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예알1강(요2장) 살맛나는 인생을 사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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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예수알기 제 1 강
말씀 요한복음 2:1-11
요절 요한복음 2:9
살맛나는 인생을 사는 비결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언론에 신입생 축하 파티에서 만취하여 생명을 잃었다는 보도가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올해도 변함이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기쁨을 주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슬픔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봅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참된 변화, 살아 있는 소망을 줄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초청을 받아 간 곳이 혼인 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고립된 분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인간들의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혼인 예식은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 결혼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창조의 왕관이라면 결혼은 왕관의 보석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비롭게 밤에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은 한 시간이면 다 끝나고 식사하고 나오면 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잔치 집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축하하였고 노래와 춤, 시 등을 낭독하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3a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포도주는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시104:15, 전10:9)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세상 일에 지친 손님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고 힘과 위로, 무엇보다도 풍성한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했습니다. 손님들은 포도주를 마음껏 마시면서 주인의 풍성함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필수품인 포도주가 동이 나버렸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섬기는 종들이 먼저 당황하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주인으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주인은 올 손님 수를 예상하여 준비했는데, 예상이 빗나가 손님이 더 많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셔버렸습니다. 주인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서 돈줄이 떨어졌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젊은이들도 희망이 별로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살맛을 잃어버렸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등록금 걱정을 해야 합니다. 졸업을 해도 취직이나 될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기쁨과 희망과 패기가 넘쳐야 할 신입생들의 어깨가 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세상을 살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손님이 되어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랑으로 잘 대접받으면 기쁘고 힘이 납니다.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항상 잘 대접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포도주가 항상 넘치는 것이 아니라 모자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대접하는 입장이 될 때 포도주를 주기도 하지만, 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내게 있는 포도주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의 현실을 보면 포도주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 기쁨, 희망, 믿음의 포도주를 풍성히 주고받으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런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자라는 포도주를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맛나는 인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를 예수님께로 들고 나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주인이나 연회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께 먼저 알렸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을 아는 사람은 먼저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말이 없어집니다. 근심 가운데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아니면 그 문제가 왜 생겼는지, 누구 책임인지를 따집니다. 주인이 포도주를 적게 준비한 것이 원인인지 아니면 손님들이 공짜라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인지 따질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시끄러워집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조용한 가운데 포도주 없는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연회장이나 주인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곤란한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예수님께 해결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이런 마리아로 인해 결국 포도주 모자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사랑이 없어',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 저 사람은 용기가 없단 말이야'라며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인생을 한탄하고 자학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자라는 것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비난하고 슬퍼할수록 더 모자라게 됩니다. 무엇이 좀 모자란 사람, 없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모자란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자란 것이 채워지려면 그것을 예수님께로 들고 가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저희에게 사랑의 포도주, 기쁨의 포도주, 재미의 포도주, 힘의 포도주가 없다. 용기의 포도주, 비전의 포도주가 없다.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a,3).” 여러분 결핍을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 있는 사실 그대로 아뢰십시오. 그러면 넘치도록 주십니다.
둘째,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따라 행동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무 때나 가서 이렇게 해주시오 하면 이렇게 해주시고 또 저렇게 해주시오 하면 저렇게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대로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입맛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들도 다 자기 생각이 있어서 자기 생각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는 자기 뜻대로 움직여 달라고 한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있고 그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예수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머니 마리아가 잔칫집 하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주권을 마음 깊이 인정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무슨 말씀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방향을 받기 전 자기 나름대로 어떤 행동이나 계획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전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대로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와 하인들을 통해서 일하셨고 포도주를 돌 항아리에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종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 마음을 바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순종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셋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에 쓸 물을 채워두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돌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 항아리를 다 채우려면 대략 세 드럼통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전혀 엉뚱한 명령입니다. 없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인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는 문제 해결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명령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물은 액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물과 포도주는 구성 성분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물을 보고 포도주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를 만들려면 물보다 포도를 가지고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종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종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이 겉으로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불신하면 그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은 포도주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고 힘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물을 길어올 수는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종들에게 '너희는 지금부터 각 동네로 흩어져서 믿음으로 포도주를 구해 오라' 하셨더라면 그것은 종들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그 일은 종들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으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여유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자라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포도주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엉뚱하게 물을 긷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주 문제는 옆으로 제쳐 두고 물을 길으라고 방향을 주셨고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포도주 문제에 얽매인 사람이나 성질 급한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열이 받쳐서 예수님과 하인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는 판에 무슨 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이 광경을 보면 너무나도 여유 있고 멋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종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종들이 보기에도 물을 긷는 것은 포도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구까지 꾹꾹 눌러 채웠습니다. 포도주가 없어 심각한 상황에서 물을 길어다 돌 항아리에 붓는 이 여유와 믿음, 너무 멋진 장면 아닙니까? 이런 신뢰와 여유를 통해서 포도주 모자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넷째, 물로 된 포도주. 8절을 보십시오. 항아리에 물을 다 채우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그러자 하인들은 이번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으며, 연회장은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갑자기 신랑을 부르더니 극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와는 전혀 상관없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취하게 되면 맛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연회장은 취한 상태에서도 그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기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최상급 포도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다 최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집의 흥은 더욱 고조되었고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항아리의 물은 그냥 물로 그쳤을 것이요 포도주 모자란 문제는 그냥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말씀의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물의 양만큼 포도주의 양도 정해졌습니다. 만일 종들이 항아리에 반쯤만 물을 채웠더라면 포도주도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이 물을 여섯 항아리 가득 채웠기 때문에 포도주도 그만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예수님의 이 명령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의 항아리에 말씀의 물을 채워야 합니다. 마음의 항아리를 비워두거나 아니면 세상의 철학이나 잡동사니로 채우지 말고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채워진 그 말씀을 포도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내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나 사상이나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사람되게 할 수 있는 분은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 뿐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저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기쁨은 잠시였고, 삶이 허무했습니다. 하숙집에 들어간 첫날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제로 인생을 더 허무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허무한 인생을 먹고 마시고 즐기다 가자란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았지만 더욱 허무해졌습니다. 그런데 선배의 권유로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 내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기쁨과 충만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생활을 심각하고 금욕적이고 하나도 재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변화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하는 염려 때문에 변화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변화되면 육신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이 기쁘고 축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넘치게 축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궁핍을 느끼고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사랑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울은 간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8).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사회는 모든 것이 결핍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모든 것을 충만히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 요한복음 2:1-11
요절 요한복음 2:9
살맛나는 인생을 사는 비결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언론에 신입생 축하 파티에서 만취하여 생명을 잃었다는 보도가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올해도 변함이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기쁨을 주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슬픔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봅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참된 변화, 살아 있는 소망을 줄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초청을 받아 간 곳이 혼인 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고립된 분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인간들의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혼인 예식은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 결혼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창조의 왕관이라면 결혼은 왕관의 보석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비롭게 밤에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은 한 시간이면 다 끝나고 식사하고 나오면 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잔치 집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축하하였고 노래와 춤, 시 등을 낭독하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3a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포도주는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때문에(시104:15, 전10:9)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세상 일에 지친 손님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고 힘과 위로, 무엇보다도 풍성한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했습니다. 손님들은 포도주를 마음껏 마시면서 주인의 풍성함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필수품인 포도주가 동이 나버렸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섬기는 종들이 먼저 당황하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주인으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주인은 올 손님 수를 예상하여 준비했는데, 예상이 빗나가 손님이 더 많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셔버렸습니다. 주인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서 돈줄이 떨어졌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젊은이들도 희망이 별로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살맛을 잃어버렸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등록금 걱정을 해야 합니다. 졸업을 해도 취직이나 될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기쁨과 희망과 패기가 넘쳐야 할 신입생들의 어깨가 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세상을 살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손님이 되어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랑으로 잘 대접받으면 기쁘고 힘이 납니다.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항상 잘 대접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포도주가 항상 넘치는 것이 아니라 모자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대접하는 입장이 될 때 포도주를 주기도 하지만, 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내게 있는 포도주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의 현실을 보면 포도주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 기쁨, 희망, 믿음의 포도주를 풍성히 주고받으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런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자라는 포도주를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맛나는 인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를 예수님께로 들고 나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주인이나 연회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께 먼저 알렸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을 아는 사람은 먼저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말이 없어집니다. 근심 가운데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아니면 그 문제가 왜 생겼는지, 누구 책임인지를 따집니다. 주인이 포도주를 적게 준비한 것이 원인인지 아니면 손님들이 공짜라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인지 따질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시끄러워집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조용한 가운데 포도주 없는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는 연회장이나 주인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곤란한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예수님께 해결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이런 마리아로 인해 결국 포도주 모자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사랑이 없어',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 저 사람은 용기가 없단 말이야'라며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인생을 한탄하고 자학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자라는 것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비난하고 슬퍼할수록 더 모자라게 됩니다. 무엇이 좀 모자란 사람, 없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모자란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자란 것이 채워지려면 그것을 예수님께로 들고 가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저희에게 사랑의 포도주, 기쁨의 포도주, 재미의 포도주, 힘의 포도주가 없다. 용기의 포도주, 비전의 포도주가 없다.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a,3).” 여러분 결핍을 느끼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 있는 사실 그대로 아뢰십시오. 그러면 넘치도록 주십니다.
둘째,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따라 행동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무 때나 가서 이렇게 해주시오 하면 이렇게 해주시고 또 저렇게 해주시오 하면 저렇게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대로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입맛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들도 다 자기 생각이 있어서 자기 생각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는 자기 뜻대로 움직여 달라고 한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있고 그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예수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머니 마리아가 잔칫집 하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주권을 마음 깊이 인정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무슨 말씀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방향을 받기 전 자기 나름대로 어떤 행동이나 계획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전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대로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와 하인들을 통해서 일하셨고 포도주를 돌 항아리에 넘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종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 마음을 바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순종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셋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에 쓸 물을 채워두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돌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 항아리를 다 채우려면 대략 세 드럼통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전혀 엉뚱한 명령입니다. 없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인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는 문제 해결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명령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물은 액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물과 포도주는 구성 성분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물을 보고 포도주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를 만들려면 물보다 포도를 가지고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종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종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이 겉으로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불신하면 그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은 포도주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고 힘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물을 길어올 수는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종들에게 '너희는 지금부터 각 동네로 흩어져서 믿음으로 포도주를 구해 오라' 하셨더라면 그것은 종들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그 일은 종들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으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여유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자라는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포도주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엉뚱하게 물을 긷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주 문제는 옆으로 제쳐 두고 물을 길으라고 방향을 주셨고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포도주 문제에 얽매인 사람이나 성질 급한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열이 받쳐서 예수님과 하인들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는 판에 무슨 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이 광경을 보면 너무나도 여유 있고 멋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종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종들이 보기에도 물을 긷는 것은 포도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구까지 꾹꾹 눌러 채웠습니다. 포도주가 없어 심각한 상황에서 물을 길어다 돌 항아리에 붓는 이 여유와 믿음, 너무 멋진 장면 아닙니까? 이런 신뢰와 여유를 통해서 포도주 모자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넷째, 물로 된 포도주. 8절을 보십시오. 항아리에 물을 다 채우자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그러자 하인들은 이번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으며, 연회장은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갑자기 신랑을 부르더니 극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와는 전혀 상관없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취하게 되면 맛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연회장은 취한 상태에서도 그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기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최상급 포도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다 최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집의 흥은 더욱 고조되었고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항아리의 물은 그냥 물로 그쳤을 것이요 포도주 모자란 문제는 그냥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말씀의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물의 양만큼 포도주의 양도 정해졌습니다. 만일 종들이 항아리에 반쯤만 물을 채웠더라면 포도주도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이 물을 여섯 항아리 가득 채웠기 때문에 포도주도 그만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예수님의 이 명령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의 항아리에 말씀의 물을 채워야 합니다. 마음의 항아리를 비워두거나 아니면 세상의 철학이나 잡동사니로 채우지 말고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채워진 그 말씀을 포도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내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나 사상이나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사람되게 할 수 있는 분은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 뿐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저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기쁨은 잠시였고, 삶이 허무했습니다. 하숙집에 들어간 첫날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제로 인생을 더 허무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허무한 인생을 먹고 마시고 즐기다 가자란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살았지만 더욱 허무해졌습니다. 그런데 선배의 권유로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 내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기쁨과 충만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생활을 심각하고 금욕적이고 하나도 재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변화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하는 염려 때문에 변화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변화되면 육신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이 기쁘고 축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넘치게 축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궁핍을 느끼고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사랑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울은 간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8). 주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사회는 모든 것이 결핍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모든 것을 충만히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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