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09년 출애굽기강(5:1-7:7) 네가 아니라 내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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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애굽기 공부 4강
◆ 말씀 출애굽기 5:1-7:7
◆ 요절 출애굽기 7:4
네가 아니라 ‘내’가 하리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내적 외적 어려움과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런 문제들 앞에서 갈등하고 분열할 수도 있고 문제를 극복하고 더욱 강하고 성숙하게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높고 도전이 강하고 클수록 어려움과 갈등도 클 것입니다. 모세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왕에게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말합니다. 첫 대면에서 모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됩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는 좌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소명을 새롭게 하시면서 출애굽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의 도전 :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근엄한 목소리로 바로 왕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못하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애굽의 경제를 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놓아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최대한 부려먹고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길 백성이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당장 놓아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고대에는 민족과 신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예들의 신이었습니다. 힘없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신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태양신인 ‘라’신의 노예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신의 말을 내가 왜 듣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합니다. 노예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둘째, 바로의 저항 : 철저한 바로의 무시 앞에 모세와 아론은 부드러운 말로 설득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3).” 그들은 바로 왕의 수준에서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들이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시간이 많으니 헛생각을 한다고 판단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혹한 노동을 시킵니다. 바로가 그 날의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을 내려 그들에게 벽돌에 쓸 짚을 주지 말고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고 합니다. 벽돌에 2-5 센티미터의 짚을 넣지 않으면 단단한 벽돌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짚 없이 만든 벽돌은 쉽게 부서져서 쓸모없게 됩니다. 짚이 부족해서 진흙에 조금 넣으면 불량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당연히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휴식 시간도 없이 일할 뿐만 아니라 야근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의 감독들은 그들이 벽돌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자 자기들이 세운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는 거야!” 위협하면서 몽둥이와 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비돔성의 옛 터에 관한 고고학자 카일(Kyle) 교수의 보고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성의 아랫부분은 짚을 섞어 구운 벽돌로 쌓고, 가운데부분은 곡초의 그루터기를 섞어 구운 벽돌로 쌓고, 윗부분은 아무 것도 섞지 않고 흙으로만 구운 벽돌로 쌓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중한 업무를 주어서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모세가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9). 모세가 허황된 말을 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과 모세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모세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영적 권위를 파괴하고 지도력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와 서로 싸우다가 지리멸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의 문제가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합니다.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에게 짚은 주지 아니하고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이니다(15,16).” 그들은 스스로를 바로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노예 의식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당연히 애굽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로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감독들이 이스라엘인에게 부당하게 구타를 행한다고 말합니다. 왕의 백성을 이스라엘로 보면 바로 당신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실수하고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이런 수난이 닥친다는 것은 당신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바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자기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현실 문제와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감소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는 더욱 강하게 몰아세웁니다. 아니 자기 계획이 들어맞은데 대한 쾌감의 함성일지 모릅니다. “이 게으른 놈들. 너희가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거야! 이제 가서 일이나 해. 짚은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수량대로 채워야 해!” 기록원들은 자기들의 몸에 화가 미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좌절과 원망 : 그들은 바로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던 모세와 아론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자기들을 모세와 아론이 와서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감독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칼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합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 모세는 자기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했는데 백성들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으로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앞장서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지도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왕에게 거절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고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주저앉았습니까? 일하기 힘들다고 포기했습니까? 모세는 백성들에게 변명하거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돌아와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23).” 그는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 대한 긍휼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는 마음에 힘든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안 간다고 했잖습니까? 안 가겠다는데 자꾸 가라고 하시고 억지로 끌고 오시더니 이게 뭡니까? 이런 꼴을 보게 하시려고 저를 데려오셨습니까? 저로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기대를 크게 걸었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는 출애굽에 대한 원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서 바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혹독한 강제 노동, 중노동뿐이었습니다.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 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은 꼬이고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희망이 좌절로 바뀌었습니다. 바로의 강한 힘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어설 수 없는 한계, 벽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원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의욕적으로 하려다가, 좋은 일을 하려다가 꺾일 때 좌절감을 느낍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큰 벽 앞에 부딪칠 때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좌절은 끝이 아닙니다. 좌절했다고 끝난 것도 아닙니다. 잠시의 좌절일 뿐입니다. 사람은 좌절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좌절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최근에는 건축 역사를 하면서 좌절과 한계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칠 때 강한 자아가 많이 깨졌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목자님들도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민과 갈등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도록 하십니다. 갈등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이 준비가 됩니다. 인간이 멈춘 곳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6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바로가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강압하고, 하나님은 바로를 더 강압하십니다. 1-8절 사이에는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속량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별과 같이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을 주기로 맹세했는데 이제 그 땅으로 그 자손을 인도하여 그들의 기업으로 삼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극히 강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속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속량한다는 말은 일단 매각한 것을 다시 사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게 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사들이고자 하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신 일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좌절한 상황을 통해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어냄으로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마음의 상함이란 문자적으로는 “숨이 짧아서”입니다. 어려움과 실망에 인내력을 잃고 초조해지고 성질이 급해진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 해방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모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듣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의 믿음이 불신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즉각적인 해방을 기대했다가 해방은 고사하고 고역만 가중됨으로 모세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모세를 한낮 몽상가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1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번째 바로 왕에게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사흘길”이란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완고해짐으로 요구하는 편에서도 강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어찌 듣겠습니까?(12).” 논리적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의 마음이 약해진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입이 둔한 자라고 또 그 소리를 합니다. ‘입이 둔하다는 말’은 ‘할례 받지 못한 입’이라는 뜻인데 이는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비하를 하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 내 힘으로는 바로를 설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내 말을 안 듣는 것을 통해 무능한 자신, 하찮은 자신을 탄식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안 되고, 도전한 것이 실패하고, 희망이 좌절할 때 자신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무능력을 탓하고 자기를 비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우리는 이런 좌절을 경험합니다.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할 때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바로를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설득해야 하고 내가 논리적인 말을 해야 하고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바로가 말을 듣겠는가 라는 뜻입니다. 바로는 점점 더 커 보이고 자신은 점점 더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괴롭고 이런 자신이 못나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셔서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면 될텐데 왜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게 말하라고 하실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하면 바로는 꼼짝 못하고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을 세워서 그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선택하여 유력한 것들을 멸하셨습니다(고전1:27-29).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보다 그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사람에게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종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들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족보가 나오고 30절에서 다시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할례 받지 못한 입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족보는 레위지파의 가문이었습니다. 현재는 레위 지파라고 해서 별로 주목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고 이후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됨으로 후대에서 볼 때 이 족보는 귀하고 존경스러운 엄청난 지파로 표현된 것입니다. 모세는 족보 앞뒤로 자신을 비하하고 있지만 사실 모세와 아론은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귀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내가 하리라 :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7장 1-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내’라는 말씀을 열한 번 반복해서 하십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이 중에서 ‘내가 한다’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입이 둔해도 됩니다. 모세의 입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능력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세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모세가 힘들었던 것은 출애굽 역사를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부담감이 생기고 마음이 눌리고 자기 비하를 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고 아론은 대변자로 세우고 바로가 의지하는 것들을 다 부수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십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옆에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참여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려야 합니다.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면 연약하거나 부족하면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내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쓰십니다. 건축 역사도 내 돈을 내서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여지를 주어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일에 우리가 할 일은 모세와 아론처럼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가면 됩니다. 가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나의 필요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워주십니다. 또 우리는 가서 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순종하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고 전심으로 순종하여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모세와 아론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주저한 모세는 이제 마음과 몸을 기울여 하나님의 명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이 크고 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믿음으로 드릴 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쓰시는 것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때 그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 말씀 출애굽기 5:1-7:7
◆ 요절 출애굽기 7:4
네가 아니라 ‘내’가 하리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내적 외적 어려움과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런 문제들 앞에서 갈등하고 분열할 수도 있고 문제를 극복하고 더욱 강하고 성숙하게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높고 도전이 강하고 클수록 어려움과 갈등도 클 것입니다. 모세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왕에게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말합니다. 첫 대면에서 모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됩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는 좌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소명을 새롭게 하시면서 출애굽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의 도전 :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근엄한 목소리로 바로 왕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못하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애굽의 경제를 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놓아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최대한 부려먹고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길 백성이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당장 놓아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고대에는 민족과 신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예들의 신이었습니다. 힘없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신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태양신인 ‘라’신의 노예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신의 말을 내가 왜 듣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합니다. 노예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둘째, 바로의 저항 : 철저한 바로의 무시 앞에 모세와 아론은 부드러운 말로 설득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3).” 그들은 바로 왕의 수준에서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들이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시간이 많으니 헛생각을 한다고 판단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혹한 노동을 시킵니다. 바로가 그 날의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을 내려 그들에게 벽돌에 쓸 짚을 주지 말고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고 합니다. 벽돌에 2-5 센티미터의 짚을 넣지 않으면 단단한 벽돌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짚 없이 만든 벽돌은 쉽게 부서져서 쓸모없게 됩니다. 짚이 부족해서 진흙에 조금 넣으면 불량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당연히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휴식 시간도 없이 일할 뿐만 아니라 야근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의 감독들은 그들이 벽돌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자 자기들이 세운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는 거야!” 위협하면서 몽둥이와 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비돔성의 옛 터에 관한 고고학자 카일(Kyle) 교수의 보고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성의 아랫부분은 짚을 섞어 구운 벽돌로 쌓고, 가운데부분은 곡초의 그루터기를 섞어 구운 벽돌로 쌓고, 윗부분은 아무 것도 섞지 않고 흙으로만 구운 벽돌로 쌓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중한 업무를 주어서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모세가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9). 모세가 허황된 말을 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과 모세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모세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영적 권위를 파괴하고 지도력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와 서로 싸우다가 지리멸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의 문제가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합니다.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에게 짚은 주지 아니하고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이니다(15,16).” 그들은 스스로를 바로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노예 의식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당연히 애굽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로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감독들이 이스라엘인에게 부당하게 구타를 행한다고 말합니다. 왕의 백성을 이스라엘로 보면 바로 당신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실수하고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이런 수난이 닥친다는 것은 당신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바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자기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현실 문제와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감소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는 더욱 강하게 몰아세웁니다. 아니 자기 계획이 들어맞은데 대한 쾌감의 함성일지 모릅니다. “이 게으른 놈들. 너희가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거야! 이제 가서 일이나 해. 짚은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수량대로 채워야 해!” 기록원들은 자기들의 몸에 화가 미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좌절과 원망 : 그들은 바로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던 모세와 아론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자기들을 모세와 아론이 와서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감독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칼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합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 모세는 자기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했는데 백성들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으로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앞장서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지도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왕에게 거절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고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주저앉았습니까? 일하기 힘들다고 포기했습니까? 모세는 백성들에게 변명하거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돌아와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23).” 그는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 대한 긍휼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는 마음에 힘든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안 간다고 했잖습니까? 안 가겠다는데 자꾸 가라고 하시고 억지로 끌고 오시더니 이게 뭡니까? 이런 꼴을 보게 하시려고 저를 데려오셨습니까? 저로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기대를 크게 걸었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는 출애굽에 대한 원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서 바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혹독한 강제 노동, 중노동뿐이었습니다.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 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은 꼬이고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희망이 좌절로 바뀌었습니다. 바로의 강한 힘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어설 수 없는 한계, 벽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원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의욕적으로 하려다가, 좋은 일을 하려다가 꺾일 때 좌절감을 느낍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큰 벽 앞에 부딪칠 때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좌절은 끝이 아닙니다. 좌절했다고 끝난 것도 아닙니다. 잠시의 좌절일 뿐입니다. 사람은 좌절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좌절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최근에는 건축 역사를 하면서 좌절과 한계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칠 때 강한 자아가 많이 깨졌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목자님들도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민과 갈등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도록 하십니다. 갈등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이 준비가 됩니다. 인간이 멈춘 곳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6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바로가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강압하고, 하나님은 바로를 더 강압하십니다. 1-8절 사이에는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속량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별과 같이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을 주기로 맹세했는데 이제 그 땅으로 그 자손을 인도하여 그들의 기업으로 삼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극히 강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속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속량한다는 말은 일단 매각한 것을 다시 사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게 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사들이고자 하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신 일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좌절한 상황을 통해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어냄으로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마음의 상함이란 문자적으로는 “숨이 짧아서”입니다. 어려움과 실망에 인내력을 잃고 초조해지고 성질이 급해진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 해방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모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듣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의 믿음이 불신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즉각적인 해방을 기대했다가 해방은 고사하고 고역만 가중됨으로 모세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모세를 한낮 몽상가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1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번째 바로 왕에게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사흘길”이란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완고해짐으로 요구하는 편에서도 강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어찌 듣겠습니까?(12).” 논리적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의 마음이 약해진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입이 둔한 자라고 또 그 소리를 합니다. ‘입이 둔하다는 말’은 ‘할례 받지 못한 입’이라는 뜻인데 이는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비하를 하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 내 힘으로는 바로를 설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내 말을 안 듣는 것을 통해 무능한 자신, 하찮은 자신을 탄식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안 되고, 도전한 것이 실패하고, 희망이 좌절할 때 자신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무능력을 탓하고 자기를 비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우리는 이런 좌절을 경험합니다.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할 때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바로를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설득해야 하고 내가 논리적인 말을 해야 하고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바로가 말을 듣겠는가 라는 뜻입니다. 바로는 점점 더 커 보이고 자신은 점점 더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괴롭고 이런 자신이 못나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셔서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면 될텐데 왜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게 말하라고 하실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하면 바로는 꼼짝 못하고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을 세워서 그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선택하여 유력한 것들을 멸하셨습니다(고전1:27-29).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보다 그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사람에게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종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들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족보가 나오고 30절에서 다시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할례 받지 못한 입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족보는 레위지파의 가문이었습니다. 현재는 레위 지파라고 해서 별로 주목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고 이후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됨으로 후대에서 볼 때 이 족보는 귀하고 존경스러운 엄청난 지파로 표현된 것입니다. 모세는 족보 앞뒤로 자신을 비하하고 있지만 사실 모세와 아론은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귀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내가 하리라 :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7장 1-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내’라는 말씀을 열한 번 반복해서 하십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이 중에서 ‘내가 한다’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입이 둔해도 됩니다. 모세의 입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능력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세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모세가 힘들었던 것은 출애굽 역사를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부담감이 생기고 마음이 눌리고 자기 비하를 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고 아론은 대변자로 세우고 바로가 의지하는 것들을 다 부수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십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옆에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참여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려야 합니다.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면 연약하거나 부족하면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내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쓰십니다. 건축 역사도 내 돈을 내서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여지를 주어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일에 우리가 할 일은 모세와 아론처럼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가면 됩니다. 가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나의 필요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워주십니다. 또 우리는 가서 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순종하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고 전심으로 순종하여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모세와 아론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주저한 모세는 이제 마음과 몸을 기울여 하나님의 명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이 크고 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믿음으로 드릴 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쓰시는 것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때 그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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