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9마태 46강(25:31-46)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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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태복음 제 46 강
말씀 마태복음 25:31-46
요절 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이어 오늘 말씀을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시기 3일 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일을 엄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분명하게 있을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십니다. 주님께서 구분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행동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미래에 있을 심판을 기억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한 우리 속에 있는 양과 염소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은혜의 보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과 땅의 통치권을 다 받으시고 심판을 하십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오른편은 의로운 자리, 복된 자리요 왼편은 저주받은 자리, 불의의 자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된다면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무기력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냅니다.
목자는 양을 칠 때에 양 무리 속에 염소를 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리가 양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때에 양들은 공격용 무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있지만 염소는 뿔로 들이 받습니다. 그렇게 염소가 저항할 때에 목자가 양들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 보호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염소도 필요하기 때문에 양 무리 속에 있게 하십니다.
원양어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는 고기를 잡아서 살아 있는 채 육지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어부들이 그 일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는 항상 싱싱하고 팔팔하게 살아 있는 고기들을 납품해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부들이 하도 신기해서 그 비결을 캐물었습니다. 그는 뜸을 들이다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족관 속에다 메기를 한 마리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물고기들이 활발하게 헤엄을 치기 때문에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한 고기를 납품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양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염소가 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37절을 보면 양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 44절에 보면 염소들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묻습니다. 둘 다 예수님께 주여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신앙 고백만 가지고는 진정한 구별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믿음과 선행이 모순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숙하여 질 때 사랑으로 말미암는 선행을 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앙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롬10:10).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랑 고백이라도 말만하고 실천이 따르지 아니하면 공허한 것입니다. 사랑 고백에 따르는 행함이 없으면 그 고백에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사랑 고백을 백번 하는 것보다 힘든 아내를 위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해주고 청소를 해 주고 등이라도 두드려주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는 작지만 사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편에 있는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염소로 구분된 자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로서 영벌에 이르게 된다면, 양으로 구분된 그들은 의인으로서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상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늘날 그들이 한 일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주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이불이었습니다. 중산층이 하루 한 끼를 먹고 살았습니다.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옥에 갇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의인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먹이고 마시우고 입혔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했을 뿐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로 겸손하게 은혜로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습관적이고 규칙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한 작은 일들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한 것으로 매우 크게 여기십니다. 임금님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이 풍족한 임금님께 무엇인가를 만족스럽게 해 드리려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하겠습니까? 그런데 임금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동일시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은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자신을 교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겸손이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0:40-42절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에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하고 어여쁘게 여겨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자매들, 자신의 생명 까지도 아낌없이 주고 구원하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있는 지 없는지 표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멋지게 다니는 학생들을 겉으로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이들을 보면 어떠합니까? 깨어진 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실용적인 학문들뿐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굶주려 있습니다. 목말라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아모스 8:11-13).” 젊은이들이 죄와 사탄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병이 깊습니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힘들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선교 역사를 지원하고 북한 동포들을 옥수수로 구제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약정하고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이런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많이 할 것을 하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캠퍼스의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돕고 있습니다. 특히 죄의 병을 깨닫고 고침을 받도록 돕고 있습니다. 장차 이들이 세계를 섬길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훈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먹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광주 3부 박다윗 목자님의 간증을 들을 때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사요 교수요 평신도 목자로서 매우 바쁜 가운데서도 일대일을 하고 주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 자기의 오병이어를 드렸습니다.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지만 간절했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과 사랑을 받으시고 넘치게 축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작은 자 하나를 섬길 때 풍성함이 더해지고 즐거움이 생깁니다. 또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형제들에게 행한 것들인데도 주님은 이를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작지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셋째, 심판에 대비하려면 : 한편 임금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십니까? 41절을 보십시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들이 이런 벌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금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42,43). 42-43절에 “아니하였고”라는 말이 다섯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의 기준은 그들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비록 남에게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로는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법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정하고 무관심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이는 깊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서 임금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들은 황당하였습니다. 임금님이 그런 어려운 일에 처하시게 되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형제에게 무관심했던 이들에게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사람에게 무신경한 자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그 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신경을 꺼버리는 것은 심판에 이를 큰 죄입니다.
군포 여대생 살해범 강호순은 부녀자 7명을 죽였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다른 가치는 사라지고 오로지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사회, 공동체의 해체, 약육강식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 등이 이런 범죄를 낳는다고 합니다. 마을, 동네 개념이 사라지면서 개인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결속시킬 수 있는 끈이 없어지면서 이런 범죄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무관심한 죄, 무정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관심에서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동역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대화를 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야겠습니다. 형제가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을 해야 합니다.
왼편에 서게 된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를 왜 섬기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내면이 염소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무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문제에 너무 집착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지극히 작은 자요 불쌍한 사람이라며 사랑을 해 주지 않는다고 삐져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그들은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추운 사람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의 아픔을 몰랐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입히는 것이 떼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가 있습니까? 아니면 더 많은 물질을 모으는데 가 있습니까?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즐기는 일에 가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성공에 가 있습니까?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의 고통에는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자리 잡지 아니하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식과 아내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양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 일에 마음이 가 있으면 어떻게 그를 살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심판을 받으면 하나님의 존전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됩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원히 마귀와 그 졸개들과 함께 살면서 시달려야 합니다. 마귀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을 심고 미움을 심고 악을 자행합니다. 이런 악령들에게 시달리면서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인마 강호순은 자기를 절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두려워서 밤마다 한 방에 모여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마귀와 같이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지옥과 그 고통에 대해서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기억할 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양과 함께 염소와 같은 기질이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기분이 안 맞으면 들이받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성을 부인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심판을 기억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내 속에 있는 염소와 같은 기질을 인식하고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현재 염소와 같다할지라도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양과 같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입니까? 마음을 다해서 그를 사랑하고 섬기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사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말씀 마태복음 25:31-46
요절 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이어 오늘 말씀을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시기 3일 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일을 엄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분명하게 있을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십니다. 주님께서 구분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행동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미래에 있을 심판을 기억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한 우리 속에 있는 양과 염소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은혜의 보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과 땅의 통치권을 다 받으시고 심판을 하십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오른편은 의로운 자리, 복된 자리요 왼편은 저주받은 자리, 불의의 자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된다면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무기력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냅니다.
목자는 양을 칠 때에 양 무리 속에 염소를 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리가 양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때에 양들은 공격용 무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있지만 염소는 뿔로 들이 받습니다. 그렇게 염소가 저항할 때에 목자가 양들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 보호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염소도 필요하기 때문에 양 무리 속에 있게 하십니다.
원양어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는 고기를 잡아서 살아 있는 채 육지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어부들이 그 일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는 항상 싱싱하고 팔팔하게 살아 있는 고기들을 납품해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부들이 하도 신기해서 그 비결을 캐물었습니다. 그는 뜸을 들이다가 그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족관 속에다 메기를 한 마리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물고기들이 활발하게 헤엄을 치기 때문에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한 고기를 납품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양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염소가 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37절을 보면 양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 44절에 보면 염소들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묻습니다. 둘 다 예수님께 주여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신앙 고백만 가지고는 진정한 구별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믿음과 선행이 모순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숙하여 질 때 사랑으로 말미암는 선행을 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앙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롬10:10).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랑 고백이라도 말만하고 실천이 따르지 아니하면 공허한 것입니다. 사랑 고백에 따르는 행함이 없으면 그 고백에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사랑 고백을 백번 하는 것보다 힘든 아내를 위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해주고 청소를 해 주고 등이라도 두드려주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는 작지만 사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편에 있는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염소로 구분된 자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로서 영벌에 이르게 된다면, 양으로 구분된 그들은 의인으로서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상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늘날 그들이 한 일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주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이불이었습니다. 중산층이 하루 한 끼를 먹고 살았습니다.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옥에 갇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의인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먹이고 마시우고 입혔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했을 뿐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로 겸손하게 은혜로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습관적이고 규칙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한 작은 일들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한 것으로 매우 크게 여기십니다. 임금님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이 풍족한 임금님께 무엇인가를 만족스럽게 해 드리려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하겠습니까? 그런데 임금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동일시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은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자신을 교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겸손이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0:40-42절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에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하고 어여쁘게 여겨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자매들, 자신의 생명 까지도 아낌없이 주고 구원하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있는 지 없는지 표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멋지게 다니는 학생들을 겉으로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이들을 보면 어떠합니까? 깨어진 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실용적인 학문들뿐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굶주려 있습니다. 목말라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아모스 8:11-13).” 젊은이들이 죄와 사탄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병이 깊습니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힘들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선교 역사를 지원하고 북한 동포들을 옥수수로 구제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약정하고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이런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많이 할 것을 하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캠퍼스의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돕고 있습니다. 특히 죄의 병을 깨닫고 고침을 받도록 돕고 있습니다. 장차 이들이 세계를 섬길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훈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먹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광주 3부 박다윗 목자님의 간증을 들을 때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사요 교수요 평신도 목자로서 매우 바쁜 가운데서도 일대일을 하고 주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 자기의 오병이어를 드렸습니다.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지만 간절했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과 사랑을 받으시고 넘치게 축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작은 자 하나를 섬길 때 풍성함이 더해지고 즐거움이 생깁니다. 또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형제들에게 행한 것들인데도 주님은 이를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작지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셋째, 심판에 대비하려면 : 한편 임금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십니까? 41절을 보십시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들이 이런 벌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금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42,43). 42-43절에 “아니하였고”라는 말이 다섯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의 기준은 그들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비록 남에게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로는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법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정하고 무관심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이는 깊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서 임금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들은 황당하였습니다. 임금님이 그런 어려운 일에 처하시게 되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형제에게 무관심했던 이들에게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사람에게 무신경한 자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그 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신경을 꺼버리는 것은 심판에 이를 큰 죄입니다.
군포 여대생 살해범 강호순은 부녀자 7명을 죽였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다른 가치는 사라지고 오로지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사회, 공동체의 해체, 약육강식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 등이 이런 범죄를 낳는다고 합니다. 마을, 동네 개념이 사라지면서 개인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결속시킬 수 있는 끈이 없어지면서 이런 범죄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무관심한 죄, 무정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관심에서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동역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대화를 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야겠습니다. 형제가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을 해야 합니다.
왼편에 서게 된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를 왜 섬기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내면이 염소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무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문제에 너무 집착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지극히 작은 자요 불쌍한 사람이라며 사랑을 해 주지 않는다고 삐져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그들은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추운 사람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의 아픔을 몰랐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입히는 것이 떼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가 있습니까? 아니면 더 많은 물질을 모으는데 가 있습니까?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즐기는 일에 가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성공에 가 있습니까?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의 고통에는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자리 잡지 아니하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식과 아내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양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 일에 마음이 가 있으면 어떻게 그를 살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심판을 받으면 하나님의 존전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됩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원히 마귀와 그 졸개들과 함께 살면서 시달려야 합니다. 마귀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을 심고 미움을 심고 악을 자행합니다. 이런 악령들에게 시달리면서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인마 강호순은 자기를 절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두려워서 밤마다 한 방에 모여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마귀와 같이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지옥과 그 고통에 대해서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기억할 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양과 함께 염소와 같은 기질이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기분이 안 맞으면 들이받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성을 부인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심판을 기억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내 속에 있는 염소와 같은 기질을 인식하고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현재 염소와 같다할지라도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양과 같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입니까? 마음을 다해서 그를 사랑하고 섬기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사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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