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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3강(7:13-29) 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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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361회 작성일 08-06-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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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마태복음 제 13 강                                                               
말씀 마태복음 7:13-29
요절 마태복음 7:24

듣고 행하는 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감을 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해야 합니다. 한 말씀이라도 행해야 기초가 든든해집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반석과 같은 가치관, 인생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이유를 네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두 문의 비유, 두 나무의 비유, 두 제자의 비유, 두 건축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조법을 사용하여 극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진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14) :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일반적으로 좁은 문은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좁고, 길이 협착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갈등을 거쳐야 하고 투쟁을 필요로 합니다. 

반대로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넓은 문은 자기의 감정대로 기분대로 살면 됩니다. 그 문은 가만히 있으면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떠밀러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애써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만 교회에 가고 나머지는 자기 욕심대로 살아도 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갈수록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좋은 믿음의 결과요 실패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람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들은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은 욕망의 금지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무한대로 자기의 욕망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매스 미디어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입니다. 그 길은 재미있어 보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멸망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이 길은 회개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제나 인내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넓은 문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듣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싶으면 화를 내고, 내가 싫은 사람과 결코 화해하지 않으며 안목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혼하고 헛된 맹세를 하고 보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구원의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외에 온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죽음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에 많은 종교들이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만 이 진리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아무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좁은 문은 산상수훈의 전체 교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가난, 질병, 환난으로 마음 고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굉장한 기적 속에서 백성들은 출애굽합니다. 그런데 기왕 그리하셨으면 가나안으로 훌쩍 옮겨놓으실 것이지 어째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신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정말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복지를 원합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기는 싫어합니다. 광야 40년,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섬세하신 지혜가 있습니다. 무릇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지불하는 수고와 희생과 고통에 정비례합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입니다. 좁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살아가고 다 넓은 길로 살아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고독한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이로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는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회개나 진실, 그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회개하려고 할 때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진실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신비로운 문입니다. 분명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유합니다. 끊어버릴 것은 끊어버리고,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리고, 부인할 것은 다 부인해 버렸기 때문에 단순합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자유한 문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문입니다. 성령의 길은 좁은 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을 길이요 제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길이요, 행복한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둘째, 좋은 나무, 못된 나무(15-20) :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결혼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인 지식이 따로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는 거짓 선지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고 결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잘못된 진리를 가르칩니다. 즉 내세를 부정하거나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과대 해석, 죄에 대한 과소평가, 상황 윤리를 수용합니다. 이를 통하여 그릇된 평안과 안전 의식을 심어 주어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거나 그 자체를 가볍게 여기도록 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양과 같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그들도 친절하고 구제에 힘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기초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자신들이 산상수훈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양떼들에게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 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나 교훈에서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의 열매는 그들의 가르침과 행동 모두를 말합니다. 원인 없이 결과란 있을 수 없고, 뿌리 없는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열매란 그들의 교훈과 그 가르침에 따른 행동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그럴싸한 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가시나무처럼 사람을 찌르고, 엉겅퀴처럼 사람을 쓰리게 합니다. 다원주의 또는 상대주의 철학의 씨가 되고 줄기가 되고 꽃을 피웠다 할 수 있는 니체, 미셸 푸코, 싸르트르 등이 에이즈 등의 성병에 걸려 고생했다거나 정신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셋째, 참 선지자, 거짓 선지자(21-23) :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앙 고백의 근본이 되지만 의미가 결여된 상태에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남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체 할지라도 주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대 강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죄악된 본성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데 이는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한 거짓 이적입니다(살후 2:9).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육체적인 이익을 도모합니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고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기 업적이나 외적인 과시 욕이 주가 되어 일을 하였으므로 그것은 전혀 가치 없는 일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열심과 수고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서구 교회사를 보면 믿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죄악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에 의한 마녀 사냥과 미국에서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 남미의 선교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죄악들을 저질렀는가를 볼 때 믿음을 잃기 쉽습니다. 예일대학의 위대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 박사는 교회사를 깊이 공부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선행 못지않게 악행을 보고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혼동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 거듭난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을 고백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던 그들이 자유주의신학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식의 전수는 빠르게 잘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레도 미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는 모라비안들의 집회에 참석하여 거듭남을 체험하고 큰 일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많은 성경 지식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고, 종교적인 열심이 우리에게 열매를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서 주님을 섬겨야 하지만 먼저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기 위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나는 역사가 있도록, 인격적으로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넷째, 지혜로운 건축자(24-29) :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건물을 지을 때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고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돈도 배나 더 들고 작업이 진척되는 것이 보이지 않아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지진이 나고 홍수가 나도 집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집이 견고한지 아닌지는 태풍이 불고 지진이 나고 홍수가 날 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빨리 지을 수 있습니다. 돈도 적게 듭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합니다.

집을 짓는 것도 안전하고 안락하게 살기 위함인데 사고로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이번에 중국 쓰촤성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7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 건물에 깔려 죽었습니다. 7000개의 학교가 무너졌습니다. 이는 건축자가 부실시공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하나 밖에 낳을 수 없는 중국에서 외동딸, 외아들의 시신 앞에 통곡을 하는 부모들은 건축업자들을 원망하며 정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발생하자 베이촨 현에서 30Km 떨어진 상자오 중학교는 멀쩡했습니다. 2323명의 재학생이 모두 무사했습니다.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달려온 학부모들이 강진의 참상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진앙지로부터 비슷한 거리에 있는 베이촨 중학교가 붕괴돼 1000명이 땅에 묻힌 것과 비교하면 기적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기적이 일어난 배경에는 예지핑 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12년 전 교장으로 부임한 직후 건물 보수공사를 시작했습니다. 학교 건물이 아무런 감독과 기준 없이 날림으로 지어졌음을 밝혀낸 뒤 끈질지게 교육 당국을 설득해서 5800만원이라는 거액의 보수비용을 받아내고 3년에 걸친 보수 공사를 손수 지휘하며 부실하기 짝이 없던 콘크리트 건물을 철근으로 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재난 대비 훈련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강진이 발생하자 학생들은 평소 연습한 대로 책상 밑으로 몸을 피한 뒤 신속하게 교실을 벗어나 농구장으로 대피했습니다. 전교생이 농구장으로 모이는 데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은 예 교장을 ‘천사 예교장’으로 부르며 칭송하고 있습니다. 쓰촨성의 학부모들은 앞을 다퉈 상자오 중학교로 아이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환난 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축복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 때는 예수님을 잘 믿고 순종하던 사람들이 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벌고 나면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꼭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회의하면서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손에 쥔 사람들의 결국을 조사해보면 돈이 없었을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인생관, 가치관이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환란의 때가 축복의 때나 흔들리지 않고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듣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들어야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어야 실행이 따릅니다. 듣고 깨닫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은 안일한 길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듣고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석이 없더라도 훌륭한 건물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단호한 자세로 실행해야 합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깨닫기는 잘 하지만 실행하는 데는 더딘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석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행함이 따를 때 믿음은 완전해 집니다(약2:26). 우리는 하루 하루 자신의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작업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대로 순종하면 견고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건축물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묵묵하게 한 말씀에 순종하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한다면 하나님께서 잘했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큰 업적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큰 일에만 충성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한 말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가, 즉 심판의 때를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심판의 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함으로 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때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역사가 없으면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무언가 화끈한 것들을 보여 주어서 사람들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삶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더디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그리고 받은바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 선한 열매가 가득한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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