게 말도 걸지 못했습니다. 돈 때문에 세상에서, 아니,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그리고 이곳 가버나움에서,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매일 맛보며 살아갔습니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이곳 저곳에 암덩이처럼, 깊은 멍이 들어갔습니다. 돈 때문에 받는 상처가, 마음을 찢어 놓는 상처였기에,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을 도저히 닦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돈 때문에, 마음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을 끝없이 고립시켜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레위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버태, 돈을 위해 나라를 버린 마태”, “피눈태, 피도 눈물도 없는 마태”, “돈갈태, 돈을 갈취해 가는 도둑 마태” 이렇게 숙덕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눈초리에 그도 이골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쓰디쓰게 아려오는 아픔을, 자신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누가 찾아왔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에게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이봐 세리, 오늘도 착취해?” 라고 말할 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 한마디에 마태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깊은 사랑이 있음도 알았습니다. 심령에서 뜻뜻한 그 무엇이 서서히 올라왔습니다. 외로움과 아픈 상처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려고도, 가까이 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매국노인 자신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사람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게 앉아 있는 마태의 내면을 보시고, 그의 아픔과 슬픔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산등성이 아버지처럼,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보듬어 안고자 손짓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돈에 종된 더러운 속물이며,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라고 하는 소중하고 귀한 한 인격체로 바라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를 상종치 않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세리 마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삶이, 모든 시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고독과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가 받는 멸시와 천대를 아셨습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얼마나 물질적이며,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얼마나 거짓되며, 얼마나 세상 물에 찌든 사람인가를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감당해 주시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시므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이십니다. 이 사랑의 주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이런 마태의 모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세리 마태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세리 마태는 돈을 좇아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동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타락한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마태는 능력은 많으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삶의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돈과 권력을 좇는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가, 장차 성 마태로 변화될 것을 바라보시며, 소망 중에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이기적인 세리 마태가 장차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될 것을 소망하며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금 장부나 뒤적이던 그가, 마태복음의 저자요, 가장 아름다운 산상수훈을 기록한,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소망 가운데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소망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변화시키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일어나 따랐습니다. 사실 세리직은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장래가 보장된 직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렵게 구한 직장, 천직이라 여겼던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한마디 말씀이, 그의 귀를 통하여, 심장을 통하여, 전신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멸시로 억눌리고 응어리졌던 가슴이 일시에 뚫렸습니다. 그는 저미는 가슴을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철저히 버림 받고, 멸시 당할 수 밖에 없는, 악명 높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던 자신에게 소망을 두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는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소망과 부르심의 은혜를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 마태의 구체적인 변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마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모인 자리가 엄청 어색하겠죠? “아...저...안..안녕하십니까? 저..마...마태라고...합니다” 어색하게 인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태에게 음료를 들고 건배를 제의했습니다. 세리 마태는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치어스! 마태는 ‘예수님’ 뜻도 풀이 하였습니다. “예는 예쁘게 살자, 수는 수수하게 살자, 님은 님같이 사랑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이내 사람들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갔습니다. 마태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눠주기 위해 인사하는 것이 자신을 이렇게도 기쁘게 한다는 사실에, 입 끝이 귀밑까지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오랜만에 훈훈함, 그리고 사랑이란 것에 대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차오르는 기쁨에 다시 한번 소리쳤습니다. “오늘은 내가 쏩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그리고 전승희의 ‘한방의 부르스’를 불렀습니다. ‘오늘밤은 내가 쏜다 더 멋진 내일을 그리며 사나이의 인생길은 한방의 예수님‘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에 충만하여 간증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잔치는 천국잔치와 같았습니다. 예수님도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오늘도 어김없이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식사하고 있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매우 못 마땅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마음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하고 예수님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죄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고 병이 났을 때는 무엇보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병든 자로 보십니다. 병든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병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도 열심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하는 등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의식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말씀(호 6:6절)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십니다. 긍휼이 없었을 때 그들은 죄인을 이해하기 보다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긍휼의 마음이 없을 때 사람을 이해하기 보다 정죄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긍휼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사 치료하시고 귀히 쓰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쓸모없게 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3년 동안 그와 동거동락하시며 병든 그의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세리 마태는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로 병든 죄인들이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소망이 없으나,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기심, 시기심, 의존심, 운명주의, 패배주의, 교만, 정욕 등 갖가지 죄악으로 병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고 크신 사랑으로 모든 내면의 병들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밉다치 않으시고, 바다 같이 깊고, 하늘 같이 넓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며 제자로 삼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Ⅱ.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초청을 받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때는 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금식할 때가 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울러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함도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게 되고, 병든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옛 것을 고수하고 새 역사를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옛 것에 얽매여 하나님의 새 역사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규례를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지 않고 매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근엄하고 엄숙해야 되는데 제자들은 경건치 못하게 항상 히죽히죽 웃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신랑이요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부로 비유합니다(고후11:2). 신앙생활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인 심각하고 근엄하고 구태의연한 생활이 아닙니다. 금욕적인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옛 것과 새 것이 합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둘다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새 포도주는 효소의 발효력이 왕성하기 때문에 헌 부대는 터지고 새 부대에 넣어야만 둘이 다 보전될 수 있습니다(16,17). 여기서 새 포도주에서 '새'는 헬라어로 '네오스'로서 원칙적으로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부대에서 '새'는 '카이노스'로서 시간을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사해주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아무리 시대가 변화되어도 결코 변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부대는 시간이 감에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듯이 우리 인간은 부패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끊임없이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날로 변화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소망을 두시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으로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과 소망과 은혜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매만지시는 영원한 의원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악된 본성의 낡은 가죽 부대를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담는 새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 흘러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 렐 루 야 !! 아 멘
말씀 : 마태복음 9:9-17
요절 :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저는 요즘 메스컴을 통해서, 여러 부류의 형사적인 죄인들을 보게됩니다. 피서지 유흥비 마련을 위한 절도와 강도, 세상이 싫다며 관공서에 난입한 뭇지마 살인 등등. 외형적인 죄는 이렇게 드러나고 법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지은 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 탁구 레슨을 받고 땀이 뒤범벅이 된 체 버스를 탔는데 뒷자석에 앉은 어린 녀석이 ‘엄마 냄새나, 에이”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저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이고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부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허바울‘, ’이효연‘, ’김비젼‘, 심마태‘. .........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을 끌어 않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심령으로 영접하는 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마태야, 나를 따르라(9-13)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허물과 아픔, 죄 까지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시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가버나움은 아름다운 도시로서, 북쪽 시리아와 남쪽 이집트를 이어주는 국제 도로가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마다 하이패스나 통행권을 끊어야 되는 것 처럼, 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선 세관에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으므로 세관 수입은 모두 로마제국 유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금징수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촛불시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교활하게도 일정 시험을 패스한, 일정 자격을 갖춘 이스라엘 사람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였습니다. 식민지로서 고달프고, 서럽고, 슬픈 민족적 아픔을 함께 나누기 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였습니다. 징수 금액의 일정액은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갖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백성들 수입의 30% 이상을 세금으로 착취해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법정 증인으로 설 자격조차 주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혼혈족인 사마리아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남자는 사마리아 여자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여자는 사마리아 멍멍이를 멸시하였고, 사마리아 멍멍이는 세리를 멸시하였다.’
이토록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리의 자리에 바로 마태가 앉아있었습니다. 세리가 될 정도의 사람이므로 그는 똑똑하였습니다. ‘동족의 배신자요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는 사실도 역시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 길을 택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인생목적과 가치관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목적과 가치관은 바로 돈∼돈 돈이었습니다. 자신만이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여러 속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 뿐인 여동생이 ‘세금 철패’ 피켓을 들고 촛불시위 도중 척추를 다쳐, 돈 문제로 불구가 되버린 쓰라린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그들을 보다가 어머니가 홧병으로 위장암에 걸렸고, 돈이 없어서 돌아가시게 했던 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동생을 위해서, 어머니를 위해서 돈 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불끈 두 주먹을 쥐고 소리쳤습니다. “웬수 같은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거야!”
그는 공부하여 세리고시에 당당히 합격하였고 원하던 세금 징수원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직권을 이용하여 몰수이 재산을 축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승진도, 행복도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매국노라 손가락질 해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눈물 흘리며 “아버지 때문에 친구가 없어요! 차라리 노가다를 하세요. 엉..엉” 하고 울어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세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돈은 모았지만, 주위엔 사람이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돈이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놈의 돈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쉽사리 누구에게 말도 걸지 못했습니다. 돈 때문에 세상에서, 아니,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그리고 이곳 가버나움에서,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매일 맛보며 살아갔습니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이곳 저곳에 암덩이처럼, 깊은 멍이 들어갔습니다. 돈 때문에 받는 상처가, 마음을 찢어 놓는 상처였기에,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을 도저히 닦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돈 때문에, 마음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을 끝없이 고립시켜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레위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버태, 돈을 위해 나라를 버린 마태”, “피눈태, 피도 눈물도 없는 마태”, “돈갈태, 돈을 갈취해 가는 도둑 마태” 이렇게 숙덕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눈초리에 그도 이골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쓰디쓰게 아려오는 아픔을, 자신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누가 찾아왔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에게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이봐 세리, 오늘도 착취해?” 라고 말할 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 한마디에 마태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깊은 사랑이 있음도 알았습니다. 심령에서 뜻뜻한 그 무엇이 서서히 올라왔습니다. 외로움과 아픈 상처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려고도, 가까이 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매국노인 자신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사람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게 앉아 있는 마태의 내면을 보시고, 그의 아픔과 슬픔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산등성이 아버지처럼,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보듬어 안고자 손짓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돈에 종된 더러운 속물이며,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라고 하는 소중하고 귀한 한 인격체로 바라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를 상종치 않기 보다, 오히려 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세리 마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삶이, 모든 시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고독과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가 받는 멸시와 천대를 아셨습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얼마나 물질적이며,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얼마나 거짓되며, 얼마나 세상 물에 찌든 사람인가를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감당해 주시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시므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이십니다. 이 사랑의 주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이런 마태의 모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세리 마태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세리 마태는 돈을 좇아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동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타락한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마태는 능력은 많으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삶의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돈과 권력을 좇는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가, 장차 성 마태로 변화될 것을 바라보시며, 소망 중에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이기적인 세리 마태가 장차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될 것을 소망하며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금 장부나 뒤적이던 그가, 마태복음의 저자요, 가장 아름다운 산상수훈을 기록한,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소망 가운데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소망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변화시키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일어나 따랐습니다. 사실 세리직은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장래가 보장된 직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렵게 구한 직장, 천직이라 여겼던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한마디 말씀이, 그의 귀를 통하여, 심장을 통하여, 전신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멸시로 억눌리고 응어리졌던 가슴이 일시에 뚫렸습니다. 그는 저미는 가슴을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철저히 버림 받고, 멸시 당할 수 밖에 없는, 악명 높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던 자신에게 소망을 두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는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소망과 부르심의 은혜를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 마태의 구체적인 변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마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모인 자리가 엄청 어색하겠죠? “아...저...안..안녕하십니까? 저..마...마태라고...합니다” 어색하게 인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태에게 음료를 들고 건배를 제의했습니다. 세리 마태는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치어스! 마태는 ‘예수님’ 뜻도 풀이 하였습니다. “예는 예쁘게 살자, 수는 수수하게 살자, 님은 님같이 사랑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이내 사람들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갔습니다. 마태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눠주기 위해 인사하는 것이 자신을 이렇게도 기쁘게 한다는 사실에, 입 끝이 귀밑까지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오랜만에 훈훈함, 그리고 사랑이란 것에 대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차오르는 기쁨에 다시 한번 소리쳤습니다. “오늘은 내가 쏩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그리고 전승희의 ‘한방의 부르스’를 불렀습니다. ‘오늘밤은 내가 쏜다 더 멋진 내일을 그리며 사나이의 인생길은 한방의 예수님‘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에 충만하여 간증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잔치는 천국잔치와 같았습니다. 예수님도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오늘도 어김없이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식사하고 있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매우 못 마땅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마음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하고 예수님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죄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고 병이 났을 때는 무엇보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병든 자로 보십니다. 병든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병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도 열심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하는 등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의식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말씀(호 6:6절)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십니다. 긍휼이 없었을 때 그들은 죄인을 이해하기 보다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긍휼의 마음이 없을 때 사람을 이해하기 보다 정죄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긍휼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사 치료하시고 귀히 쓰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쓸모없게 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3년 동안 그와 동거동락하시며 병든 그의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세리 마태는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로 병든 죄인들이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소망이 없으나,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기심, 시기심, 의존심, 운명주의, 패배주의, 교만, 정욕 등 갖가지 죄악으로 병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고 크신 사랑으로 모든 내면의 병들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밉다치 않으시고, 바다 같이 깊고, 하늘 같이 넓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며 제자로 삼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Ⅱ.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초청을 받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때는 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금식할 때가 있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울러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함도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게 되고, 병든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옛 것을 고수하고 새 역사를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옛 것에 얽매여 하나님의 새 역사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규례를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지 않고 매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근엄하고 엄숙해야 되는데 제자들은 경건치 못하게 항상 히죽히죽 웃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신랑이요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부로 비유합니다(고후11:2). 신앙생활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인 심각하고 근엄하고 구태의연한 생활이 아닙니다. 금욕적인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옛 것과 새 것이 합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둘다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새 포도주는 효소의 발효력이 왕성하기 때문에 헌 부대는 터지고 새 부대에 넣어야만 둘이 다 보전될 수 있습니다(16,17). 여기서 새 포도주에서 '새'는 헬라어로 '네오스'로서 원칙적으로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부대에서 '새'는 '카이노스'로서 시간을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사해주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아무리 시대가 변화되어도 결코 변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부대는 시간이 감에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듯이 우리 인간은 부패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끊임없이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날로 변화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소망을 두시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으로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과 소망과 은혜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매만지시는 영원한 의원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악된 본성의 낡은 가죽 부대를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담는 새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 흘러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 렐 루 야 !!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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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회 다운로드 | DATE : 2008-07-27 14: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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