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4강(8:1-13) 믿은 대로 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8 마태복음 제 14 강
말씀 마태복음 8:1-13
요절 마태복음 8:13
믿은 대로 되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니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4:23). 5-7장까지가 바로 그의 가르치심에 대한 내용이고 8-9장이 고치심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온 몸에 진물이 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사건과 로마군의 하인으로서 중풍에 걸린 자를 말씀으로 일으킨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랑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이런 역사들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 :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 당시의 나병은 오늘날 에이즈와 같이 후천성이고 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를 시키고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로 간주했습니다. 나병은 피부가 썩고 연골까지도 파괴하여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갔습니다. 저는 아토피 피부병이 심하게 들린 한 형제를 그의 목자님과 함께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여름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빨갛게 된 몸을 손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습니다. 그 답답함으로 인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가려움이 극에 달하여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낮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별로 없자 그는 약을 타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저의 마음도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온 몸에 진물이 흐르는 나병 환자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이 말 속에 그의 한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제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왜 나만 가지고 이러십니까?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런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람들이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셨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보통 이런 지경이 되면 삶을 포기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소망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나의 고질병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인생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나를 위로해줄 사람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은 그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을 볼 때도 겸손하지만 그의 기도 내용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그의 자세를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로 충만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진물 나는 환부에 대셨습니다. 이 순간 나병환자는 몸을 움츠렸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이 그의 환부에 와 닿는 순간 그의 온 몸에는 전기가 짜르릇하고 흘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과 3미터 이상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대심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속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고 말고, 말해서 무엇하냐 …”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환영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피부가 좋은 꽃미남들 이상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4). 예수님은 그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회복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도 온전해 지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부정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은 죄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킵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이 도피하고자 합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또한 죄는 순수했던 인간의 마음을 더럽혔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짐승과 같이 본성대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귀와 같이 악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정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접촉을 금지한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의 부정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가 이 사람의 더러움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초월해서 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일 1: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모든 더러운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놀라운 죄사함과 치유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소감 모임이나 수양회에서 말씀을 받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던 죄를 고백할 때 깨끗하게 되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사랑해 주고 더욱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이는 목자님들도 같은 죄인으로서 그런 기쁨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얼굴도 깨끗해집니다. 밝고 환하게 변화됩니다. 닫히고 막혔던 모든 관계가 열리게 됩니다. 폐쇄적이었던 사람이 개방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다보면 날마다 손과 발과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이기심의 죄, 사랑이 없는 죄, 나의 더러운 음란의 죄, 연애 감정의 죄, 안목의 정욕, 섬김만 받고자 하는 거지 근성의 죄, 하늘을 찌르는 교만의 죄,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말을 하는 죄를 다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를 고백함으로 날마다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더러운 죄를 씻음 받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끗함으로 인해서 자신감이 넘치고 담대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임이 건강한 공동체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5-13)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둔 로마군 장교입니다. 누가복음 7:5절에 의하면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하인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리해야 하는 유대인들도 사랑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볼 때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6).”라며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보통 하인은 당시에 말하는 당나귀와 같이 물건 취급을 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시대에 그는 장교로서 하인을 사랑하고 돌보는 인격을 갖춘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하인의 고통을 동정했습니다. 그는 인간 기초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사려 깊고 교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로마 장교를 보고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백부장은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나서 그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보다 더 높으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로서 교만하게 예수님께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도 그를 부정하게 하니 안 되고 하인이 중풍으로 다 죽어가니 데려오기도 힘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사 자기 하인을 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생활을 통해서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가 명령만 내리면 부하들을 통해서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부대 공격 앞으로! 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상관이 명령을 내리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웨스트포인트 리더십에 보면 생도들은 상급생이나 교관으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네 가지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상급생 하나가 생도를 보고 “이봐, 자네 그것도 혁대 버클을 닦은 거라고 생각하나?”하고 물었다면, 당연히 신참은 그렇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싶을 것입니다. “옛, 집합 도중 우연히 다른 신참과 부딪쳤기 때문입니다.”와 같은 설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고 계속해서 상급생이 왜 안 닦았느냐고 물으면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생도들은 부당함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경청과 복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군대생활을 통해서 권위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보통 권위는 전통이나 전문지식, 연륜 등에서 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인격에서 나옵니다. 특히 진리와 사랑하는 인격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세우시고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권세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죄인들을 낮추시고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위로 일하십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7: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그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말로써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를 몰 때 워워, 이랴 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언어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합니다. 말씀이 혼잡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이 분명하고 명료하면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말씀으로 힘을 얻고 능력을 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감사의 말, 긍정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의 믿음이 말을 통해서 표현되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영어로는 “such great faith”라고 했습니다. “이런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의 위대한 믿음과 인격이 말을 통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부여자요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 입니까?
첫째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중풍병은 뇌의 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병입니다. 뇌의 혈관이 막히면 뇌 조직이 죽기 때문에 손과 발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이 나으려면 죽은 뇌 조직이 살아나야 합니다. 중풍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부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피부도 살리시고 죽은 장기도 살리시고 죽은 세포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이십니다. 근육은 움직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양식과 같고 전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동을 하면 모세혈관이 수없이 생깁니다. 모세 혈관이 생겨야 영양이 근육에 전달이 되고 힘이 생깁니다. 이를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영적인 운동인 전도를 할 때 영적인 근육이 생깁니다. 전도는 즐거운 복음 운동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믿음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시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이야말로 황제 이상의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다만 말씀만 하셔도 중풍 든 자기의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유대인보다 더 위대한 믿음을 가진 것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사역의 초기 단계에서 자신의 신분과 능력에 대해서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부장은 알려 주지 않은 믿음을 이미 알고 예수님을 크게 의지했습니다. 이는 군대 명령 계통과 권위를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믿었고 창조적으로 말씀의 권위를 병에까지 적용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그의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백부장은 본인의 문제가 아닌데, 하인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와 해결을 받았습니다. 9장에 보면 중풍병자 친구들이 자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귀신들린 딸을 둔 헬라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고 롯을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목자의 믿음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오기드온 목자님은 한 때 중풍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계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어엿한 가장으로서 능력있게 가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자 직장에서 한 동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만족하여 지내고 있다면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이 생기려면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위기의식과 기회와 능력, 시간을 낭비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기초한 믿음, 창조적인 믿음으로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말씀을 통해 양들이 거듭나도록 기도합시다.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기도합시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집시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세계 만민이 구원되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천국에 앉을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지금 세계에 20억의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힘차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범세계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백부장이 기대한 대로 그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진 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큰 믿음이 있으면 크게 축복해 주시고 작은 믿음이면 작은 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큰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십년 비전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꿈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으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겸손히 간구하는 가운데 더러운 죄에서 깨끗함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 때 행복이 있습니다. 건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백부장이 되어 내게 맡겨주신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누워 있는 양들을 말씀의 능력으로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8:1-13
요절 마태복음 8:13
믿은 대로 되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니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4:23). 5-7장까지가 바로 그의 가르치심에 대한 내용이고 8-9장이 고치심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온 몸에 진물이 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사건과 로마군의 하인으로서 중풍에 걸린 자를 말씀으로 일으킨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랑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이런 역사들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 :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 당시의 나병은 오늘날 에이즈와 같이 후천성이고 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를 시키고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로 간주했습니다. 나병은 피부가 썩고 연골까지도 파괴하여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갔습니다. 저는 아토피 피부병이 심하게 들린 한 형제를 그의 목자님과 함께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여름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빨갛게 된 몸을 손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습니다. 그 답답함으로 인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가려움이 극에 달하여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낮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별로 없자 그는 약을 타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저의 마음도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온 몸에 진물이 흐르는 나병 환자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이 말 속에 그의 한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제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왜 나만 가지고 이러십니까?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런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람들이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셨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보통 이런 지경이 되면 삶을 포기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소망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나의 고질병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인생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나를 위로해줄 사람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은 그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을 볼 때도 겸손하지만 그의 기도 내용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그의 자세를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로 충만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진물 나는 환부에 대셨습니다. 이 순간 나병환자는 몸을 움츠렸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이 그의 환부에 와 닿는 순간 그의 온 몸에는 전기가 짜르릇하고 흘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과 3미터 이상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대심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속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고 말고, 말해서 무엇하냐 …”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환영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피부가 좋은 꽃미남들 이상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4). 예수님은 그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회복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도 온전해 지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부정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은 죄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킵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이 도피하고자 합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또한 죄는 순수했던 인간의 마음을 더럽혔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짐승과 같이 본성대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귀와 같이 악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정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접촉을 금지한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의 부정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가 이 사람의 더러움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초월해서 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일 1: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모든 더러운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놀라운 죄사함과 치유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소감 모임이나 수양회에서 말씀을 받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던 죄를 고백할 때 깨끗하게 되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사랑해 주고 더욱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이는 목자님들도 같은 죄인으로서 그런 기쁨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얼굴도 깨끗해집니다. 밝고 환하게 변화됩니다. 닫히고 막혔던 모든 관계가 열리게 됩니다. 폐쇄적이었던 사람이 개방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다보면 날마다 손과 발과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이기심의 죄, 사랑이 없는 죄, 나의 더러운 음란의 죄, 연애 감정의 죄, 안목의 정욕, 섬김만 받고자 하는 거지 근성의 죄, 하늘을 찌르는 교만의 죄,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말을 하는 죄를 다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를 고백함으로 날마다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더러운 죄를 씻음 받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끗함으로 인해서 자신감이 넘치고 담대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임이 건강한 공동체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5-13)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둔 로마군 장교입니다. 누가복음 7:5절에 의하면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하인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리해야 하는 유대인들도 사랑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볼 때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6).”라며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보통 하인은 당시에 말하는 당나귀와 같이 물건 취급을 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시대에 그는 장교로서 하인을 사랑하고 돌보는 인격을 갖춘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하인의 고통을 동정했습니다. 그는 인간 기초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사려 깊고 교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로마 장교를 보고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백부장은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나서 그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보다 더 높으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로서 교만하게 예수님께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도 그를 부정하게 하니 안 되고 하인이 중풍으로 다 죽어가니 데려오기도 힘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사 자기 하인을 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생활을 통해서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가 명령만 내리면 부하들을 통해서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부대 공격 앞으로! 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상관이 명령을 내리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웨스트포인트 리더십에 보면 생도들은 상급생이나 교관으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네 가지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상급생 하나가 생도를 보고 “이봐, 자네 그것도 혁대 버클을 닦은 거라고 생각하나?”하고 물었다면, 당연히 신참은 그렇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싶을 것입니다. “옛, 집합 도중 우연히 다른 신참과 부딪쳤기 때문입니다.”와 같은 설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고 계속해서 상급생이 왜 안 닦았느냐고 물으면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생도들은 부당함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경청과 복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군대생활을 통해서 권위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보통 권위는 전통이나 전문지식, 연륜 등에서 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인격에서 나옵니다. 특히 진리와 사랑하는 인격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세우시고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권세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죄인들을 낮추시고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위로 일하십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7: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그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말로써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를 몰 때 워워, 이랴 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언어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합니다. 말씀이 혼잡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이 분명하고 명료하면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말씀으로 힘을 얻고 능력을 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감사의 말, 긍정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의 믿음이 말을 통해서 표현되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영어로는 “such great faith”라고 했습니다. “이런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의 위대한 믿음과 인격이 말을 통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부여자요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 입니까?
첫째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중풍병은 뇌의 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병입니다. 뇌의 혈관이 막히면 뇌 조직이 죽기 때문에 손과 발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이 나으려면 죽은 뇌 조직이 살아나야 합니다. 중풍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부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피부도 살리시고 죽은 장기도 살리시고 죽은 세포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이십니다. 근육은 움직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양식과 같고 전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동을 하면 모세혈관이 수없이 생깁니다. 모세 혈관이 생겨야 영양이 근육에 전달이 되고 힘이 생깁니다. 이를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영적인 운동인 전도를 할 때 영적인 근육이 생깁니다. 전도는 즐거운 복음 운동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믿음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시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이야말로 황제 이상의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다만 말씀만 하셔도 중풍 든 자기의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유대인보다 더 위대한 믿음을 가진 것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사역의 초기 단계에서 자신의 신분과 능력에 대해서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부장은 알려 주지 않은 믿음을 이미 알고 예수님을 크게 의지했습니다. 이는 군대 명령 계통과 권위를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믿었고 창조적으로 말씀의 권위를 병에까지 적용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그의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백부장은 본인의 문제가 아닌데, 하인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와 해결을 받았습니다. 9장에 보면 중풍병자 친구들이 자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귀신들린 딸을 둔 헬라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고 롯을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목자의 믿음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오기드온 목자님은 한 때 중풍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계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어엿한 가장으로서 능력있게 가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자 직장에서 한 동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만족하여 지내고 있다면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이 생기려면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위기의식과 기회와 능력, 시간을 낭비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기초한 믿음, 창조적인 믿음으로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말씀을 통해 양들이 거듭나도록 기도합시다.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기도합시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집시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세계 만민이 구원되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천국에 앉을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지금 세계에 20억의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힘차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범세계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백부장이 기대한 대로 그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진 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큰 믿음이 있으면 크게 축복해 주시고 작은 믿음이면 작은 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큰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십년 비전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꿈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으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겸손히 간구하는 가운데 더러운 죄에서 깨끗함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 때 행복이 있습니다. 건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백부장이 되어 내게 맡겨주신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누워 있는 양들을 말씀의 능력으로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8mt14.hwp (0byte)
68회 다운로드 | DATE : 2008-06-29 13:02: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