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8년 마태복음 22강(11:2-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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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마태복음 제 22 강
말씀 마태복음 11:2-30
요절 마태복음 11:28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12장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과 거부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는 그들은 자기 죄로 인해서 곤고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초청하십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쉼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쉼에 대한 열망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서비스 산업이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여행으로 인한 적자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힘을 쓰지만 진정한 쉼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일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갈 때 쉼이 있습니다(2-19) :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헤롯왕의 죄를 책망하다가 미움을 사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이 악한 왕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2).”고 믿었습니다. 그는 심판의 메시야, 공의의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들꽃처럼 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해 같이 빛나는 그런 지상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잡아 가둔 악한 자들은 아직도 기세등등하고 자신은 감옥 속에서 산다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자신은 불의의 세력에 일격을 당한 희생자였습니다. 진리를 말하던 입이 봉해졌고, 인기와 명성은 사그라져갔습니다. 예수님은 면회 한번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면서 회의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며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하시는 일을 보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오실 그 이를 위해서 살아 왔고, 그를 증거하고 제자들도 그에게 보냈습니다(요1:37). 오실 메시야는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도 요한과 같은 회의와 불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구원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어려운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회의와 불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주님께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 실패와 좌절과 고통의 길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악으로 인해서 힘든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내 생각과 이상을 내려놓아야합니다. 내 생각과 이상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교정되어야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포기한 것이 얼만데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는가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깊이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들이 들은 것은 5-7장에 나와 있고, 그들이 본 것은 8-9장에 나오는 기적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라웠고 그가 행하신 이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맹인을 보게 하고(사 29:18),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며(사 35:5,6),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사 25:4) 못 듣는 자가 들으며(사 29:18; 35:5) 죽은 자가 살아나며(사 26:19)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습니다(사 61:1).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약속들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요한이 기다린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돕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어두운 마음에 말씀을 통한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기대대로 역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심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는 당분간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과 그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의에 빠진 것을 아셨지만 무리들에게 그의 진정한 위대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부드러운 옷을 입고 즐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백성들의 아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으로서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7-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의로운 말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요한은 회의에 빠졌고 피곤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11).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시대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그리스도의 하실 일과 그가 이루시는 일의 성격을 생각해 보도록 도우셨습니다. 또 자신의 부르심과 감당해온 일들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도우셨습니다. 그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살아온 삶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인정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한 사람을 돕는 일도, 그 일을 위해서 애쓰는 일도 당장 결과가 있든 없든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1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얻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침노해서 그 안의 보물과 온갖 귀한 것을 쟁취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퍼지지 말고 인내하면서 투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예수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인생에 대해서 속단하지 말고 올바른 방향을 잡고 인내하면서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생애는 비록 그가 감옥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받습니다(19).
둘째, 죄를 회개해야 쉼을 얻습니다(20-28) :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면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할 텐데 그들은 교만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방인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 그리고 음란했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더라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까지 높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도 천국에 이르리라 자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신은 가장 큰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 시대에 복음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 마음 고생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동역자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오해와 거절로 인해서 힘들어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로 인해서 감사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계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음을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2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 짐이 많지만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히 12:1절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슬기롭고 지혜있다 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사는 날 동안 그 영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롬2:7-9). 하나님을 속이면서 숨어 죄짓는 것도 고통이요, 죄를 감춘 채 죄의식에 시달리며 사는 것도 큰 짐입니다. 가인은 그 동생 아벨이 미워서 죽였습니다. 아무도 그가 동생을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추궁하셨습니다. 그때 가인은 호소합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 아무도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 무거운 죄의 짐에 짓눌렸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다가 잡힌 범인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이제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죄의 짐이 그렇게 무거웠던 것입니다. 육신이 편해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결코 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회개함으로써 참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마음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때 사람을 돕는 기쁨을 누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자체가 기쁨이요 쉼이라고 여깁니다.
셋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29-30).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에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ㅅ'자 막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나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순종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소가 쟁기나 달구지를 끌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멍에가 좋으면 소가 힘을 잘 쓰고 편안히 밭을 갈 수 있지만, 멍에가 좋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30절에서 ‘쉽다’, ‘가볍다’는 말은 몸에 딱 맞는다는 뜻입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해 본 사람이나 등산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배낭을 잘 꾸리고 배낭끈을 잘 조절해서 자기 몸에 꼭 맞게 해서 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알 것입니다. 산을 오래 잘 타려면 무거운 배낭을 몸에 맞게 잘 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인생은 등산처럼 건강하고 즐거워지며 그 영혼에 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사명은 우리 몸에 딱 맞습니다. 죄와 욕심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는 일생토록 의와 성결로 두려움이 없이 그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져야할 짐은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사명을 주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세상이 주는 멍에에 비해서 가볍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가리킵니다. 주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은 영생의 샘물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먹고 마시는 자는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피곤하고 무겁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나 자신과 양의 내면에 있던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새 힘이 용솟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일대일은 부담이 아니라 사모하는 시간이 되고, 가장 행복한 영적 교제의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피곤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그가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세상의 멍에보다 가볍습니다.
또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충성스러운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멍에가 쉽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무거워 보이지만 실제로 지면 가볍습니다. 멍에를 잘 지면 명예를 얻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면서 그를 좇을 때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운다고 하는데 삶이 피곤한 것은 해야 할 일이 많고 그 일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양들에 대한 사랑보다 열매를 맺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소가 멍에를 메게 되면 고삐가 주인의 손에 쥐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리 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 갑니다. 주님이 이랴 하면서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는데 자기는 왼쪽으로 가야겠다고 머리를 돌리면 피곤합니다. 우리도 이제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께 내드리고 순종할 때 쉼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상급이 있고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안식과 안일은 다릅니다. 안일은 그 스스로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잠25: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캠퍼스 복음화와 제자 양성, 세계 선교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잠시 피곤한 생각을 했을지라도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사명을 맡겨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다 영접하실 만큼 온유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묵묵히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이 이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평안을 얻으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움으로써 사람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스트레스가 많은 이 세상에서 염려와 갈등,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마음이 가볍고 상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역사를 섬기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쉰다고 해서 해야 할 사명이 없다면 끊어진 기타 줄과 같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질 때 몸에 맞는 배낭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처럼 활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학기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일하면서도 쉼을 얻고 쉬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 마태복음 11:2-30
요절 마태복음 11:28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12장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과 거부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는 그들은 자기 죄로 인해서 곤고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초청하십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쉼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쉼에 대한 열망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서비스 산업이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여행으로 인한 적자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힘을 쓰지만 진정한 쉼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일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갈 때 쉼이 있습니다(2-19) :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헤롯왕의 죄를 책망하다가 미움을 사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이 악한 왕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2).”고 믿었습니다. 그는 심판의 메시야, 공의의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들꽃처럼 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해 같이 빛나는 그런 지상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잡아 가둔 악한 자들은 아직도 기세등등하고 자신은 감옥 속에서 산다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자신은 불의의 세력에 일격을 당한 희생자였습니다. 진리를 말하던 입이 봉해졌고, 인기와 명성은 사그라져갔습니다. 예수님은 면회 한번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면서 회의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며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하시는 일을 보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오실 그 이를 위해서 살아 왔고, 그를 증거하고 제자들도 그에게 보냈습니다(요1:37). 오실 메시야는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도 요한과 같은 회의와 불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구원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어려운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회의와 불신에 빠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주님께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 실패와 좌절과 고통의 길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악으로 인해서 힘든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내 생각과 이상을 내려놓아야합니다. 내 생각과 이상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교정되어야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포기한 것이 얼만데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는가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깊이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들이 들은 것은 5-7장에 나와 있고, 그들이 본 것은 8-9장에 나오는 기적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라웠고 그가 행하신 이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맹인을 보게 하고(사 29:18),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며(사 35:5,6),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사 25:4) 못 듣는 자가 들으며(사 29:18; 35:5) 죽은 자가 살아나며(사 26:19)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습니다(사 61:1).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약속들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요한이 기다린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돕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어두운 마음에 말씀을 통한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기대대로 역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심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는 당분간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과 그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의에 빠진 것을 아셨지만 무리들에게 그의 진정한 위대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부드러운 옷을 입고 즐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백성들의 아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으로서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7-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의로운 말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요한은 회의에 빠졌고 피곤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11).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시대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그리스도의 하실 일과 그가 이루시는 일의 성격을 생각해 보도록 도우셨습니다. 또 자신의 부르심과 감당해온 일들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도우셨습니다. 그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살아온 삶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인정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한 사람을 돕는 일도, 그 일을 위해서 애쓰는 일도 당장 결과가 있든 없든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1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얻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침노해서 그 안의 보물과 온갖 귀한 것을 쟁취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퍼지지 말고 인내하면서 투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예수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인생에 대해서 속단하지 말고 올바른 방향을 잡고 인내하면서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생애는 비록 그가 감옥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받습니다(19).
둘째, 죄를 회개해야 쉼을 얻습니다(20-28) :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면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할 텐데 그들은 교만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방인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 그리고 음란했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더라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까지 높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도 천국에 이르리라 자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신은 가장 큰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 시대에 복음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 마음 고생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동역자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오해와 거절로 인해서 힘들어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로 인해서 감사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계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음을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2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 짐이 많지만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히 12:1절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슬기롭고 지혜있다 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사는 날 동안 그 영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롬2:7-9). 하나님을 속이면서 숨어 죄짓는 것도 고통이요, 죄를 감춘 채 죄의식에 시달리며 사는 것도 큰 짐입니다. 가인은 그 동생 아벨이 미워서 죽였습니다. 아무도 그가 동생을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추궁하셨습니다. 그때 가인은 호소합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 아무도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 무거운 죄의 짐에 짓눌렸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다가 잡힌 범인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이제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죄의 짐이 그렇게 무거웠던 것입니다. 육신이 편해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결코 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회개함으로써 참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마음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때 사람을 돕는 기쁨을 누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자체가 기쁨이요 쉼이라고 여깁니다.
셋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29-30).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에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ㅅ'자 막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나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순종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소가 쟁기나 달구지를 끌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멍에가 좋으면 소가 힘을 잘 쓰고 편안히 밭을 갈 수 있지만, 멍에가 좋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30절에서 ‘쉽다’, ‘가볍다’는 말은 몸에 딱 맞는다는 뜻입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해 본 사람이나 등산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배낭을 잘 꾸리고 배낭끈을 잘 조절해서 자기 몸에 꼭 맞게 해서 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알 것입니다. 산을 오래 잘 타려면 무거운 배낭을 몸에 맞게 잘 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인생은 등산처럼 건강하고 즐거워지며 그 영혼에 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사명은 우리 몸에 딱 맞습니다. 죄와 욕심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는 일생토록 의와 성결로 두려움이 없이 그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져야할 짐은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사명을 주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세상이 주는 멍에에 비해서 가볍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가리킵니다. 주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은 영생의 샘물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먹고 마시는 자는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피곤하고 무겁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나 자신과 양의 내면에 있던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새 힘이 용솟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일대일은 부담이 아니라 사모하는 시간이 되고, 가장 행복한 영적 교제의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피곤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그가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세상의 멍에보다 가볍습니다.
또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충성스러운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멍에가 쉽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무거워 보이지만 실제로 지면 가볍습니다. 멍에를 잘 지면 명예를 얻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면서 그를 좇을 때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운다고 하는데 삶이 피곤한 것은 해야 할 일이 많고 그 일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자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양들에 대한 사랑보다 열매를 맺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소가 멍에를 메게 되면 고삐가 주인의 손에 쥐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리 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 갑니다. 주님이 이랴 하면서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는데 자기는 왼쪽으로 가야겠다고 머리를 돌리면 피곤합니다. 우리도 이제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께 내드리고 순종할 때 쉼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상급이 있고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안식과 안일은 다릅니다. 안일은 그 스스로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잠25: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캠퍼스 복음화와 제자 양성, 세계 선교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잠시 피곤한 생각을 했을지라도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사명을 맡겨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다 영접하실 만큼 온유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묵묵히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이 이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평안을 얻으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움으로써 사람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스트레스가 많은 이 세상에서 염려와 갈등,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마음이 가볍고 상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역사를 섬기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쉰다고 해서 해야 할 사명이 없다면 끊어진 기타 줄과 같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질 때 몸에 맞는 배낭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처럼 활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학기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일하면서도 쉼을 얻고 쉬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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