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09년 출애굽기3강(3,4장)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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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애굽기 공부 3강
◆ 말씀 출애굽기 3-4장
◆ 요절 출애굽기 3:7,8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롭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 한 사람을 80년 동안 준비시키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3:1-5)
모세는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다보니 광야 서쪽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전 제 2위의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했습니다. 모세의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불구경하는 것은 재미가 있습니다. 활활 타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하여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사라지지 않는고 하고 돌이켜 가서 보고자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모세의 나이는 팔십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희망도 없이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말도 그 많던 지식도 잊어버리고 야망도 사라졌습니다. 애굽 왕자로서의 자존심도 사라지고 일개 천한 목동으로서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쓸쓸히 인생을 마감해야 할 나이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슬픕니다. 또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생각할 때 인생무상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자신과 동역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가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칠십 오세에 부르셨지만 사무엘은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 부르셨습니다.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 그의 나이, 능력, 성품,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가를 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십이나 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성품을 평가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애굽의 궁중에서 갈고 닦은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40년간 충성스럽게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적당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80년간 준비시킨 일꾼이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꽃이 타올랐다는 것은 떨기나무와 같이 앙상하고 천하게 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이 불꽃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청년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꿉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 왕과 싸우는 투사가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어떤 요구를 하셨습니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자세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권능의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이십니다. 그는 선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가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우리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행위를 상징합니다. 자기 의와 교만한 마음, 절망과 불신의 마음, 그 동안의 삶에 대해서 헛되게 생각하는 마음, 탐욕과 정욕 등 죄의 신을 벗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둘째, 함께 하시는 하나님(6-2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 만민을 복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이제 모세 너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보이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하십니다. 7,8절에는 많은 동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우리의 형편을 보고 계시는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시는가? 알고 계신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 많은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자기들이 고통을 당할 때 보지도 않으시고 듣지도 않으시고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 속에서, 모세는 광야 생활 속에서 버려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떨어진 곳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내 삶에 들어와 계시고 성육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는 여러분의 사정을 아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고, 바쁜 가운데서 역사에 헌신하고, 자신도 고난 가운데 있지만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아십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을 섬길 때 그 진심과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형제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마음을 아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일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바로의 손에서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 그에게 속한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일에 모세를 쓰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이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쫓기는 몸입니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애굽 왕 바로를 이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 한 명 죽이고 사십 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바로를 대상으로 싸울 수 있겠는가? 또 그가 인도해야 할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야말로 양식도 예절도 없는 노예 백성이 아닙니까? 모세는 분명히 나쁜 짓을 하는 자기 동족에게 충고하다가 무서운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라고 하시는 일 두 가지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주인 없는 땅이 아니고 정말 강한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간단 말입니까? 그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아직 두려움과 실패의식이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시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질문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능력에 대해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십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또는 I AM THAT I AM”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분이시고 너희와 함께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네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는 뜻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죽음과 학대와 어두움의 땅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광야에 내팽개쳐진 것으로 생각하는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느 곳에 어떤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너희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도 함께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 있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그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우리가 일생 동안 추구해야할 주제입니다. 바울도 일생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권위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를 세우셨기 때문에 바로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신이야말로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때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지팡이(4:1-31)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세우셨는데 모세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4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는 40년 전에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믿지 아니하며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부인하면 자기는 무엇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먼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지팡이라고 대답하자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가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는 코브라가 되었습니다. 코브라는 3미터 밖에서도 정확하게 독을 쏘아서 죽입니다. 모세가 뱀 앞에서 두려워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을 잡으려면 머리를 쳐야 하는데 하나님은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속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그가 속두려움을 극복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그것이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모세에게 나타났음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가 넣었더니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되었습니다. 다시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시자 그가 넣었더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이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고 하십니다(9).
하나님께서 세 가지 이적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들은 코브라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 뱀 신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독한 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왕의 머리에는 코브라 왕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독한 독사나 독사의 신이 모세의 손에서 딱딱한 지팡이로 변하는 기적을 통해, 그리고 문둥병 걸린 손을 치료함으로 애굽의 그 어떤 악한 것이나 신의 저주도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을 해치지 못할 것을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위대한 구원자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시 몸을 뒤로 뺍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1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으시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래도 모세가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모세가 너무 오래 못 가겠다고 버티자 하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급하게 움직일 시간이 되었는데 모세가 자꾸 뭉그적거리자 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 아론을 대변자로 붙여주셨습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하나님의 명령에 거절할까요? 마음 속에 속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는 40년이 지나면서 희망이 다 꺾여버렸습니다. 그는 정말 소망이 없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오순도순 살면서 희생하기 싫었습니다. 이기적이었습니다. 일을 벌이기가 싫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병든 내면이 치료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모세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서 80년을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적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가 계속 발뺌을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도우셔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 대한 사랑이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믿음을 주시고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자로 부르시고 구원 역사에 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이제 캠퍼스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돌봐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가가면 그들은 자석에 쇠붙이가 따라오듯 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친히 역사하십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 지팡이는 그가 이제까지 광야에서 사용했던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그의 손에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그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마른 지팡이가 무슨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열 가지 이적도 행하고 홍해도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생수가 솟구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였지만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다윗도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자신을 지탱합니다. 저는 상처를 받을 때 성경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제가 방황할 때에 갈 길을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쓰시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말하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고 애굽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다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순종하여 나아가는데 숙소에서 거칠게 다가와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갑자기 모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던지 질병이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부를 때는 언제고 이제 나아가는데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변덕이 그렇게 심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까지 뻐팅겼다고 화가 나서 복수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 돌발사태의 원인을 우리는 25,2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을 소홀히 여긴 까닭은 아마 이방인 부인 십보라의 고집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보라는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피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의 가정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철저히 성별하신 것입니다. 그를 쓰시기 전에 철저하게 바른 위치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그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18:2). 모세는 혼자서 애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간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사 일이 순적하게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자기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80년 동안 궁중 교육과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뒤로 빼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소망 가운데 도우시고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이 시대 출애굽 역사를 섬기는 구원 역사의 주인공들로 귀히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말씀 출애굽기 3-4장
◆ 요절 출애굽기 3:7,8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롭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 한 사람을 80년 동안 준비시키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3:1-5)
모세는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다보니 광야 서쪽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전 제 2위의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했습니다. 모세의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불구경하는 것은 재미가 있습니다. 활활 타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하여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사라지지 않는고 하고 돌이켜 가서 보고자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모세의 나이는 팔십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희망도 없이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말도 그 많던 지식도 잊어버리고 야망도 사라졌습니다. 애굽 왕자로서의 자존심도 사라지고 일개 천한 목동으로서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쓸쓸히 인생을 마감해야 할 나이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슬픕니다. 또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생각할 때 인생무상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자신과 동역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가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칠십 오세에 부르셨지만 사무엘은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 부르셨습니다.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 그의 나이, 능력, 성품,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가를 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십이나 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성품을 평가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애굽의 궁중에서 갈고 닦은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40년간 충성스럽게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적당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80년간 준비시킨 일꾼이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꽃이 타올랐다는 것은 떨기나무와 같이 앙상하고 천하게 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이 불꽃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청년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꿉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 왕과 싸우는 투사가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어떤 요구를 하셨습니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자세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권능의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이십니다. 그는 선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가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우리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행위를 상징합니다. 자기 의와 교만한 마음, 절망과 불신의 마음, 그 동안의 삶에 대해서 헛되게 생각하는 마음, 탐욕과 정욕 등 죄의 신을 벗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둘째, 함께 하시는 하나님(6-2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 만민을 복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이제 모세 너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보이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하십니다. 7,8절에는 많은 동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우리의 형편을 보고 계시는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시는가? 알고 계신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 많은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자기들이 고통을 당할 때 보지도 않으시고 듣지도 않으시고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 속에서, 모세는 광야 생활 속에서 버려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떨어진 곳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내 삶에 들어와 계시고 성육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는 여러분의 사정을 아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고, 바쁜 가운데서 역사에 헌신하고, 자신도 고난 가운데 있지만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아십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을 섬길 때 그 진심과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형제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마음을 아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일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바로의 손에서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 그에게 속한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일에 모세를 쓰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이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쫓기는 몸입니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애굽 왕 바로를 이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 한 명 죽이고 사십 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바로를 대상으로 싸울 수 있겠는가? 또 그가 인도해야 할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야말로 양식도 예절도 없는 노예 백성이 아닙니까? 모세는 분명히 나쁜 짓을 하는 자기 동족에게 충고하다가 무서운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라고 하시는 일 두 가지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주인 없는 땅이 아니고 정말 강한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간단 말입니까? 그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아직 두려움과 실패의식이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시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질문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능력에 대해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십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또는 I AM THAT I AM”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분이시고 너희와 함께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네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는 뜻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죽음과 학대와 어두움의 땅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광야에 내팽개쳐진 것으로 생각하는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느 곳에 어떤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너희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도 함께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 있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그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우리가 일생 동안 추구해야할 주제입니다. 바울도 일생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권위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를 세우셨기 때문에 바로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신이야말로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때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지팡이(4:1-31)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세우셨는데 모세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4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는 40년 전에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믿지 아니하며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부인하면 자기는 무엇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먼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지팡이라고 대답하자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가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는 코브라가 되었습니다. 코브라는 3미터 밖에서도 정확하게 독을 쏘아서 죽입니다. 모세가 뱀 앞에서 두려워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을 잡으려면 머리를 쳐야 하는데 하나님은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속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그가 속두려움을 극복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그것이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모세에게 나타났음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가 넣었더니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되었습니다. 다시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시자 그가 넣었더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이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고 하십니다(9).
하나님께서 세 가지 이적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들은 코브라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 뱀 신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독한 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왕의 머리에는 코브라 왕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독한 독사나 독사의 신이 모세의 손에서 딱딱한 지팡이로 변하는 기적을 통해, 그리고 문둥병 걸린 손을 치료함으로 애굽의 그 어떤 악한 것이나 신의 저주도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을 해치지 못할 것을 기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위대한 구원자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시 몸을 뒤로 뺍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1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으시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래도 모세가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모세가 너무 오래 못 가겠다고 버티자 하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급하게 움직일 시간이 되었는데 모세가 자꾸 뭉그적거리자 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 아론을 대변자로 붙여주셨습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하나님의 명령에 거절할까요? 마음 속에 속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는 40년이 지나면서 희망이 다 꺾여버렸습니다. 그는 정말 소망이 없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오순도순 살면서 희생하기 싫었습니다. 이기적이었습니다. 일을 벌이기가 싫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병든 내면이 치료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모세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서 80년을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적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가 계속 발뺌을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도우셔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 대한 사랑이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믿음을 주시고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자로 부르시고 구원 역사에 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이제 캠퍼스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돌봐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가가면 그들은 자석에 쇠붙이가 따라오듯 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친히 역사하십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 지팡이는 그가 이제까지 광야에서 사용했던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그의 손에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그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마른 지팡이가 무슨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능력의 지팡이가 됩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열 가지 이적도 행하고 홍해도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생수가 솟구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드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였지만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다윗도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저는 힘들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자신을 지탱합니다. 저는 상처를 받을 때 성경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은 제가 방황할 때에 갈 길을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쓰시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말하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고 애굽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다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순종하여 나아가는데 숙소에서 거칠게 다가와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갑자기 모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던지 질병이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부를 때는 언제고 이제 나아가는데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변덕이 그렇게 심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까지 뻐팅겼다고 화가 나서 복수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 돌발사태의 원인을 우리는 25,2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을 소홀히 여긴 까닭은 아마 이방인 부인 십보라의 고집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보라는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피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의 가정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철저히 성별하신 것입니다. 그를 쓰시기 전에 철저하게 바른 위치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그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18:2). 모세는 혼자서 애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간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사 일이 순적하게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자기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80년 동안 궁중 교육과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뒤로 빼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소망 가운데 도우시고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이 시대 출애굽 역사를 섬기는 구원 역사의 주인공들로 귀히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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