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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5강(8:14-22) 먼저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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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87회 작성일 08-07-0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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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5 강                                                               
말씀 마태복음 8:14-22
요절 마태복음 8:22

먼저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과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나아온 귀신들린 자들과 많은 병자들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치료되고 밝고 건강한 삶, 에너지가 넘쳐서 맡겨주신 사명을 확실하게 끝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14-17) :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가버나움 지방은 요단강 근처 습지대이기 때문에 모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모기에 물려서 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으로 누워있는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 손을 만지셨다는 것은 치료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 분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완전하게, 즉시로 나타났습니다. 보통 열병을 앓다가 일어난 사람들은 연약하여 기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는 언제 열병을 앓았었느냐는 듯이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습니다. 아마 장모 국수나 매운탕으로 요리를 해서 즐겁게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안에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밝은 웃음과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장모 국시 한 사발 더 주세요.” 라며 맛있게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치유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표현합니다. 치유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을 찾아 돌보신 긍휼이 풍성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날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저물었다는 것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각종 질병과 귀신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잠잘 시간인데 잠 잘 생각을 제쳐두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쉼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깊은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창조의 권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고치지 못할 병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써서 발표할 때 많은 내면의 병들이 치유가 됩니다.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고, 자신이 이해받고 있음을 발견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소감을 쓰는 가운데 자기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자아 존중감이 생기고 형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생깁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병자들이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다 고치셨을 때 도깨비 방망이 같이 쉽게 쉽게 뚝딱 해버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 마태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은 무시하고 짓밟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연약함을 이해하기보다 “그것도 못해!”라며 나무라기 쉽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에서도 나타납니다. 육체가 연약한 사람은 면역 체계가 약해서 쉽게 병에 걸립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서 누워서 쉬어야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은 잔병치레가 많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무슨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로 끝납니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인격적인 성숙이 더딥니다. 정욕에 쉽게 넘어지고 쉽게 분노하고 조급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근심과 염려에 시달립니다. 여러분이 치유 받아야 할 연약함은 무엇입니까? 문제가 생기면 원망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히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인 관계가 약합니다. 두려움에 쉽게 잡힙니다.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합니다. 마음이 산만하여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근본적으로 연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아이들이 병들면 어머니는 밤새도록 간호를 합니다. 아이를 업고 병원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때마다 약을 먹이고 수발드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목자가 연약한 양의 죄 문제를 담당하려면 마음 고생이 많습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 한번 하기 위해서 수없이 전화를 하고, 약속 시간에 늦으면 기다려 주어야 하고, 섬겨야 할 일들이 많다보니 마음 고생이 많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죄 문제를 감당하기 위해서 수없이 인내하면서 속앓이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이 연약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연약함을 담당해주셨습니다.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담당하기 위해서 자신이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과 비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목적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가 먼저 연약함을 치유 받고 건강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과 연약한 사람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져다줍니다. 이런 기초 위에 마음을 강하게 먹고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예배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습니다. 우리가 사십일 새벽 기도를 통해서 종합적인 경건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훈련을 하되 이것만 강조하면 율법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훈련과 은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은혜 속에서 살던 분들은 스스로 훈련소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방학 기간 동안 경건 훈련을 하여 이 세상과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극복하고 힘 있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일인 사역, 오역을 능히 감당해 내기를 바랍니다.
 
둘째, 너는 나를 따르라(18-22) : 예수님은 무리들을 떠나 가버나움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서 제자들을 섬기며 오붓한 시간을 갖기 원했습니다. 이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당시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규례를 만드는 서기관은 존경받는 위치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볼 때 율법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만큼 높아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성급하게 결단을 했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자기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상에 충만한 이 서기관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은 항상 은혜롭고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대하는 이상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집이 없었습니다. 교통수단인 나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댈 만한 자기 소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은 안정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그 주위는 항상 시끌벅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무리들을 말씀을 가르치시고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 가족들은 그를 미쳤다고 데리러 오기도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고 신성을 모독한다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서기관은 목자 생활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상만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그 동기가 무엇인가 살펴야 합니다. 인간적인 환상이나 세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에 갈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고 은혜가 넘칠 때는 괜찮지만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내면투쟁의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매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자기의 내면을 살피고 죄성을 부인하는 내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자기포기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컴퓨터 게임입니까? 자동차입니까? 집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집착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번데기의 기간을 거쳐야 하고 좁은 구멍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자기의 세계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독수리는 자라난 부리를 갈기 위해서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 고난이 힘들어서 피하게 되면 독수리의 생명은 거기서 끝납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고후 8:9).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그 내면이 황폐하고 병든 우리를 부요하고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8-11)”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장사하는 것은 마지막 효도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제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알만큼 알고 배울만큼 배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말이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봉양을 하고 그가 돌아가신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먼저 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서기관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앞에서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고, 뒤의 죽은 자들은 실제로 죽은 자, 즉 그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에게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 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즉시 믿음의 영웅답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효자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장래를 생각하시며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가족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3-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족들을 맞이하고 섬기는 일보다 우선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먼저 감당하셨습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목자님들은 직장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말씀 공부는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세상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 공부에 늦거나 참여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 습관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헌신을 해야 합니다.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희생과 박해가 따릅니다. 그런 것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왕하 4:29).

본문에 나오는 제자 중 하나는 가정 일과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었지만 동시에 결단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바른 선택의 문제는 매일 매일 부딪치게 됩니다. 앞서 나온 서기관이 너무나 성급해서 문제였다면 이 제자는 결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심사숙고해야 하지만 결단을 해야 할 때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결단이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과 계획이 있어도 결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정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친구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따름으로 사람들에게 광신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평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잠시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모든 크리스천이 장례를 치루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기 때문에 대답을 하시면서 그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신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를 시험한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그가 정말 수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신청자에게 3일 동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일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주님의 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직장에서 고위직에 있는 어떤 목자님은 점심시간을 희생하여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를 하고 양을 쳤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목자로서 살고자 할 때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 각자가 캠퍼스 양을 얻어서 제자로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대일 양이 없어서 매주 ‘0’팀으로 기록되는 목자들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라도 성경을 공부시켜 주시고 반드시 한 팀 이상 일대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양이기 때문에 매주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가운데 양육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각자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는 주님과 목자님들께 감사를 드립시다. 동시에 개인적인 연약함에 종노릇하지 말고 경건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연약함을 치유 받고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지만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먼저 시간을 드리고자 결단하고 투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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