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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7강(9:1-8) 죄를 사하는 권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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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99회 작성일 08-07-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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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마태복음 제 17 강                                                               
말씀 마태복음 9:1-8
요절 마태복음 9:6

죄를 사하는 권능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일어나 걷게 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자연계를 다스리시고 영적인 세계도 주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특히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는 개인으로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영향을 그 주변에 미치게 됩니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 중에서 죄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 시간 모든 인간을 괴롭히는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죄를 사하는 권능자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5) : 예수님께서 갈릴리 동쪽 해변 가다라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자기 도시’ 곧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수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 편두통이 심한데요. 좀 봐 주세요.저는 너무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예수님 제 허리 좀.” 이렇게 사람들이 집 앞에 빽빽이 모여들어서 집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지붕을 뚫고 그 침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무례하다거나 염치가 없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근거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뜻밖의 선포를 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 “작은 자”란 헬라어로 ‘테크논’으로서 “아들아”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듯이 따뜻하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매우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말씀 역사를 방해하였고, 또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같아 두려웠습니다.

두려워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치유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의외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요 9:2). 중풍으로 고생하던 이 사람도 병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죄란 것을 아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이 말씀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병을 얻기 전에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얻고 누워서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누워서 불평과 원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은 무엇이든지 남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밖에 해소할 길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가족들, 친구들의 섬김으로 인해서 감사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는 항상 불평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헛생각에 빠져서 살 때가 많았습니다. 자신이 군대를 호령하기도 하고, 월드컵에 나가서 골을 넣고 환호하기도 하고, 독도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 사람들을 혼내주기도 하면서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신하고 소망을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전도 없었습니다. 중풍병은 다른 병과 달리 빨리 죽지 않습니다. 그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섬김을 받았습니다. 중풍병자는 사랑과 섬김과 주목을 받다보니까 병을 즐긴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뇌혈관이 터져서 중풍병을 앓기도 하지만 죄를 많이 짓다보면 자의식이 무너져서 무기력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 청년들이 직장을 찾다가 계속해서 실패하면 포기하고 백수로 삽니다. 사람이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소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데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할 양을 얻지 못해서 전도를 잠시 포기한 목자들도 있습니다. 일대일을 하다가 제자로 세우는데 실패하여 양치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고 있는 목자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의욕도 없습니다.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현실적인 만족을 누리면서 하루 하루 재미를 느끼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전도하지 않고 일대일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상실하고 신앙에 대해 회의하면서 형식만 남은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죽은 것 같은 늙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들 이삭을 주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생명 구원 역사,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3).”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죄사함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막 2:7).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곧 자신이 신적 권위를 가진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까지도 알아보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배척하고 그를 통해서 이루시는 죄사함의 역사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신 구원 역사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기보다 사람의 죄를 보고 판단하고 있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형제 안에 이루고 계시는 구원을 보고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동참해야 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죄사함의 역사를 보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마땅한데 판단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자기 의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생각을 바꾸어 주고자 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진정한 의미에서 사죄의 선언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쉽습니다. 결과를 생각한다면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이 결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판단을 아시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을 먼저 하셨습니다. 시냇물이 흙탕물이 되었을 때 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근원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근원이 깨끗해지지 않고 중간에서 아무리 힘을 써도 물이 깨끗해 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돈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학문으로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도 안 됩니다. 윤리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심리학으로 죄를 합리할 수는 있지만 사함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선행을 한다고 죄가 상쇄되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일이지만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인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을 때 일생 동안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날 가인의 후예들이 많습니다. 죄로 인해서 그 일생에 환난이 많고 곤고하고 피곤합니다. 죄를 지은 양심은 두렵고 의기소침하고 도피하고 불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희소식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둘째,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6-8) :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으십니다. 이를 사람들로 알게 하기 위해서 분명한 증거를 대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질병을 죄의 결과로 간주하던 그들에게 질병이 치유된 것은 마땅히 죄가 용서되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는 죽어야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은 죄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든지 사할 수 있는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해주시면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는 최종적인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유월절에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희생되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제사 제도에서 속죄제는 죄지은 사람이 어린 양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어린 양의 피를 흘려 단에 뿌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죄가 전가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이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에서 깨끗하게 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소감을 통해서 서로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5,1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발표할 때 죄 고백을 합니다. 이런 죄의 고백은 놀라운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나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에서 해방됩니다.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죄로 인한 자기비하, 의기소침, 왜곡된 자아상, 열등감, 파괴된 관계 등등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4-26).”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를 고백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죄 사함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우리가 빚을 갚으면 빚이 없어지듯이 죄는 사함 받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그러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복 받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보다 근원적인 것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사함 받을 때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죄 문제를 간과하고 현실 문제 해결에 매달리는 것은 마치 문둥병자의 상처를 치료하지는 않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과 회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면 투쟁에 더욱 힘을 써야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온전히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 배 가득히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회개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도 어려움에 처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를 안고 입을 맞추고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실 때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판단하고자 하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감당하고자 하면 부드러워집니다. 사람의 모자를 벗기기 위해서 바람을 강하게 불수록 더욱 모자를 움켜쥐지만 따뜻한 햇볕을 강하게 비추자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는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죄사함을 받았는데 계속해서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소감을 쓰기가 싫습니다. 소감에서 결단을 했는데 지키지는 못하고 문제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예 소감을 쓰지 않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콩나물을 키우듯이 물을 계속해서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물이 내 영혼에 흘러내리게 해야 합니다. 생명이 자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고 깨고 하는 가운데 자라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내 안에 점진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는 뿌리가 깊습니다. 회개했는데도 문제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점진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우리는 일생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선함이 가득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고질적인 죄 문제는 일생을 걸쳐서 치유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몰입을 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진정한 승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승리가 있지만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권능을 보고 놀랐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권위 있는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예수님의 권위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죄의 선언에 나타난 신적 권위와 그 권위를 입증하는 치유의 기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능이 있으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이 땅에서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음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힘 있게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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