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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09년 출애굽기2강(2장) 왕자에서 나그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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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378회 작성일 09-02-1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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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애굽기 공부 2강                                                        말씀 출애굽기 2:1-25요절 출애굽기 2:22

왕자에서 나그네로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아들 하나를 얻는데 25년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이삭도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얻는데 이십년이 걸렸습니다. 야곱도 열 두 아들을 얻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철저하게 연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이주 한 후에 그들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큰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전 세계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까지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노예근성이 생겨서 거룩한 백성으로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탈출했지만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광야에서 하나님의 불같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오늘 공부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자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백성들의 구원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왜 나는 변화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애굽기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광야 훈련을 시키십니까?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습니다. 사도행전 7:20절에는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아기는 부모들 보기에 특별한 뜻이 있는 아이 같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백일이 지나자 더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지고 활동량이 많아지자 당국에 발각될 위험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아기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에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방주에는 항해에 필요한 키나 키잡이가 없었습니다. 방주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대 상자 안에 있는 아기의 운명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게벳은 한계 상황 속에서 자기가 감당할 한도를 넘자 하나님을 믿고 아기를 버리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아들을 나일 강변에 버리면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한탄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딸 미리암을 보내 어떻게 되는지 알려고 멀리서 지켜보게 했습니다. 미리암은 당시 15살 쯤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미리암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나일 강은 축복과 다산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여인들이 목욕을 하러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시녀들은 바로 공주를 호위하는 여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갈대 상자를 먼저 발견했다면 아기의 생명은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 빠르게 바로 공주가 갈대 사이에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공주를 몸소 시중하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왔던 자기의 몸종을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바로 공주가 갈대 상자를 열었을 때 아기가 응애 응애 응애애애 하고 애절하게 울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을 듣자 공주의 모성애가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비록 히브리인의 아기지만 민족 감정을 넘어 순수하게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왕의 유아 살해 명령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가운데 있을 때에 민첩하게 아기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러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참으로 시기적절한 방책이었습니다. 바로의 딸이 이를 허락하자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바로의 딸은 그에게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떠나보낸 아이가 품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무척 극적입니다. 바로의 책략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로는 자기 가슴에 꽂힐 비수를 갈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순간, 절망의 무게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순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1,2장에 나오는 여인들은 가장 어두운 때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요게벳의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미리암의 민첩한 순종, 바로 공주의 민족 감정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한 인물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까?
첫째, 어머니 요게벳을 통한 신앙 교육 : 모세의 어머니는 양육비를 받고 아기를 신앙적으로 양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린 나머지 자녀를 양육할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어엿이 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모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는 놀랍습니다. 모세가 나중에 애굽의 우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정의를 따르며 동족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경건한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교육, 가정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교육을 어떻게 받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행로가 결정됩니다. 특히 교육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미비했던 당시 상황에서 가정교육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의 기질과 성격은 1-3세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투철한 레위인 어머니 밑에서 모세는 신앙 인격을 마음 깊은 곳에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바로의 서슬 푸른 엄명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궁중에서는 주워온 히브리 아이를 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 유모를 고용해서 모세를 기르게 했습니다. 이 공주는 투트모스 1세인 무남독녀 하세푸세트로 추측이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버지가 죽고 난후 남편 투트모스 2세 치하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모세를 강에서 주워 자신의 양자로 입양을 시켰던 것입니다. 모세가 살인을 저지른 후 도망을 칠 때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하세푸세트의 영향으로 생각됩니다. 투트모스 2세가 일찍 죽자 모세를 입양시킨 하세푸세트가 실권을 장악했고 아울러 모세의 지위도 격상되었습니다. 그러자 하세푸세트에 눌려 섭정기에 있었던 야심찬 투트모스 3세는 자신의 확고한 왕권 구축을 위해서 최대의 정적인 모세를 제거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둘째, 바로의 공주를 통한 궁중 교육 : 아이가 자라서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자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어로 모우세스인데 ‘모’는 ‘물’이란 뜻이고 ‘우세스’는 ‘건져냄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원래 이름이자 애굽식 이름인 ‘모우세스’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애굽 공주가 아이를 물에서 건져낸 것을 기념하여 붙여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굽식 이름은 히브리인들의 발음에 따라 히브리식으로 고쳐졌는데 그 뜻은 ‘건져내는 자’란 뜻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이름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강 즉 나일 강에서 ‘건지움을 받은’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굴종과 예속의 땅인 애굽에서 구출하여 ‘건져내야’ 할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은 자만이 다른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 궁중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행7:22). 여기서 학술이란 철자법, 문법, 역사, 수학,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통칭합니다. 그는 통치자로서 경영학, 전술학, 군사학, 외교술, 외국어 등등 지도자로서 최고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습니다. 그는 장성한 나이가 되기까지 40년 동안 궁중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제반 국정에 참여할 위엄과 지략을 충분히 갖추었을 것입니다. 궁중 교육은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향후 40년간 미디안 광야 생활을 통해서 배워야 할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셋째, 광야 훈련 :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장성했다는 말은 나이 40세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방향도 잡혔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늘 동족의 고통스러운 노역을 속으로 체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왕궁을 빠져나가 고통당하는 동족의 근황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영예와 보화를 마다하고 동족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던 결단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결단을 하게 된 것은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전해들은 여호와 신앙과 히브리 역사에 깊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족들의 혹독한 노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치는 것은 평범한 구타가 아니라 죽도록 치고 있는 중인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마음에 의분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을 위해서 일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욕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물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그 싸움에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고 따졌습니다.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어제 살해한 애굽인을 감쪽같이 숨겨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족의 이 폭로성 발언에 당혹하였습니다. 행 7:25절에 보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민족혼이 생겨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해보고자 했지만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왕궁에서 곱게 자란 모세를 노예 생활을 하면서 죽도록 고생하는 그들이 지도자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과 모세 사이에 동질성이 느껴지지 않고 공감대가 형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백성들 사이에 동질감을 갖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떻게 훈련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친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치고,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을 치고, 모세는 애굽 사람을 치고, 히브리 사람들은 같은 히브리 사람을 칩니다. 한마디로 치고 치는 시대입니다. 치는 것이 문제 해결 방법인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모세도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려 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모세에게는 힘이 있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면 동족들에게 환영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힘이 없어서 노예 생활을 하는데 힘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지 않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힘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환호하며 영접합니다. 그를 지도자로 추대합니다. 이스라엘도 모세를 중심으로 뭉쳐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 대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자기 동족이 자기에게 좋게 대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세를 인정하지도 않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에게 발각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리더가 되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예상 밖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치고, 바로를 쳐서 죽이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세의 혈기, 인간적인 힘, 교만이 들어가 있습니다. 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만이 치실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그 자신이 새로운 체험과 변화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과 인간의 아름다운 순종과 용서하는 사랑이 위대한 구원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모세는 급히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지만 준비가 부족한 그를 하나님께서 쓰실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는 권력 싸움에서 밀리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편에서 볼 때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은 은혜를 악으로 갚은 것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애굽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패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80세까지 광야 훈련을 시키면서 준비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준비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나 결과를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 조급해 집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한 우물에서 처녀 목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났고, 야곱은 아내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습니다. 모세 역시 아내 십보라를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물가는 아름다운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모세가 만난 처녀들은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고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의분이 발동하여 애굽 궁중에서 익힌 무예로 목자들을 물리치고 처녀 목자들을 도와서 그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이 처녀들은 아직 어렸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모세가 비록 그들을 도와주었지만 외간 남자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답례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은 딸들이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이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의 말이 한 애굽 사람이 자기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자기들을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철없는 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이렇게 하여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버림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르우엘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방랑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이곳에 있지만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족들이 있는 애굽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 백성 이스라엘과 동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모세는 이스라엘과 혈통은 같았지만 동질감이 없었습니다.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들에게 가까이 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랑자의 생활을 하면서 애굽에서 나그네가 된 이스라엘과 동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삶이 나그네로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도자로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깨어지게 하시고 무너져 내리게 하셨습니다. 양과 함께 40년을 생활하면서 말도 어눌해 지고 혈기도 다 빠지고 교만한 마음도 다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 깊이 깨닫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쉽게 무기력해질 수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곧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그러나 그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15:5). 모세는 이 사실을 인식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나설 그에게는 절대로 필요했던 신앙 및 인격 수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광야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그 지리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40년은 하나님의 연단 기간이었습니다.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 육체적으로 광야 생활에 익숙하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영적으로는 모세로 하여금 순종과 겸손 및 자아를 철저히 깨닫도록 하는 하나님의 광야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의 40년간을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 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어떤 일도 해 나갈 수 있는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나 자신의 무기력을 탓하며 세월을 보내는 고독한 방랑자입니까? 그렇다면 모세처럼 때를 기다리며 기도와 영적 무장으로 준비하는 인내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는 동안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여기에 하나님이 네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으신 것 같고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는 일들이 안 될 때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 같은 생각이 듭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과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삶에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고자 준비시키십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께서 쓰시기 좋은 모습으로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마음이 되고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유해 가고 있습니다. 당장 눈 앞의 현실이 이해가 안 되고 하나님이 잘 안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이 넘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 한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며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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