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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6강(8:23-34) 아주 잔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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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62회 작성일 08-07-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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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6 강                                                               
말씀 마태복음 8:23-34
요절 마태복음 8:26

아주 잔잔하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과 치유사역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영적인 세계까지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귀신들려 사나운 청년들도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힘든 세상에서 인생의 항해를 하다보면 늘 불안하고 마음이 사나와집니다. 말과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현재 직면한 광풍들을 잔잔하게 하시고 사나와진 마음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위기를 기회로 만드신 예수님(23-27) : 예수님은 안식일에 백부장의 장모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가서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게 된 제자들은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굳어진 근육을 풀면서 서서히 노를 저어 나아갔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호수 위를 배 위에 앉아서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은 한 편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지만 이런 때를 틈 타 시원한 바람을 맞으시며 배 뒤편에서 곤히 잠이 드셨습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배 뒤편에서 고이 잠이 드신 예수님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워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206미터 낮고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오면서 큰 바람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때 6미터 높이의 파도까지 일어난다고 합니다. 지금 큰 놀이 일어났다는 말은 바다가 밑바닥부터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광풍은 예고 없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줍니다.

제자들 중에는 베테랑 어부들이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풍랑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도 매우 놀랄 정도로 규모가 큰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어부인 제자들이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큰 풍랑 앞에서 제자들의 노련한 경험도, 바다에 대한 전문 지식도, 그들의 젊음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부였지만 목수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깨우며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이는 제자들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파도 속에서 살아남는 길을 예수님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제 초기에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예수님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자신들과 예수님이 이렇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다급하게 깨웠습니다. 한편 그들의 요청 속에는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기까지 주무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제까지 보았던 기적이나 예수님의 능력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파도만이 크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일어나시자 먼저 제자들을 위로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깊이 잠을 잤구나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이제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보았던 이적들을 생각하고 이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으니 결코 죽지 않으리라 믿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며 찬송을 하면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더 좋았다면 예수님처럼 잠을 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요청할 때 짜증을 내면서 구하면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왜 짜증을 냅니까? 부모님을 믿고 감사함으로 구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밤에 감사와 찬송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리고 옥 터가 흔들려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바다의 상황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기를 당하여 경제적인 파산을 받을 때,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잘릴 때, 승진에서 누락이 될 때, 가족이나 자신이 암 선고를 받을 때, 쉽게 치료되지 않는 병이 들 때, 교통사고로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아이들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길 때 등등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화를 낼 때 매우 무섭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님들 같은 경우는 살찌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목자들에게는 양이 성경 공부를 그만 하겠다고 말할 때 마음이 매우 어렵습니다. 때로 공동체에 광풍이 불어 닥치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 선교사들이 탈레반에 납치되었을 때 전 국민과 교회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데도 이런 광풍들이 생깁니다. 광풍은 신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때도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데도 광풍이 따라옵니다. 위기와 위험은 항상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결코 완전하게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하고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위기 앞에서 먼저 제자들의 마음에 믿음과 평화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신 후에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를 아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게 되었습니까? 광풍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이 떠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까지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광풍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을 겪게 되면 사람이 배짱이 생깁니다. 고난을 이기고 나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 삼 천명을 회개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자 헤롯왕은 야고보를 잡아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다음 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감옥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깨우는데 곤히 자느라 일어나지 않자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행12:7). 그렇게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제자들은 평화롭고 담대하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였습니다.

  셋째로, 광풍을 통해서 마음이 겸손하게 됩니다. 로마서 5:3,4절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광풍을 거치면서 우리의 마음은 순수하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위기란 위험한 기회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놀이 공원에서 바이킹이나 블랙홀, 청룡열차, 허리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놀이기구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에 짜릿한 맛을 즐깁니다. 여름에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 곤히 주무시면서 파도타기를 즐기셨습니다.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결코 빠져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한편 우리가 쓰는 우스개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바람과 파도가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목수이신 예수님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에서 매우 무서워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앞으로 닥칠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기 때문에 곤히 잠을 잤습니다. 한마디로 무지한 담력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위기는 대비해야 합니다. 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우리의 믿음과 훈련을 하나님이 쓰시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천배의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과 지성을 지렛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위기에 대비하여 준비된 사람, 믿음이 온전한 자는 진정한 담력을 가집니다. 믿음이 적을 때 무서움은 따라옵니다. 실로 문제는 밖에서 오는 풍랑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풍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자기의 생명을 예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으면 위기의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고 그들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간증들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한 목자님은 자녀가 학교에서 싸움을 하다가 눈이 안 보인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통해서 가해자 부모로부터 치료비를 받아서 생활비로 쓰고 그 자녀도 어떤 치료도 받지 않았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직장을 수없이 옮겼습니다. 저희들은 이 분이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하면 이제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근심어린 말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믿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다른 직장을 찾으면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쉽게 새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르스 올슨(Bruce Olso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미네소타에 사는 19살의 대학생이었을 때 어느 선교단체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자 오직 믿음으로 남미에 갔습니다. 그리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모틸론(Motilone)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남미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쓰셔서 구석기 시대의 삶을 사는 원주민들을 복음화 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나운 귀신들린 자를 구원하신 예수님(28-34) : 예수님 일행이 광풍을 뚫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젖은 몸을 따뜻한 곳에서 말리면서 쉼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에 사로잡혀 광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납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마음대로 조종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납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속성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요8:44). 귀신은 한 인격을 파괴합니다. 정신을 파괴하고, 삶을 파괴합니다. 귀신의 이런 파괴적인 속성 때문에 이기적이고 속이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입니다. 딤후 3:3절에서는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사나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는 갈수록 폭력적이고 엽기적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무덤은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는 죽음을 동경했습니다. 아마 그가 현대에 살고 있다면 자살 사이트를 드나들며 죽는 방법을 연구하고 함께 죽고자 의논하고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도와주고 자신도 시도했을 것입니다. 자살은 절망의 표현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도피처로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오신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달려 나왔습니다.

그의 첫 인사가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은 자기들이 멸망할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자기들의 심판의 때가 앞당겨 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이가 어떤 사람인가 의아해 했는데 귀신은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서도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을 가만해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제발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귀신들은 사람에게서 쫓겨날 형편이 되니 짐승에게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마귀가 육체 밖에서 산다는 것은 큰 고문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강한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남의 소유에 손해를 끼치게 한 것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마귀가 그 사람에게서 떠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가치가 많은 돼지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생명 대신에 돼지 2천 마리를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는 시가로 10억원정도 된다고 합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희생이라도 치루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목자의 삶은 바로 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젊음을 드리는 삶입니다. 저희가 이번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이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온 시내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돼지 떼가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을 보고 내돈, 내돈(豚), 내돈(豚)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사실 두 사람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와 구원 역사로 인해서 잔치를 벌여야 마땅했습니다. 또한 지금 그들은 기적과 치유의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돼지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예수님께 그곳에서 떠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에 눈이 가려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돈보다 더 귀한 선물이 구원이고 구원을 가져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다시 왔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기적을 봤다고 해서 영적인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광풍인 파도와 사나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계와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 앞에서 무서워하기보다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평강을 누려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이런 구원역사를 행하심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원 역사를 위해서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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