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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32강(16:1-28) 그리스도의 길, 제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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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441회 작성일 08-11-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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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32 강                                                       
말씀 마태복음 16:1-28
요절 마태복음 16:21

그리스도의 길, 제자의 길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오늘은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올바로 깨닫고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신앙 고백하는 것은 한 개인의 생애에 생과 사를 가를 만한 중대한 사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그 인생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방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기쁨과 생명력이 없이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실제 삶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고 새롭게 신앙고백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길을 힘 있게 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기억하지 못하느냐(1-12)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요즈음은 슈퍼컴퓨터를 작동해도 일기예보가 10번 중 6번은 틀려서 아예 예보를 하지 아니함만 못한 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슈퍼컴퓨터도, 인공위성도, 풍향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날씨만큼은 기가 막히게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람이라는 그들이 날씨는 그렇게 잘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메시야의 출현과 함께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는 사람들인데 왜 영적인 분별력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눈뜬장님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요, 음란하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곧 자신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실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했다면 사실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바리새인들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면서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한 가지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그것에 연결시키게 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대학만이 보입니다. 캠퍼스 개척의 사명을 받아서 그런지 생각이 항상 대학과 대학생들에게 가게 됩니다. 목자는 항상 양을 생각하고 양과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먹는 문제에 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누룩’하니 곧바로 ‘떡’하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경제가 어려운 세상에 살다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밥 문제에 매일 때 생각 없는 밥통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논의한 결과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은근히 영적인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속사포를 쏘듯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8-11)” 그제서야 제자들은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이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일로 염려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6:30;8:26;14:31;17:20).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작기 때문에 현실 문제를 뛰어넘지를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병든 자를 고치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도 먹이며, 귀신을 쫓아내고,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믿음을 심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롬10:17). 

또한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출애굽을 기억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깨우치십니다. 나를 도우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잘 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요 열매가 많아서 목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비전이 보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행하신 일들이 무엇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죄악된 내가 변화되어 현재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마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공급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13-20) :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분봉왕 헤롯 빌립이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재건한 이 도시에는 헬라 신들에 대한 숭배와 유명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들의 도시에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슬람교나 힌두교에서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부릅니다. 선지자는 오실 구원자를 예언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와 구원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분적이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인격적인 질문입니다. 너희들이 정말 마음 중심으로 나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진실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입술로 만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 결과를 보고자 하십니다. 중간시험을 볼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요한복음 17: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 중에서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아서 교수직을 사표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양심에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믿지도 않으면서 신학교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공부하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는 양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성령께서 그 마음눈을 밝히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답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고 세움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왕으로서 그 백성 된 우리의 필요를 때마다 풍성하게 공급해 주십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때마다 내가 행해야 할 바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나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내가 회개할 때마다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오리라 한 바로 그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오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반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4:33). 그는 이 세상의 잡다한 신들과 대조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 되십니까? 정말 마음으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경배해야 할 나의 구주시오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해야 할 왕이시오 인생의 방향을 인도해 주시는 선지자시오 죄사함을 주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광야 같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저는 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유한나 시인의 <사랑의 광야에서>라는 시를 읊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당신을
왜 그토록 사랑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많을수록
왜 더욱 당신께 헌신하게 되는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은
언제나
진흙 같은 나를
보배로운 그릇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그윽한 사랑의 눈길은
나의 아픔 속에
언제나
진주같이 영롱한
진리의 열매 열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사랑이십니다. 나의 구원이십니다. 나의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시오 나의 인도자요 따라야 할 지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경배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한 번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고백했으면 이제 어떤 것도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2: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외에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나 텔레비전이나 게임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과 사랑의 열기가 식어가고 심지어 냉기가 돌기도 합니다. 이는 가정에 위기가 오듯이 주님과의 관계성에 위기가 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해야만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없고 비참한 죄인이었습니까? 이런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사랑의 고백이 있을 때 주님과 관계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여러분은 참으로 복 받은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답변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를 축복해 주십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교회의 기초로서의 역할이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열두 제자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면 열두 제자들이 모두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에베소서 2:20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울 반석은 베드로의 믿음, 그에게 주어진 계시, 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고백 자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시 후에 사탄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사람의 고백 자체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술로 신앙고백을 했다고 절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그 고백에 합당하게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고백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면 그에 합당한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선택하신 의도는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속할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교회들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열쇠’는 집에 사람의 출입을 관장하는 문지기의 권한이라기보다는 집안의 재정과 물품 출납을 관장하는 집사의 권한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의 위임에서 나오는 역할과 관련된 권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영적 권한을 사용해서 영적 전투를 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기도, 믿음의 동역자들, 물질, 은사, 등등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구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당한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길, 제자의 길(21-28) :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사함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매우 괴롭고 슬프고 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자기의 소원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기도하심으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순간에 사탄은 수제자를 통해서 다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책망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교회의 기초가 될 베드로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상반된 역할의 변화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의 인간적인 생각, 교만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인간적인 뜻을 접고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의 양식은 예수님의 삶의 양식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뜻을 부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생각과 계획과 꿈과 욕심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길이 비록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결국에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합니다. 기복신앙에 익숙한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얻는 것, 특히 경제적으로 유익을 얻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바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십니다.   
  오늘날 세대는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풍요를 누림에 따라 자기 절제를 상실하고 자기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세대 젊은이들은 자기 부인을 배우지 못해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고통스러워하고 나약해져서 조그만 어려움 앞에도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큰 희생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말살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면이 강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고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힘든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 나가기도 벅찬데 왜 사명의 십자가까지 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삶의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명의 십자가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살 때 편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명의 십자가가 부담스러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사명을 떠났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편하고 자유로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더 무거운 삶의 십자가가 그를 무겁게 누르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곤고해지고 고독해지고 권태로워지다가 마침내는 악령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죽은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사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5,26) 사람의 목숨은 유한하고 일회적입니다. 목숨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소중하고 귀합니다. 이 귀한 목숨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생은 시행착오 할 기회가 없이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또 이 목숨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결국에는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잃게 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갚아 주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다 얻게 됩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배우는 삶은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 자유함을 누리고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에 반석처럼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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