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5강(13:1-23)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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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25강
말씀 마 13:1-23
요절 마 13:23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추석도 지나고 가을이 되는가 했는데 늦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곡식과 과일은 햇볕을 많이 받으면 더욱 달고 소출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비유는 씨가 뿌려진 네 개의 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입니다. 이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에 있는 네 가지 마음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가 아니라 밭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소망하며 말씀을 잘 듣고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었습니다. 강사는 앉아 있고 청중은 서 있는 것이 당시 말씀 전하는 곳의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파도에 흔들거리는 배 위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땅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씨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씨가 길가에 나뒹굴자 지나가던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뿌려진 씨 중에서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 밑에는 단단한 바위가 놓여 있어서 햇볕을 받으면 쉽게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싹이 빨리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없으므로 타서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 밭은 토양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밭에 가시와 엉겅퀴, 잡초도 뿌려져 있었습니다.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니 토양에 있는 양분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시가 더 잘 자라기 때문에 곡식의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 시시해 다 아는 얘기잖아. 건질 것이 하나도 없네.”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내가 좋은 밭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없다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세 가지 밭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밭에 대한 연구보다 세 밭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에 대해서 생각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계속 좋은 밭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이면 소망이 없습니다. 땅은 정직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우리도 진실되게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2010년까지 배가 되는 역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좋은 밭이 되어 말씀을 받는다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보통 곡식은 열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비유에 담겨진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기쁨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 같이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아니 되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소원을 가지고 더 깊이 묵상하게 되고 소원이 없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는 듣는 사람에게 소원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적게 들리거나 풍성하게 들립니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에는 비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것들에 대한 즐거움으로 배가 불렀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서 살이 쪄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의 낙을 즐기기 때문에 변화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 그대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은혜 받기를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말씀을 받고 변화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말씀을 들을 때 귀를 막고 딴 짓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대로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는 그들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소원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발견하고 죄로 병든 마음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무한히 성장하게 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길 가(18-19)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9).”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습니다. 사탄도 말씀을 먹고 자랄까요? 같은 물을 먹고 소는 우유를 내지만 독사는 독을 만들어 냅니다. 사탄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씀으로 실족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사탄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심습니다. 졸음을 가져다줍니다. 헛생각을 심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심지어 예수님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사탄이 말씀을 빼앗는다는 말은 잡아채다, 도적질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적극적으로 붙잡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씨가 먹히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길 가처럼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으로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곡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으로 왜곡해서 해석해 버리는 식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감동을 받지도 못하고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길 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자기와 연결 짓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알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길 가도 갈아엎고 거름을 주면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다. 완악한 마음을 깊이 회개하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을 때 이런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들도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길 가와 같은 마음을 가질 확률이 많습니다. 이미 여러 번 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듣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구신자라고 부릅니다. 입만 살아 있지 행함이 없는 신자라는 뜻입니다. 신앙 연수가 오랠수록 더욱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둘째, 돌 밭(20-21) :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은 말씀이 뿌려지면 곧 싹이 나옵니다. 이런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말씀으로 인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는 천국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과 소망 등등으로 인해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천국 말씀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과 진리를 발견하면 자기 혼자 은혜를 다 받는 사람같이 너무 좋아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죄사함을 받고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항상 수양회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밭은 흙이 깊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에는 바위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속교만이 있습니다. 속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내면이 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기심과 정욕과 교만으로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뿌리가 자라지를 않습니다. 뿌리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 사랑의 관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체험이요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이 사람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말씀에 두었던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환난이나 박해는 뿌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뿌리가 이 환란과 박해를 감당해 낼 수 있으면 그 후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견고하게 식물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양분을 뽑아 올리고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식물에 햇빛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햇빛이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는 환난이나 박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조웨슬레 목자님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환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님이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림성모병원에 어머님은 그 옆 한림대 부속병원인 대림성심병원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서 또 다시 셋째 형님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받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구안와사에도 걸렸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았지만 많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아니하여 주님은 그도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은혜가 분명했습니다. 환란의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는 더욱 깊이 깊이 주님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천명 이상의 고객들의 환란과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면서 선한 일에 힘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감정적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자기 것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주님으로 인한 내적인 기쁨이 아니라 새로운 것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깊이가 없습니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환난과 박해가 올 때 넘어집니다. 또 돌밭과 같은 마음은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설사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박해와 환난의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나를 순수하게 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의 때에 말씀을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시 119:67). 환란과 박해는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합니다. 나를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환란을 통해서 속교만이 깨어지고 겸손해집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환란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인해서 환난이나 박해가 올 때 두려워하기보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22) :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 밭은 토양이 매우 좋습니다. 문제는 그곳에 씨와 함께 가시떨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는 생존력이 매우 강합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 하물며 좋은 땅에서는 얼마나 더 잘 자라겠습니까? 가시떨기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저주하셨습니다. 가시떨기 밭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신앙적인 활동은 많이 있는데 거룩함과 진실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종교 행사에 몸과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세상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가시떨기 밭과 같은 사람은 세상 염려를 자기 힘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염려’란 이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로 점령당하고 거기에 푹 빠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염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염려를 하십니까? 학생들은 취직을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염려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에서 잠만 잡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신 분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부모님들은 게임에 빠진 자녀에 대한 염려, 자녀 교육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장년들은 노후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은 이렇게 목자 생활을 하면 앞으로 열매가 있을까 염려합니다. 어떤 분은 그냥 염려를 합니다. 염려를 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함을 느낍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염려가 생깁니다. 북한 핵에 대한 염려, 석유 값 인상에 대한 염려, 환율에 대한 염려, 교통사고, 강도에 대한 염려 등등 끊임없이 염려를 부추기는 소식뿐입니다. 사람이 과거의 상처에 매이지 않으면 장래에 대한 염려에 매입니다. 사람이 이런 염려에 빠지게 되면 그 염려 때문에 천국 메시지는 질식되어 버립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는 천국 말씀을 생각할 여지가 도무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6-7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새벽에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염려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나누어야겠습니다.
가시떨기에는 재물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만 재물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것이 사람의 진을 다 빼버립니다. 재물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중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편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에너지를 빼앗아가 버립니다. 돈은 매일 매달 써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 염려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염려하고,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잘 지키고 불릴 것인가 염려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모든 범죄는 대부분 돈과 섹스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려면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재물의 유혹에 빠져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서 자라지를 못합니다. 염려라는 말은 찢는다, 나눈다, 마음이 어수선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이란 재물의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속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속임입니다. 돈만 있으면 건강도 얻고, 명예도 얻고, 공부도 잘 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돈만 있다면 친구도 따르고 사랑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심지어 돈만 있으면 생명도 얻을 수 있고 천국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요즈음 젊은 남녀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원인은 대부분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해야합니다. 돈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일에 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8-19).
사람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서 마음이 막혀버리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 안에 세력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기에 힘쓰는 동시에 가시떨기를 뽑는 회개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염려할 문제를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좋은 밭(23) :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부드러워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합니다. 환란이나 박해가 와도 능히 견딥니다. 환란 속에서 주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립니다. 세상의 염려를 기도로 이깁니다. 재물의 유혹을 하나님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그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물질 문제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을 통한 생명력을 풍성히 누립니다. 한마디로 스피릿이 살아 있습니다. 영향력이 좋습니다. 삶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추수를 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씀 안에서 풍성한 삶을 영위합니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둘째,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슨 업적이나 결과나 숫자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 양성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부흥한 원인이 성령의 역사와 말씀이 흥왕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 선한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가지 밭은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길가도 좋은 밭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돌밭도 바위를 걷어내면 좋은 밭이 됩니다. 가시떨기 밭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걷어내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기도로 말씀의 씨를 덮고 기다려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가을 학기에 우리 마음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열매가 풍성한 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 13:1-23
요절 마 13:23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추석도 지나고 가을이 되는가 했는데 늦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곡식과 과일은 햇볕을 많이 받으면 더욱 달고 소출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비유는 씨가 뿌려진 네 개의 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입니다. 이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에 있는 네 가지 마음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가 아니라 밭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소망하며 말씀을 잘 듣고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었습니다. 강사는 앉아 있고 청중은 서 있는 것이 당시 말씀 전하는 곳의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파도에 흔들거리는 배 위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땅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씨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씨가 길가에 나뒹굴자 지나가던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뿌려진 씨 중에서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 밑에는 단단한 바위가 놓여 있어서 햇볕을 받으면 쉽게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싹이 빨리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없으므로 타서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 밭은 토양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밭에 가시와 엉겅퀴, 잡초도 뿌려져 있었습니다.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니 토양에 있는 양분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시가 더 잘 자라기 때문에 곡식의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 시시해 다 아는 얘기잖아. 건질 것이 하나도 없네.”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내가 좋은 밭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없다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세 가지 밭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밭에 대한 연구보다 세 밭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에 대해서 생각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계속 좋은 밭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이면 소망이 없습니다. 땅은 정직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우리도 진실되게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2010년까지 배가 되는 역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좋은 밭이 되어 말씀을 받는다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보통 곡식은 열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비유에 담겨진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기쁨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 같이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아니 되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소원을 가지고 더 깊이 묵상하게 되고 소원이 없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는 듣는 사람에게 소원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적게 들리거나 풍성하게 들립니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에는 비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것들에 대한 즐거움으로 배가 불렀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서 살이 쪄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의 낙을 즐기기 때문에 변화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 그대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은혜 받기를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말씀을 받고 변화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말씀을 들을 때 귀를 막고 딴 짓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대로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는 그들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소원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발견하고 죄로 병든 마음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무한히 성장하게 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길 가(18-19)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9).”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습니다. 사탄도 말씀을 먹고 자랄까요? 같은 물을 먹고 소는 우유를 내지만 독사는 독을 만들어 냅니다. 사탄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씀으로 실족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사탄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심습니다. 졸음을 가져다줍니다. 헛생각을 심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심지어 예수님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사탄이 말씀을 빼앗는다는 말은 잡아채다, 도적질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적극적으로 붙잡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씨가 먹히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길 가처럼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으로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곡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으로 왜곡해서 해석해 버리는 식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감동을 받지도 못하고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길 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자기와 연결 짓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알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길 가도 갈아엎고 거름을 주면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다. 완악한 마음을 깊이 회개하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을 때 이런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들도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길 가와 같은 마음을 가질 확률이 많습니다. 이미 여러 번 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듣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구신자라고 부릅니다. 입만 살아 있지 행함이 없는 신자라는 뜻입니다. 신앙 연수가 오랠수록 더욱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둘째, 돌 밭(20-21) :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은 말씀이 뿌려지면 곧 싹이 나옵니다. 이런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말씀으로 인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는 천국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과 소망 등등으로 인해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천국 말씀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과 진리를 발견하면 자기 혼자 은혜를 다 받는 사람같이 너무 좋아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죄사함을 받고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항상 수양회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밭은 흙이 깊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에는 바위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속교만이 있습니다. 속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내면이 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기심과 정욕과 교만으로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뿌리가 자라지를 않습니다. 뿌리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 사랑의 관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체험이요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이 사람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말씀에 두었던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환난이나 박해는 뿌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뿌리가 이 환란과 박해를 감당해 낼 수 있으면 그 후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견고하게 식물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양분을 뽑아 올리고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식물에 햇빛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햇빛이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는 환난이나 박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조웨슬레 목자님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환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님이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림성모병원에 어머님은 그 옆 한림대 부속병원인 대림성심병원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서 또 다시 셋째 형님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받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구안와사에도 걸렸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았지만 많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아니하여 주님은 그도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은혜가 분명했습니다. 환란의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는 더욱 깊이 깊이 주님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천명 이상의 고객들의 환란과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면서 선한 일에 힘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감정적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자기 것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주님으로 인한 내적인 기쁨이 아니라 새로운 것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깊이가 없습니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환난과 박해가 올 때 넘어집니다. 또 돌밭과 같은 마음은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설사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박해와 환난의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나를 순수하게 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환난과 박해의 때에 말씀을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시 119:67). 환란과 박해는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합니다. 나를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환란을 통해서 속교만이 깨어지고 겸손해집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환란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인해서 환난이나 박해가 올 때 두려워하기보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22) :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 밭은 토양이 매우 좋습니다. 문제는 그곳에 씨와 함께 가시떨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는 생존력이 매우 강합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 하물며 좋은 땅에서는 얼마나 더 잘 자라겠습니까? 가시떨기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저주하셨습니다. 가시떨기 밭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신앙적인 활동은 많이 있는데 거룩함과 진실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종교 행사에 몸과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세상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가시떨기 밭과 같은 사람은 세상 염려를 자기 힘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염려’란 이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로 점령당하고 거기에 푹 빠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염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염려를 하십니까? 학생들은 취직을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염려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에서 잠만 잡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신 분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부모님들은 게임에 빠진 자녀에 대한 염려, 자녀 교육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장년들은 노후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은 이렇게 목자 생활을 하면 앞으로 열매가 있을까 염려합니다. 어떤 분은 그냥 염려를 합니다. 염려를 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함을 느낍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염려가 생깁니다. 북한 핵에 대한 염려, 석유 값 인상에 대한 염려, 환율에 대한 염려, 교통사고, 강도에 대한 염려 등등 끊임없이 염려를 부추기는 소식뿐입니다. 사람이 과거의 상처에 매이지 않으면 장래에 대한 염려에 매입니다. 사람이 이런 염려에 빠지게 되면 그 염려 때문에 천국 메시지는 질식되어 버립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는 천국 말씀을 생각할 여지가 도무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6-7절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새벽에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염려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나누어야겠습니다.
가시떨기에는 재물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만 재물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것이 사람의 진을 다 빼버립니다. 재물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중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편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에너지를 빼앗아가 버립니다. 돈은 매일 매달 써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 염려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염려하고,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잘 지키고 불릴 것인가 염려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모든 범죄는 대부분 돈과 섹스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려면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재물의 유혹에 빠져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서 자라지를 못합니다. 염려라는 말은 찢는다, 나눈다, 마음이 어수선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이란 재물의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속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속임입니다. 돈만 있으면 건강도 얻고, 명예도 얻고, 공부도 잘 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돈만 있다면 친구도 따르고 사랑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심지어 돈만 있으면 생명도 얻을 수 있고 천국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요즈음 젊은 남녀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원인은 대부분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해야합니다. 돈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일에 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8-19).
사람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서 마음이 막혀버리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 안에 세력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기에 힘쓰는 동시에 가시떨기를 뽑는 회개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염려할 문제를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좋은 밭(23) :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부드러워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합니다. 환란이나 박해가 와도 능히 견딥니다. 환란 속에서 주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립니다. 세상의 염려를 기도로 이깁니다. 재물의 유혹을 하나님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그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물질 문제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을 통한 생명력을 풍성히 누립니다. 한마디로 스피릿이 살아 있습니다. 영향력이 좋습니다. 삶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의 추수를 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씀 안에서 풍성한 삶을 영위합니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둘째,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슨 업적이나 결과나 숫자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 양성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부흥한 원인이 성령의 역사와 말씀이 흥왕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 선한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가지 밭은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길가도 좋은 밭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돌밭도 바위를 걷어내면 좋은 밭이 됩니다. 가시떨기 밭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걷어내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기도로 말씀의 씨를 덮고 기다려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가을 학기에 우리 마음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열매가 풍성한 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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