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31강(15:21-28) 주여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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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31 강
말씀 마태복음 15:21-28
요절 마태복음 15:27
주여 옳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그녀의 큰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배우고 우리도 영육간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으로부터 북서쪽으로 67Km 정도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제자들을 돕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이곳을 찾아왔는데 고막을 찢는 듯한 여인의 절규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여자가 해산을 할 때 지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서 고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딸을 동일시했습니다.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두려움에 시달리고 엽기적이고 해괴망칙한 짓을 할 때면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밖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세 차례 모두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2,25,27).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져가야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이 가진 것과 비슷한 문제를 해결해 보신 그 분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는 바로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이런 간절한 도움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인의 고통에 대해서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기나 하신 것인지 모를 정도로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귀가 먹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신데 왜 이런 행동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딸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구하는 자마다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 믿음을 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무시와 조롱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녀들을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계시기 때문에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매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원칙은 예수님이 스스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인에게는 거절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거절을 당하면 상처가 됩니다. 거절을 당하면 다시 다가가기가 두렵습니다. 예수님도 여인에게 상처를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상처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 상처를 주신 것입니다.
여인은 거절을 당할 때 지혜롭게 행하였습니다. 거절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거절을 당할 때 더욱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거절을 당할 때 그 거절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거절당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절을 당할 때 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부족한 그 한 가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실 때 이유가 있습니다. 거절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이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절에 대한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절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이라는 욕을 먹으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란 개보다 못하다는 욕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셔서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꺼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때로 목자로서 양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방법을 바꾸어서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버림을 받을 때 겸손하게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시자 이 여인은 예수님께 사람 차별하시느냐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께 절하며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절한 것처럼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거절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더 지극 정성으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반복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면서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여자의 눈물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물은 킹콩조차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여자의 이런 간청 정도면 누구나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어야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거듭된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 시대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가 오늘날처럼 흔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개는 야생이었습니다. 또한 개는 대부분 청소동물(scavenger)이었습니다. 죽은 이세벨의 시체를 개에게 던져 청소를 했습니다. 개는 더럽고 길거리를 함부로 다니는 병원균 매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흔히 이방인들을 ‘깨끗하지 못하고 거친 개’라는 의미로 ‘개’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 말 한마디로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멸적인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충격적입니다. 그것도 귀신들려 고통하는 딸을 고치고자 나온 여인에게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더 충격적입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작은 개입니다.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된 작은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대들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좀 철학적인 여인이었다면 “으음 그래요,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성자 눈에는 성자만 보이는 거에요.” 우리나라 아줌마 스피릿이 있다면 “그래, 개라고요.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 공사판 한번 개판을 만들어 볼까요?” 하면서 물고 뜯을 수 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자는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당한 서러움을 예수님께 쏟아 부으며 대판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 아주 성숙한 태도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여 옳소이다’하면서 인정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여인도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 곧 자녀 문제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여인은 자녀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보고 아파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나는 죽은 개와 같은 존재이다. 자기의 딸도 개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습니다. 이와 같은 여인의 겸손에서 지혜가 나왔습니다. 자녀를 감당하면서 여인은 매우 겸손해졌습니다. 자기 딸을 괴롭히고 놀리는 애들을 감당하면서 겸손해졌습니다. 또한 사랑이 충만해 있습니다. 딸에 대한 이 희생적인 사랑이 예수님의 모욕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강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답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요청이 여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를 과감히 제시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그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은 먹습니다.’(27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했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능력이 크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인은 부스러기를 주실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의 생애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부할 수 있는 지혜와 물질도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은 믿음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먹고 살만한 집과 직장도 주셨습니다. 내가 현재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할 때 주님은 계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스러기는 고사하고 좀 더 큰 떡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의심하고 불평합니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고 잘 나가는 것을 볼 때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을 품습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개 취급을 당할 때 ‘주님, 옳습니다.’하고 인정하기보다 반발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뭔가 틀렸습니다.’ 반발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옳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이때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스러기’라도 구해야 합니다. 그때 부스러기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스러기 같은 열 두 제자들을 통해서 만민 구원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요나단은 600명의 이스라엘 군사와 20만 대군의 블레셋 군대와 맞붙은 전쟁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고 믿고 도전하였습니다(삼상14: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이런 믿음을 받으시고 블레셋을 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길 때 큰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요회가 매달립니다. 몇 사람을 돕기 위해서 센터 동역자들이 다 동참합니다. 이렇게 비록 당장은 우리가 돕는 양들이 어리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장차 영적 장군이요 리더로 클 것을 믿고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원문에 보면 여자여는 “오! 여자여”라는 감탄사가 붙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신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큰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거리에 있는 그녀의 딸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면 여인의 믿음은 어떤 점에서 큰 믿음입니까?
첫째, 기회를 붙잡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기회라는 것은 왔다가 지나가 버립니다. 기회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회가 아니지요. 기회를 붙잡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기 딸보다 더 흉악한 귀신이 들렸던 거라사 광인,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 지르던 사람이요, 자기 몸을 자해하던 사람이요, 쇠고랑으로 묶어 놔도 이를 끊고 도망다니던 사람이요, 군대 귀신이 들렸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그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세 번씩이나 거절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면 10년 아니 2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만들지는 못할망정 찾아 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주여 옳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로 택하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은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여인 편에서 보면 분명한 차별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차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여유에서 지혜가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여인의 지혜는 예수님의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열게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를 진정한 구원자로 계속해서 고백하고 믿었습니다. 이방인인 자신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개와 같은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실 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도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개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주인은 없지만 부스러기를 주지 않는 주인은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구원자 예수님이 이방인과 같은 자신들도 구원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녀의 떡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스러기 은혜’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능력이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사랑과 능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괜찮았습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이 아니라 그냥 한 말씀만 해 주시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한 말씀만 툭 던져 주셔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 부스러기 같은 것도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에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안 받고 만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큰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자녀들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면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과학으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자녀들을 맡기셨습니다. 이들이 병들고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스러기를 구하지만 주님은 ‘그래 부스러기 맛이나 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의 딸을 온전히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은혜를 주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하는 선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큰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가는 사람이 결국 인생에서 승리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15:21-28
요절 마태복음 15:27
주여 옳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그녀의 큰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배우고 우리도 영육간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으로부터 북서쪽으로 67Km 정도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제자들을 돕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이곳을 찾아왔는데 고막을 찢는 듯한 여인의 절규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여자가 해산을 할 때 지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서 고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딸을 동일시했습니다.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두려움에 시달리고 엽기적이고 해괴망칙한 짓을 할 때면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밖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세 차례 모두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2,25,27).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져가야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이 가진 것과 비슷한 문제를 해결해 보신 그 분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는 바로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이런 간절한 도움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인의 고통에 대해서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기나 하신 것인지 모를 정도로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귀가 먹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신데 왜 이런 행동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딸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구하는 자마다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 믿음을 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무시와 조롱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녀들을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계시기 때문에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매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원칙은 예수님이 스스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인에게는 거절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거절을 당하면 상처가 됩니다. 거절을 당하면 다시 다가가기가 두렵습니다. 예수님도 여인에게 상처를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상처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 상처를 주신 것입니다.
여인은 거절을 당할 때 지혜롭게 행하였습니다. 거절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거절을 당할 때 더욱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거절을 당할 때 그 거절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거절당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절을 당할 때 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부족한 그 한 가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실 때 이유가 있습니다. 거절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이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절에 대한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절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이라는 욕을 먹으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란 개보다 못하다는 욕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셔서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꺼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때로 목자로서 양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방법을 바꾸어서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버림을 받을 때 겸손하게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시자 이 여인은 예수님께 사람 차별하시느냐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께 절하며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절한 것처럼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거절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더 지극 정성으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반복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면서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여자의 눈물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물은 킹콩조차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여자의 이런 간청 정도면 누구나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어야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거듭된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 시대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가 오늘날처럼 흔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개는 야생이었습니다. 또한 개는 대부분 청소동물(scavenger)이었습니다. 죽은 이세벨의 시체를 개에게 던져 청소를 했습니다. 개는 더럽고 길거리를 함부로 다니는 병원균 매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흔히 이방인들을 ‘깨끗하지 못하고 거친 개’라는 의미로 ‘개’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 말 한마디로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멸적인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충격적입니다. 그것도 귀신들려 고통하는 딸을 고치고자 나온 여인에게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더 충격적입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작은 개입니다.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된 작은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대들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좀 철학적인 여인이었다면 “으음 그래요,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성자 눈에는 성자만 보이는 거에요.” 우리나라 아줌마 스피릿이 있다면 “그래, 개라고요.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 공사판 한번 개판을 만들어 볼까요?” 하면서 물고 뜯을 수 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자는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당한 서러움을 예수님께 쏟아 부으며 대판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 아주 성숙한 태도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여 옳소이다’하면서 인정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여인도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 곧 자녀 문제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여인은 자녀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보고 아파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나는 죽은 개와 같은 존재이다. 자기의 딸도 개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습니다. 이와 같은 여인의 겸손에서 지혜가 나왔습니다. 자녀를 감당하면서 여인은 매우 겸손해졌습니다. 자기 딸을 괴롭히고 놀리는 애들을 감당하면서 겸손해졌습니다. 또한 사랑이 충만해 있습니다. 딸에 대한 이 희생적인 사랑이 예수님의 모욕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강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답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요청이 여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를 과감히 제시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그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은 먹습니다.’(27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했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능력이 크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인은 부스러기를 주실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의 생애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부할 수 있는 지혜와 물질도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은 믿음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먹고 살만한 집과 직장도 주셨습니다. 내가 현재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할 때 주님은 계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스러기는 고사하고 좀 더 큰 떡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의심하고 불평합니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고 잘 나가는 것을 볼 때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을 품습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개 취급을 당할 때 ‘주님, 옳습니다.’하고 인정하기보다 반발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뭔가 틀렸습니다.’ 반발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옳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이때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스러기’라도 구해야 합니다. 그때 부스러기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스러기 같은 열 두 제자들을 통해서 만민 구원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요나단은 600명의 이스라엘 군사와 20만 대군의 블레셋 군대와 맞붙은 전쟁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고 믿고 도전하였습니다(삼상14: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이런 믿음을 받으시고 블레셋을 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길 때 큰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요회가 매달립니다. 몇 사람을 돕기 위해서 센터 동역자들이 다 동참합니다. 이렇게 비록 당장은 우리가 돕는 양들이 어리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장차 영적 장군이요 리더로 클 것을 믿고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원문에 보면 여자여는 “오! 여자여”라는 감탄사가 붙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신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큰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거리에 있는 그녀의 딸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면 여인의 믿음은 어떤 점에서 큰 믿음입니까?
첫째, 기회를 붙잡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기회라는 것은 왔다가 지나가 버립니다. 기회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회가 아니지요. 기회를 붙잡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기 딸보다 더 흉악한 귀신이 들렸던 거라사 광인,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 지르던 사람이요, 자기 몸을 자해하던 사람이요, 쇠고랑으로 묶어 놔도 이를 끊고 도망다니던 사람이요, 군대 귀신이 들렸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그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세 번씩이나 거절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면 10년 아니 2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만들지는 못할망정 찾아 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주여 옳습니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로 택하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은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여인 편에서 보면 분명한 차별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차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여유에서 지혜가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여인의 지혜는 예수님의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열게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를 진정한 구원자로 계속해서 고백하고 믿었습니다. 이방인인 자신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개와 같은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실 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도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개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주인은 없지만 부스러기를 주지 않는 주인은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구원자 예수님이 이방인과 같은 자신들도 구원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녀의 떡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스러기 은혜’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능력이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사랑과 능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괜찮았습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이 아니라 그냥 한 말씀만 해 주시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한 말씀만 툭 던져 주셔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 부스러기 같은 것도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에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안 받고 만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큰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자녀들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면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과학으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자녀들을 맡기셨습니다. 이들이 병들고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스러기를 구하지만 주님은 ‘그래 부스러기 맛이나 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의 딸을 온전히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은혜를 주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하는 선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큰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가는 사람이 결국 인생에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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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회 다운로드 | DATE : 2008-11-02 12: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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