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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3강(12:1-21) 상한 갈대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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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28회 작성일 08-09-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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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23강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0,21

상한 갈대의 소망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에는 긍휼이라고는 전혀 없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연약한 인간들을 낮아져서 섬기시고 섬세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정죄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깊이 배워 연약한 자들을 품고 섬기는 목자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1-8).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밥을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픈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젊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 심방을 다니고 병자들을 돌보고 함께 일하느라 식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시장하여 밀밭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잘 익은 밀 이삭을 잘라 그 냄새를 맡았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그들의 침샘을 자극하고 위장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밀이삭을 비비어 훅 껍질을 날려버리고 알곡을 입에 톡 털어 넣어 씹으며 고소한 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배고픔을 얼마나 해결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제 때에 챙겨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입에 털어 넣는 장면을 폰카로 찰칵 찍어서는 증거를 대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2).” 그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더 이상 밀이삭을 씹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어떤 제자들은 체하기 쉬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율법으로 재며 죄인 취급하고 정죄했습니다. “고것도 못 참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놈들” 하면서 비난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은 잘 알았지만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 없었습니다. 긍휼이 없는 지식은 칼날과 같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손으로 비빈 것을 추수로 간주하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따졌습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 조금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율법을 범하는 불경한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시비나 걸고 있는 그들이 밉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대일로 성경이나 더 가르치지 않고 제자들이나 감시하고 다니는 그들이 한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미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열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요구로 인해서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들은 제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율법적인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율법의 요구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사랑이 없이 지키고자 하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3,4)” 진설병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의 권위와 배고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 발동해서 거룩한 떡을 먹도록 했습니다. 또한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은 다윗과 그 부하들은 율법을 뛰어넘어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보다 크신 분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율법을 뛰어 넘어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의 무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장한 가운데 행한 행동을 용납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비의 하나님을 알면 이렇게 까지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이 배가 고파서 이런 일을 했다면 그들이 이렇게 했을까요? 아니 그들이라도 얼른 밀밭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의 허기를 채워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제자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다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경쟁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보면서 미움으로 가득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박히면 오만 가지가 다 밉게 보입니다. 그의 먹는 것, 입는 것,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미워 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자기들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권위, 전통적인 권위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존심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또 자신들의 이기심을 숨기고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배고픈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가장 바쁩니다. 소를 잡고 불을 피우고 청소를 해야 하고 섬길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고 있지만 죄가 없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제사보다도 한 사람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사랑을 원하십니다. 심정이 담기지 않는 제사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의만 쌓일 수 있습니다.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이처럼 자비의 심정이 없고 제사만 드리게 될 때에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느니라.” 죄 없는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율법에 정통한 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비가 없으면, 이처럼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한번은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회의를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회의를 하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 그러자 아이언 사이드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하나님이 만약에 법대로 하셨다면 자네나 우리나 다 이미 이 자리에 없었을 걸세.” 법은 중요합니다.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합니다. 법이 있어야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율법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제대로 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자비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법은 사람을 살리는데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데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보다 앞서는 것이 자비입니다. 율법보다 앞서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사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율법도 규정도 무용론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먼저 내 마음에 자비의 정신이 있는가?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 살피고 율법도 가르치고 제사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둘째,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9-16). 예수님께서 밀밭을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은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까? 한편 손이 말랐으니 얼마나 살아가기가 힘들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손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대부분의 일들을 손으로 합니다. 그것도 두 손을 사용해서 합니다. 세수도 두 손으로 합니다. 피아노도 기타도 두 손으로 칩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수영을 할 때도 두 손을 힘차게 내 저어야 빨리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그는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 운명과 슬픔의 구덩이에 빠져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좌절의 구덩이에 있었습니다. 그는 취직 시험에 여러 번 실패하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은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의 인생문제와 건강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예 이 사람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이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시는가? 안 고치시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기는가? 안 어기는가?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 사람은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묻고 자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 유대인들은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널빤지를 던져서 올라오게 합니다. 그래도 생명에 지장이 있으면 자신들이 직접 양을 끌어냅니다. 자신들이 안식일에 귀중한 재산인 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돕고자 하는데 그것을 악하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구덩이에 빠진 양은 자기 힘으로 여기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모양의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어령 씨는 문화부 장관이요 올림픽 개회식을 진두지휘했던 석학입니다. 그의 딸은 미국에서 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느 날 갑상선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 손자는 자폐증 때문에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딸은 너무나 힘든 나머지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망막이 상해서 실명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어령씨는 딸의 집에 찾아가서 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교만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논객이다” 자부했는데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암환자에, 앞 못 보는 딸을 위해서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폐증 때문에 학교도 가지 못하는 손자를 위해서 문화부 장관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암과 자폐증의 웅덩이에 빠진 자를 현대의술로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하와이의 조그만 교회에 출석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암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력이 회복되고 손자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권능 앞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회심을 하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발표했습니다. 그 후 그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간증집을 냈습니다.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손 마른 사람을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는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한 바리새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부담스럽다고 내일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부끄럽다고 손을 더욱 주머니 속에 깊이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병든 손을 사람들과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내밀었습니다. 자신의 상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순간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내밀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으셨지만 한 손이 병든 이 사람을 고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몰고 올 파장을 알았지만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위협 앞에서도 용기있게 옳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기보다는 회당을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입장을 고집하다가 결국 안식일의 주인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자들이 도리어 안식일의 제정자 되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안식일 행동 원리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안식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죽이고자 의논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 갈등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을 써야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알고 마음이 위축되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방관자로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병자를 치유하면서 그 일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시기심이 충만한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전이나 세상의 명예나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셋째,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예수님(17-21). 바리새인들이 비록 예수님을 배척하고 무시하고 죽이고자 했지만 그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선지가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으로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은 공의로서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십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잘 말해 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조용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는 온유하고 겸손한 내면성을 가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는 무익한 종의 자세로 일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상한 갈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갈대는 미풍에도 쉽게 흔들립니다. 상한 갈대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어떠합니까? 그을음이 나고 빛도 희미해서 빨리 손으로 비비어 끄고 싶습니다. 빛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사탄의 공격과 죄의 세력으로 인해서 그 내면과 영혼이 찢기고 상한 모습을 잘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그 내면을 펼쳐 보면 이리 패이고 저리 패이고, 이렇게 상처받고 저렇게 상처받은 상한 감정들이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를 툭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떤 사람은 상한 감정을 분노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신만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배우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리더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동역자에게, 자녀들에게, 목자님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많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주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때로는 저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떤 목자님은 양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목자에게 상처를 받는 양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사람은 한 마디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분은 무심한 표정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상처와 슬픔과 고통을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인내하며 감당하시고 끝까지 소망 가운데 돌봐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망간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찾아오셔서 끝까지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도와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죄와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생들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온 인류의 희망이 되십니다(21).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으로 회복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원합니다.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역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서로 마음 깊이 용서하고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공동체, 생명이 살아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상한 갈대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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