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30강(15:1-20) 손보다 마음을 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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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30강
말씀 마태복음 15:1-20
요절 마태복음 15:20
손보다 마음을 씻으라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한 교사는 어린아이들에게 점심을 먹기 전에 자기 책상을 닦는 훈련을 시켰는데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집에 오면 밥상을 자연스럽게 닦기 시작하고 자기 책상 정돈을 잘 하였습니다. 깨끗한 환경을 보면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여자들을 가리켜 청소귀신이라는 농담을 합니다. 유대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청소를 잘 합니다. 미국에서 그들이 거하는 동네는 매우 깨끗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자 더럽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보다 마음을 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깨끗해야 하는 부분은 손보다 마음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환경과 함께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함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부터 종교지도자들이 게네사렛 지방에 이르러 예수님을 책잡을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파견을 받고 왔으므로 상당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은 제자들이 밥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음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왜 밥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을까요? 열 두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넉넉하지 못한 비용으로 공동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에 손을 씻고 먹을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내놓자마자 없어지기 때문에 손을 씻고 음식을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의 이런 삶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은 위생 문제를 넘어서 영적인 정결 예식의 문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문제를 어느 정도로 중요시 했는가 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랍비 아카바는 투옥되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소량의 물을 받았을 때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물로 손을 씻었다고 합니다. 손을 씻는 것은 좋은데 생명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 씻는 유전을 율법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손을 씻었는데(막 7:4), 이는 부지중 부정에 접촉하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집어먹어 부정함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이 전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수로라도 부정케 되지 않으려는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파견된 그 권위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전통은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줍니다. 전통은 권위가 있기 때문에 같은 문화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이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 예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여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4-6). 이것을 고르반 유전이라고 합니다. 이 유전은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만든 것인데 나중에는 부모를 섬기고 싶지 않은 이기심 때문에 악용되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부모님도, 하나님도 무시하는 죄악을 장로의 유전으로 합리화시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고, 부모님도 사랑하지 않는 패륜적인 죄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이 먼 것이 외식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투쟁하면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는 마음의 중심이 자기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신앙 생활을 하는가? 나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가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사랑 때문에 믿음 생활 초기에는 잘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즉 신앙 생활의 목적이 자기사랑, 자기만족, 자기영광 등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은 일생토록 부인해야 하는 죄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자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 역사가 세상에서 사업 계획처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왜 그 일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잘 하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할수록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는 요소는 잘못된 동기와 방향으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일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고 자기만족을 위한 동기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 알고 이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는 성경 공부를 하며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전통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통은 어디까지나 전통입니다. 우리가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씀이 전통에 앞서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경 공부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성경 공부, 형제를 살리기 위한 성경 공부’가 되어야지, 일대일 팀 수를 늘리기 위한 성경 공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생활을 통해서 제자 양성을 하는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공동생활이 각자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모임 정도로 그친다면 혼자서 원룸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발견하고 돌아보면서 형제 사랑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장막 생활이 그저 돈이나 아끼고 적당히 자기 유익이나 챙기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왜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장막 생활을 더 잘, 많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이 필요한 형제들을 장막에 들여보내서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모임으로 계속해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18).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했습니다(예레미야 17:9).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고 거짓되며 사악합니다. 온갖 죄의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악을 뿜어내는 샘과 같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지 않고 손을 아무리 씻어도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저도 자신의 마음의 악함을 진실하게 들여다 볼 때 그 더러움에 기가 차고 절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씻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에베소서 5: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촉된 사람의 마음은 거룩해 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죄와 싸우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공의만 강조하게 되면 잔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와 사랑, 진리와 은혜가 균형을 잡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수술을 하시지만 반드시 싸매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건강해 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씻어 주려고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깨끗하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 있습니다(요 15:3).
둘째, 예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케 하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요한 일서 1:7절도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로마서 3:24-25절에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고 물로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듯이 씻어버리십니다.
셋째, 성령님입니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잘 드러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구원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처음 믿는 순간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새 생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일생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생 구원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통에 얽매인 그 시대에 전통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매인 사람들로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더러움을 씻는 정결한 사람이 되기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 자기 피를 흘려주기 원하셨습니다.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마음을 씻는 지도자가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는 역사를 이루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15:1-20
요절 마태복음 15:20
손보다 마음을 씻으라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한 교사는 어린아이들에게 점심을 먹기 전에 자기 책상을 닦는 훈련을 시켰는데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집에 오면 밥상을 자연스럽게 닦기 시작하고 자기 책상 정돈을 잘 하였습니다. 깨끗한 환경을 보면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여자들을 가리켜 청소귀신이라는 농담을 합니다. 유대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청소를 잘 합니다. 미국에서 그들이 거하는 동네는 매우 깨끗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자 더럽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보다 마음을 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깨끗해야 하는 부분은 손보다 마음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환경과 함께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함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부터 종교지도자들이 게네사렛 지방에 이르러 예수님을 책잡을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파견을 받고 왔으므로 상당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은 제자들이 밥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음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왜 밥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을까요? 열 두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넉넉하지 못한 비용으로 공동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에 손을 씻고 먹을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내놓자마자 없어지기 때문에 손을 씻고 음식을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의 이런 삶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은 위생 문제를 넘어서 영적인 정결 예식의 문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문제를 어느 정도로 중요시 했는가 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랍비 아카바는 투옥되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소량의 물을 받았을 때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물로 손을 씻었다고 합니다. 손을 씻는 것은 좋은데 생명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 씻는 유전을 율법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손을 씻었는데(막 7:4), 이는 부지중 부정에 접촉하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집어먹어 부정함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이 전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수로라도 부정케 되지 않으려는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파견된 그 권위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전통은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줍니다. 전통은 권위가 있기 때문에 같은 문화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이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 예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여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4-6). 이것을 고르반 유전이라고 합니다. 이 유전은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만든 것인데 나중에는 부모를 섬기고 싶지 않은 이기심 때문에 악용되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부모님도, 하나님도 무시하는 죄악을 장로의 유전으로 합리화시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고, 부모님도 사랑하지 않는 패륜적인 죄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이 먼 것이 외식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투쟁하면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는 마음의 중심이 자기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신앙 생활을 하는가? 나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가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사랑 때문에 믿음 생활 초기에는 잘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즉 신앙 생활의 목적이 자기사랑, 자기만족, 자기영광 등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은 일생토록 부인해야 하는 죄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자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 역사가 세상에서 사업 계획처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왜 그 일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잘 하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할수록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는 요소는 잘못된 동기와 방향으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일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고 자기만족을 위한 동기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 알고 이를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는 성경 공부를 하며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전통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통은 어디까지나 전통입니다. 우리가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씀이 전통에 앞서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경 공부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성경 공부, 형제를 살리기 위한 성경 공부’가 되어야지, 일대일 팀 수를 늘리기 위한 성경 공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생활을 통해서 제자 양성을 하는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공동생활이 각자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모임 정도로 그친다면 혼자서 원룸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발견하고 돌아보면서 형제 사랑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장막 생활이 그저 돈이나 아끼고 적당히 자기 유익이나 챙기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왜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장막 생활을 더 잘, 많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이 필요한 형제들을 장막에 들여보내서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모임으로 계속해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18).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했습니다(예레미야 17:9).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고 거짓되며 사악합니다. 온갖 죄의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악을 뿜어내는 샘과 같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지 않고 손을 아무리 씻어도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저도 자신의 마음의 악함을 진실하게 들여다 볼 때 그 더러움에 기가 차고 절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씻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에베소서 5: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촉된 사람의 마음은 거룩해 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죄와 싸우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공의만 강조하게 되면 잔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와 사랑, 진리와 은혜가 균형을 잡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수술을 하시지만 반드시 싸매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건강해 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씻어 주려고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깨끗하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 있습니다(요 15:3).
둘째, 예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케 하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요한 일서 1:7절도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로마서 3:24-25절에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고 물로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듯이 씻어버리십니다.
셋째, 성령님입니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잘 드러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구원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처음 믿는 순간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새 생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일생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생 구원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통에 얽매인 그 시대에 전통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매인 사람들로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더러움을 씻는 정결한 사람이 되기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 자기 피를 흘려주기 원하셨습니다.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마음을 씻는 지도자가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는 역사를 이루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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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회 다운로드 | DATE : 2008-10-26 10: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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