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8강(14:1-21) 다 배불리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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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28강
말씀 마태복음 14:1-21
요절 마태복음 14:20
다 배불리 먹고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배고픈 무리들을 어떻게 배부르게 먹이셨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없어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초라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도 이 예수님께 나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12절은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13-2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죽음(1-12) : 분봉 왕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2).”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서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고 예수님은 그를 “저 여우”(눅 13:33)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의 심문에도 관여를 했습니다(눅 23:7-12). 예수님을 통해서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일들이 헤롯 안디바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일을 시작하신지 거의 2년이 다 되어서야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크게 주목하였습니다. 좁은 나라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쫙 퍼져 있었는데 그는 왜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해 동편에 있는 천하의 절경이라는 마카이루스라는 요새에 궁전을 짓고 거기서 대부분의 시간을 향락을 즐기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아라비아의 나바티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라는 왕의 딸과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헤롯 빌립의 집에 들렀다가 빌립의 아내이자 자기 조카인 헤로디아와 눈이 맞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돌아오면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자기 아내를 쫓아내고 야심만만한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형제가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의 아내를 취할 수 있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헤롯 빌립에게는 딸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세례요한은 이 결혼의 불법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요한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왕 앞에서라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옳지 않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왕에게 전했습니다. 이를 듣기 싫어했던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요사스러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넋이 나가 정신이 혼미한 중에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12살 밖에 되지 않은 이 딸이 뭐 엄청난 것을 구하랴 학용품이나 옷이나 명품 구두 정도를 구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술이 확 깨어 근심했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 어머니에게로 요한의 목을 가져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백성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가 향락에 빠져서 분별력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 같은 의인이 두 여자의 간악한 요청과 불의한 왕의 결정에 따라서 억울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백성들은 이런 나라에 소망을 두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정신적인 방황과 공황 상태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이미 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같이 의로운 죽음을 죽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을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헤롯의 영토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자 왕이신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는 결코 여우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일을 이루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경제가 불안정하고 장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목자가 없어 방황하는 양들을 방치하고 자기 한 몸의 안정을 추구하며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둘째, 빈 들로 가신 예수님(13) :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은 헤롯이 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빈 들로 나가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빈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빈 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훈련하는 거룩한 학교입니다. 빈 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만나는 교제의 장소입니다. 빈 들은 넓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빈 들에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것,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 우리를 분주하게 하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와 교제하기 위해서 빈 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빈 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로 나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들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걸어서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목자의 냄새를 맡고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참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료를 받고자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자 빈 들로 나아갔습니다. 수많은 양떼같이 무리들이 빈 들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광고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리들을 일부러 동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 방황하는 사람들, 생각이 있는 사람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사람들 등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도 남편 따라, 아내 따라, 부모 따라, 친구 따라 모여들었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만 오천 명은 되었습니다. 우리도 손에 손을 잡고 빈 들로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영적 교제를 위해서 빈 들로 나아갑시다.
셋째,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14) :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어원적으로 내장이나 심장으로부터 아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픔을 가지고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목자를 잃은 양떼와 같았습니다. 목자 잃은 양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독초를 먹을 수 있습니다. 여우와 같은 헤롯 왕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합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먹지 못해서 갈증으로 목이 마릅니다. 더러운 물,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이 들어 있습니다. 세파에 상하고 찢겨 지내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 큰 무리 가운데는 치유 받고 회복되어야 할 영혼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만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자를 잃고 병든 양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사 중의 의사인 심의였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 아니라 병든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찢기고 병든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종대왕은 글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들이 불쌍하여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글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빛을 갖는 것입니다.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역사를 갖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글 창제로 인해서 지금 우리는 문맹률이 거의 사라지고 교육과 컴퓨터 사용과 인터넷에서 놀라운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도의 영혼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기 위해서 섬기는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제적인 모임으로 성장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더배리 선교사님도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학생들이 소망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겨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비전을 심고 지도자로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아니 인간이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조차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요소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이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자신 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그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를 불쌍히 여길 때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섬길 수 있습니다. 남편을 불쌍히 여길 때 하루 종일 직장 일에 시달릴 남편을 어찌하든지 먹여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을 불쌍히 여길 때 그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센터에서나 식사를 하면서나 길을 가면서나 만날 때마다 가르치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할지라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동참하고자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넷째, 다 배불리 먹고(15-21) : 15절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녁이 되어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를 자기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할 때 먹일 수 없었습니다. 먹일 수 없는 자기들의 사정을 생각할 때 가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들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을 쫓아서라도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감당하기에는 제자들의 마음이 너무나 좁았습니다. 자기들이 배가 고프니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들을 보내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는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강한 부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합리적인 제안을 거부하셨습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책임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망을 두고 양떼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빈 들로 와서 제자들을 섬기는 일에 힘을 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계획 속에서 무리들이 몰려오자 방향을 바꾸어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먹이도록 함으로 실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정치 지도자인 헤롯,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대신해서 불쌍한 무리들을 그들이 돌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래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열 두 명의 제자를 양성하여 남기고자 하는 목표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가 후배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일에 힘쓰는 가을 학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먹여야 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먹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들의 능력도 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형편이나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먹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래의 지도자로서 긍휼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에게 권한을 위임한 이유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리들을 책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해서 무리를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장래의 지도자로서 믿음을 키우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먹을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떡 다섯 개는 작은 호밀 빵입니다. 물고기는 말린 작은 생선입니다. 이것은 한 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제자들 생각에 이 분량으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분량에 매였습니다. 그들은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현재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칠 수는 있지만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믿음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바꾸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에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를 제자들에게 받으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믿음과 감사 기도를 받으시고 떡을 떼어 줄 때에 계속해서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마 만 오천 명을 보리 떡 열 개씩만 먹여도 십만 오천 개입니다. 이를 나르려면 5톤 트럭 30대는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받아서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먹고도 남아서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차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풍성하게 먹이셨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우리를 풍성하게 먹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직면한 한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작은 것을 예수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원어로 보면 그것을 지금 당장 이리로 내게 가져오라는 명령입니다. 즉시 빨리 움직여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하찮게 여겼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가져오면 그것으로 이 시대 영혼들을 먹이고 천국의 역사를 이뤄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정말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 시간 밖에 없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토요일 저녁 시간을 가져오라.” 우리가 양을 치려면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에 자신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전도해서 양을 데려오면 됩니다. 어떤 분은 그저 전도하는 목자님 옆에서 따라 다니는 것 밖에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전도하는 목자님을 따라 다니는 그것을 가져오라.” “전 노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좋아, 그것을 가져와 양들과 놀아주라.” “전 청소 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 그것을 가져와 환경을 예비하라.” “전 애들이 사랑스러워요” “그래 그것을 가져와 CBF 어린이들을 섬기는 것이 좋겠네.” “전 몸이 아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해요.” “그래 그럼 골방 기도를 가져오라.” 예수님은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바로 그것을 지금 당장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거창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것을 최선을 다해 드리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시고 천국잔치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저는 작년에 이디모데 선교사가 왔을 때 함께 센터 구입을 위해서 기도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종로, 남산, 그리고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고 크고 좋은 센터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바텍 센터는 안정적으로 개척 역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생명의 역사를 바라보며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금요 신입생 모임을 생각할 때 목자님들이 드리는 오병이어를 축복하심을 보게 됩니다. 목자님들이 바쁜 가운데서도 준비하여 드리는 메시지와 소감, 음식 서빙을 하나님이 축복하사 모임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에게 가져오는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빈 들도 천국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이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체험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양떼들을 먹이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드려질 때 나도 배불리 먹고 양들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 받고자 하기보다 드리는 가운데 풍성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14:1-21
요절 마태복음 14:20
다 배불리 먹고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배고픈 무리들을 어떻게 배부르게 먹이셨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없어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초라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도 이 예수님께 나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12절은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13-2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죽음(1-12) : 분봉 왕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2).”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서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고 예수님은 그를 “저 여우”(눅 13:33)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의 심문에도 관여를 했습니다(눅 23:7-12). 예수님을 통해서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일들이 헤롯 안디바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일을 시작하신지 거의 2년이 다 되어서야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크게 주목하였습니다. 좁은 나라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쫙 퍼져 있었는데 그는 왜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해 동편에 있는 천하의 절경이라는 마카이루스라는 요새에 궁전을 짓고 거기서 대부분의 시간을 향락을 즐기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아라비아의 나바티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라는 왕의 딸과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헤롯 빌립의 집에 들렀다가 빌립의 아내이자 자기 조카인 헤로디아와 눈이 맞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돌아오면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자기 아내를 쫓아내고 야심만만한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형제가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의 아내를 취할 수 있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헤롯 빌립에게는 딸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세례요한은 이 결혼의 불법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요한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왕 앞에서라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옳지 않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왕에게 전했습니다. 이를 듣기 싫어했던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요사스러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넋이 나가 정신이 혼미한 중에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12살 밖에 되지 않은 이 딸이 뭐 엄청난 것을 구하랴 학용품이나 옷이나 명품 구두 정도를 구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술이 확 깨어 근심했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 어머니에게로 요한의 목을 가져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백성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가 향락에 빠져서 분별력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 같은 의인이 두 여자의 간악한 요청과 불의한 왕의 결정에 따라서 억울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백성들은 이런 나라에 소망을 두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정신적인 방황과 공황 상태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이미 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같이 의로운 죽음을 죽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을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헤롯의 영토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자 왕이신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는 결코 여우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일을 이루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경제가 불안정하고 장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목자가 없어 방황하는 양들을 방치하고 자기 한 몸의 안정을 추구하며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둘째, 빈 들로 가신 예수님(13) :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은 헤롯이 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빈 들로 나가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빈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빈 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훈련하는 거룩한 학교입니다. 빈 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만나는 교제의 장소입니다. 빈 들은 넓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빈 들에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것,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 우리를 분주하게 하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와 교제하기 위해서 빈 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빈 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로 나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들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걸어서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목자의 냄새를 맡고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참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료를 받고자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자 빈 들로 나아갔습니다. 수많은 양떼같이 무리들이 빈 들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광고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리들을 일부러 동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 방황하는 사람들, 생각이 있는 사람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사람들 등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도 남편 따라, 아내 따라, 부모 따라, 친구 따라 모여들었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만 오천 명은 되었습니다. 우리도 손에 손을 잡고 빈 들로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영적 교제를 위해서 빈 들로 나아갑시다.
셋째,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14) :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어원적으로 내장이나 심장으로부터 아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픔을 가지고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목자를 잃은 양떼와 같았습니다. 목자 잃은 양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독초를 먹을 수 있습니다. 여우와 같은 헤롯 왕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합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먹지 못해서 갈증으로 목이 마릅니다. 더러운 물,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이 들어 있습니다. 세파에 상하고 찢겨 지내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 큰 무리 가운데는 치유 받고 회복되어야 할 영혼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만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자를 잃고 병든 양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사 중의 의사인 심의였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 아니라 병든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찢기고 병든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종대왕은 글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들이 불쌍하여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글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빛을 갖는 것입니다.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역사를 갖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글 창제로 인해서 지금 우리는 문맹률이 거의 사라지고 교육과 컴퓨터 사용과 인터넷에서 놀라운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도의 영혼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기 위해서 섬기는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제적인 모임으로 성장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더배리 선교사님도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학생들이 소망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겨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비전을 심고 지도자로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아니 인간이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조차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요소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이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자신 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그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를 불쌍히 여길 때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섬길 수 있습니다. 남편을 불쌍히 여길 때 하루 종일 직장 일에 시달릴 남편을 어찌하든지 먹여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을 불쌍히 여길 때 그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센터에서나 식사를 하면서나 길을 가면서나 만날 때마다 가르치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할지라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동참하고자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넷째, 다 배불리 먹고(15-21) : 15절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녁이 되어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를 자기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할 때 먹일 수 없었습니다. 먹일 수 없는 자기들의 사정을 생각할 때 가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들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을 쫓아서라도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감당하기에는 제자들의 마음이 너무나 좁았습니다. 자기들이 배가 고프니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들을 보내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는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강한 부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합리적인 제안을 거부하셨습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책임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망을 두고 양떼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빈 들로 와서 제자들을 섬기는 일에 힘을 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계획 속에서 무리들이 몰려오자 방향을 바꾸어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먹이도록 함으로 실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정치 지도자인 헤롯,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대신해서 불쌍한 무리들을 그들이 돌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래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열 두 명의 제자를 양성하여 남기고자 하는 목표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가 후배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일에 힘쓰는 가을 학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먹여야 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먹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들의 능력도 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형편이나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먹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래의 지도자로서 긍휼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에게 권한을 위임한 이유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리들을 책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해서 무리를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장래의 지도자로서 믿음을 키우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먹을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떡 다섯 개는 작은 호밀 빵입니다. 물고기는 말린 작은 생선입니다. 이것은 한 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제자들 생각에 이 분량으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분량에 매였습니다. 그들은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현재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칠 수는 있지만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믿음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바꾸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에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를 제자들에게 받으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믿음과 감사 기도를 받으시고 떡을 떼어 줄 때에 계속해서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마 만 오천 명을 보리 떡 열 개씩만 먹여도 십만 오천 개입니다. 이를 나르려면 5톤 트럭 30대는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받아서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먹고도 남아서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차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풍성하게 먹이셨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우리를 풍성하게 먹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직면한 한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의 작은 것을 예수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원어로 보면 그것을 지금 당장 이리로 내게 가져오라는 명령입니다. 즉시 빨리 움직여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하찮게 여겼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가져오면 그것으로 이 시대 영혼들을 먹이고 천국의 역사를 이뤄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정말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 시간 밖에 없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토요일 저녁 시간을 가져오라.” 우리가 양을 치려면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에 자신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전도해서 양을 데려오면 됩니다. 어떤 분은 그저 전도하는 목자님 옆에서 따라 다니는 것 밖에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전도하는 목자님을 따라 다니는 그것을 가져오라.” “전 노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좋아, 그것을 가져와 양들과 놀아주라.” “전 청소 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 그것을 가져와 환경을 예비하라.” “전 애들이 사랑스러워요” “그래 그것을 가져와 CBF 어린이들을 섬기는 것이 좋겠네.” “전 몸이 아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해요.” “그래 그럼 골방 기도를 가져오라.” 예수님은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바로 그것을 지금 당장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거창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것을 최선을 다해 드리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시고 천국잔치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저는 작년에 이디모데 선교사가 왔을 때 함께 센터 구입을 위해서 기도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종로, 남산, 그리고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고 크고 좋은 센터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바텍 센터는 안정적으로 개척 역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생명의 역사를 바라보며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금요 신입생 모임을 생각할 때 목자님들이 드리는 오병이어를 축복하심을 보게 됩니다. 목자님들이 바쁜 가운데서도 준비하여 드리는 메시지와 소감, 음식 서빙을 하나님이 축복하사 모임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에게 가져오는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빈 들도 천국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이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체험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양떼들을 먹이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드려질 때 나도 배불리 먹고 양들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 받고자 하기보다 드리는 가운데 풍성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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