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12강(7:1-12)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8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황금률입니다. 마태복음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황금률이라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이면서 성경 전체의 요약입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원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첫째,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생각해 봅시다.
첫째,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1-6) :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비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고 잔혹한 비판이나 사랑이 없는 비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뒤 좌우 상황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찬양 시간에 다른 사람은 다 일어나서 찬양을 하는데 앉아 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리를 다쳐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졸업식장에서 총장님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졸업생들이 두 손으로 깎듯이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런 버릇없는 학생을 봤나?” 그때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저 학생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한 손을 잃었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모르고 함부로 판단하다가 관계성을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여기서 티는 톱밥이나 작은 가시를 말하고 들보는 기둥이나 또는 두꺼운 널빤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작은 허물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큰 허물은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비판은 때로 살인과 같이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희망과 가능성과 장래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미술에 아주 재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악의적인 친구가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리느냐? 너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가능성을 접어버렸습니다. 반대로 칭찬은 사람을 살립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간과해 버립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찍어댑니다.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썬 그라스를 끼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현미경을 들이댑니다.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면 450배에서 900배까지 확대되어 보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모기 다리가 매우 흉측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허물은 크게 확대하여 보고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핑계를 댑니다. 우리가 남을 손가락질 할 때 검지는 남을 향하고 엄지손가락은 하늘로 향하고 세 손가락은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형제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자기중심적으로 자기기준으로 형제를 비판합니다.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도 비판을 잘 합니다. 열등감이나 시기심이 있는 사람도 상대방에게서 비판할 거리를 찾아서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시하고자 애를 씁니다. 의존심이 많은 사람도 비판적입니다. 비판에는 상대방에 대한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비판하는 곳에는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비판은 목자와 양 사이, 동역자들 사이, 그리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파괴시킵니다. 이렇게 비판에는 보이지 않는 사단의 영이 있고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본인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고 비판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독이 퍼집니다. 비판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불신을 품게 되고 교만해지게 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자기도 흡연자 이상으로 피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하는 죄를 단호히 잘라버리고 늘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에 힘쓰는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정으로 도와주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비판을 잘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입니다. 그 내면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고 긍휼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감당해주고자 합니다.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덮어주고자 하고 끝까지 섬깁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때로 비판하는 그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먼저 자기 눈 속에서 들보를 빼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다른 사람을 볼 수는 있지만 자기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듣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말씀을 들을 때 “아,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 주면 딱 좋겠다, 저 말씀은 저 사람에게 맞는 것 같아”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깊이 듣고 자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보화를 내가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허물을 보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깊이 묵상하는 과정,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와 관대함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성찰을 많이 한 다음 다른 사람을 도와야 제대로 돕고 그 도움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또 천국의 제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내 안에 그 허물이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세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자기를 점검하고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신도 그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실수를 예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내가 먼저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 낸 다음에야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형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모든 죄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남을 비판하지 않고 그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참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감당해 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잘 배워서 비판하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다우니에 있는 김이삭 선교사님은 탁월한 비판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검사로서 하루 종일 죄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일이 마음에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목자로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선교사로 가서 많은 사람들을 감당해 주는 사랑이 많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 주는 목자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은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분별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개나 돼지는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모독하는 자,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함부로 대하고 짓밟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해주는 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돕고자 하다가 그의 태도를 보고 진리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귀한 복음 진리를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7-11) :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저자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나서 기도에 대해서 썼을까요? 여기에는 남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돕다보면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의 악한 습관이나 죄악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죄악된 습관을 고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죄악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변화될 때까지, 깨닫기까지, 길을 찾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내가 돕고 사랑하는 그 사람이 거룩한 생각과 습관과 인격을 갖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것 같이 보여 낙심이 됩니다. 그러면 슬그머니 기도를 그만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찾을 때까지,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눅11:13). 우리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조각해 주십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고자 할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현재 양이 없다고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고 찾아야 합니다. 방학이 되어도 학생들은 계절 학기와 특강을 듣기 위해 학교를 옵니다. 기도하며 양들을 찾고 양들의 마음이 열리기까지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섬기며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를 이루어야하겠습니다. 한 평신도 목자님은 토요일에 종종 캠퍼스에 올라가 혼자 양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목자님들도 합심해서 전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7월부터 시작하여 40일 새벽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기도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어야겠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악한 자라도 더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압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면 창조적인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에 몰입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브닌나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때 누가 정실부인인지 따져보겠느냐고 말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그녀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도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는데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취한 줄로 알고 말했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엘리 제사장을 흉보지 않았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이끌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다윗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모함을 하고 일생 동안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존경하고 섬겼습니다.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1-12).” 사울은 다윗을 축복하고 물러갔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결국 기도함으로 악을 이기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셋째, 먼저 대접하라(12) :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는 이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가 궁전 벽에 황금으로 이 말씀을 새겨 넣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황금과 같이 귀하고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외국에서, 어디에서든지 이 말씀대로 살면 모든 인간관계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요약입니다.
랍비 힐렐에게 한 이방인이 와서 자기가 한 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기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힐렐은 “네가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고 나머지는 다 주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즉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씀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 타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들에게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한 만큼 타인도 자기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남을 대접하라는 말은 서로의 권리 주장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남을 대접하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타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를 배려하고 섬길 때 인간관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욕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김을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후배나 아랫사람들에게서 깎듯이 대우 받기를 원합니다. 예의 바른 말씨와 공손한 태도, 겸손한 순종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선배들에게나 뭇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죄인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례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무례히 행했던 것만 곱씹으면서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먼저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내가 남에게 먼저 해 주고자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고 나를 신뢰해 주고 나를 귀하게 여겨 주기를 원합니다. 나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만 이렇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도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먼저 존중하고, 내가 먼저 신뢰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겸손히 섬겨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가까이 할수록 그런 것이 더 잘 보일 수 있습니다. 이때 형제를 비판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서로 덮어주고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주고 감당해 주어야합니다. 티는 눈물을 흘리면서 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눈물로 기도해 주고 그가 이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가운데 티가 빠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므로 늘 문제가 많습니다. 서로의 죄로 때로 부딪치고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비판하고 불평하기보다 자기를 겸손히 돌아보고 회개에 힘쓰는 성숙한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때 이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이런 모임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고 감사하고 사랑을 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나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 모임이 생명이 살아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황금률입니다. 마태복음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황금률이라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이면서 성경 전체의 요약입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원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첫째,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생각해 봅시다.
첫째,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1-6) :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비판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고 잔혹한 비판이나 사랑이 없는 비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뒤 좌우 상황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찬양 시간에 다른 사람은 다 일어나서 찬양을 하는데 앉아 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리를 다쳐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졸업식장에서 총장님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졸업생들이 두 손으로 깎듯이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런 버릇없는 학생을 봤나?” 그때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저 학생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한 손을 잃었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모르고 함부로 판단하다가 관계성을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여기서 티는 톱밥이나 작은 가시를 말하고 들보는 기둥이나 또는 두꺼운 널빤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작은 허물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큰 허물은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비판은 때로 살인과 같이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희망과 가능성과 장래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미술에 아주 재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악의적인 친구가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리느냐? 너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가능성을 접어버렸습니다. 반대로 칭찬은 사람을 살립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간과해 버립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찍어댑니다.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썬 그라스를 끼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현미경을 들이댑니다.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면 450배에서 900배까지 확대되어 보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모기 다리가 매우 흉측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허물은 크게 확대하여 보고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핑계를 댑니다. 우리가 남을 손가락질 할 때 검지는 남을 향하고 엄지손가락은 하늘로 향하고 세 손가락은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형제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자기중심적으로 자기기준으로 형제를 비판합니다.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도 비판을 잘 합니다. 열등감이나 시기심이 있는 사람도 상대방에게서 비판할 거리를 찾아서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시하고자 애를 씁니다. 의존심이 많은 사람도 비판적입니다. 비판에는 상대방에 대한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비판하는 곳에는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비판은 목자와 양 사이, 동역자들 사이, 그리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파괴시킵니다. 이렇게 비판에는 보이지 않는 사단의 영이 있고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본인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고 비판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독이 퍼집니다. 비판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불신을 품게 되고 교만해지게 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자기도 흡연자 이상으로 피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하는 죄를 단호히 잘라버리고 늘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에 힘쓰는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정으로 도와주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비판을 잘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입니다. 그 내면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고 긍휼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감당해주고자 합니다.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덮어주고자 하고 끝까지 섬깁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때로 비판하는 그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먼저 자기 눈 속에서 들보를 빼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다른 사람을 볼 수는 있지만 자기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듣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말씀을 들을 때 “아,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 주면 딱 좋겠다, 저 말씀은 저 사람에게 맞는 것 같아”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깊이 듣고 자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보화를 내가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허물을 보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깊이 묵상하는 과정,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와 관대함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성찰을 많이 한 다음 다른 사람을 도와야 제대로 돕고 그 도움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또 천국의 제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내 안에 그 허물이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세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자기를 점검하고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신도 그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실수를 예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내가 먼저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 낸 다음에야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형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모든 죄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남을 비판하지 않고 그 허물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참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감당해 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잘 배워서 비판하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다우니에 있는 김이삭 선교사님은 탁월한 비판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검사로서 하루 종일 죄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일이 마음에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목자로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선교사로 가서 많은 사람들을 감당해 주는 사랑이 많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 주는 목자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은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분별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개나 돼지는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모독하는 자,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함부로 대하고 짓밟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해주는 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돕고자 하다가 그의 태도를 보고 진리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귀한 복음 진리를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7-11) :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저자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나서 기도에 대해서 썼을까요? 여기에는 남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돕다보면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의 악한 습관이나 죄악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죄악된 습관을 고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죄악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변화될 때까지, 깨닫기까지, 길을 찾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내가 돕고 사랑하는 그 사람이 거룩한 생각과 습관과 인격을 갖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것 같이 보여 낙심이 됩니다. 그러면 슬그머니 기도를 그만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찾을 때까지,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눅11:13). 우리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조각해 주십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고자 할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현재 양이 없다고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고 찾아야 합니다. 방학이 되어도 학생들은 계절 학기와 특강을 듣기 위해 학교를 옵니다. 기도하며 양들을 찾고 양들의 마음이 열리기까지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섬기며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를 이루어야하겠습니다. 한 평신도 목자님은 토요일에 종종 캠퍼스에 올라가 혼자 양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목자님들도 합심해서 전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7월부터 시작하여 40일 새벽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기도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어야겠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악한 자라도 더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압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면 창조적인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에 몰입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브닌나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때 누가 정실부인인지 따져보겠느냐고 말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그녀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도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는데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취한 줄로 알고 말했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엘리 제사장을 흉보지 않았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이끌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다윗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모함을 하고 일생 동안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존경하고 섬겼습니다.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1-12).” 사울은 다윗을 축복하고 물러갔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결국 기도함으로 악을 이기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셋째, 먼저 대접하라(12) :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는 이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가 궁전 벽에 황금으로 이 말씀을 새겨 넣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황금과 같이 귀하고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외국에서, 어디에서든지 이 말씀대로 살면 모든 인간관계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요약입니다.
랍비 힐렐에게 한 이방인이 와서 자기가 한 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기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힐렐은 “네가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고 나머지는 다 주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즉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씀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 타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들에게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한 만큼 타인도 자기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남을 대접하라는 말은 서로의 권리 주장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남을 대접하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타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를 배려하고 섬길 때 인간관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욕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김을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후배나 아랫사람들에게서 깎듯이 대우 받기를 원합니다. 예의 바른 말씨와 공손한 태도, 겸손한 순종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선배들에게나 뭇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죄인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례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무례히 행했던 것만 곱씹으면서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먼저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내가 남에게 먼저 해 주고자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고 나를 신뢰해 주고 나를 귀하게 여겨 주기를 원합니다. 나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만 이렇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도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먼저 존중하고, 내가 먼저 신뢰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겸손히 섬겨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가까이 할수록 그런 것이 더 잘 보일 수 있습니다. 이때 형제를 비판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서로 덮어주고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주고 감당해 주어야합니다. 티는 눈물을 흘리면서 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눈물로 기도해 주고 그가 이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가운데 티가 빠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므로 늘 문제가 많습니다. 서로의 죄로 때로 부딪치고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비판하고 불평하기보다 자기를 겸손히 돌아보고 회개에 힘쓰는 성숙한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때 이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이런 모임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고 감사하고 사랑을 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나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 모임이 생명이 살아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첨부파일
-
data/message1/08mt12.hwp (0byte)
63회 다운로드 | DATE : 2008-06-15 13:50: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