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9마태 45강(25:1-30) 있는 자와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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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 45 강
말씀 마태복음 25:1-30
요절 마태복음 25:29
있는 자와 없는 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업적이나 결과보다 내적인 자세, 동기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은 자연히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열 처녀 비유(1-13) :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혼인 예식을 하고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서 잔치를 합니다. 왜 그들은 혼인 잔치를 밤에 했을까요? 출애굽이 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밤에 한다고 합니다. 또 신랑이 먼 동네에서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밤에 결혼식을 하고 결혼 잔치를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합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시도 낭송하고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먹으면서 즐거움을 함께 누립니다. 결혼식과 그 잔치의 풍성함을 생각할 때 기대감을 가지고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은 신부의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었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의 원어는 ‘모라이’ 인데 ‘또라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즉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 슬기 있다는 말은 사려 깊고 사고와 행동을 통해 매사에 신중하고 분별력을 가지고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 열 처녀는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들, 등은 주의 말씀이고, 기름은 믿음 또는 성령으로서 말씀이 빛을 발하게 합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서 가져가고자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신랑을 맞으러 나가기 위해서 여분의 기름을 가져가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번거롭고 힘도 들었을 것입니다. 멋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꾹 참고 감당하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대책이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말세에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완악해집니다. 불법이 성해지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교회의 허물이 드러나고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가운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의 맛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길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믿음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 간구합시다.
우리가 앞에 있는 건축 역사를 위해서 준비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건축 역사를 하는 가운데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과 성령의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처녀들은 밤늦게 까지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갑자기 한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는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신랑이 오니 마중을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었습니다. 예비한 기름을 등잔에 채웠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히 기름을 구하느라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우리의 믿음과 성령 충만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다고 아들까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갔다가 신랑을 맞이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혼인잔치는 늦어도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잔치를 즐깁니다. 그런데 천국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요즈음 지하철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닫히는 순간 가방을 끼워 넣던지, 손을 넣으면 다시 열렸는데 그것이 위험해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요즘은 그것이 안 됩니다. 천국문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준비가 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서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지쳐버렸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8-12).” 예수님께서 오실 날과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는 생활은 세속에 잠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과 기도 생활을 신실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깊이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에 힘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때마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새 학기에 학생 양들을 만나서 부지런히 성경 공부에 초청하여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 공부 노트를 만들어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신랑은 늦었지만 확실히 왔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예수님이 더디 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십니다.
2. 달란트 비유(14-30) : 예수님은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15억원쯤 됩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맞게 한 사람에게는 75억원, 한 사람에게는 30억원, 한 사람에게는 15억원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얼마나 풍성합니까? 우리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생을 살기에 충분한 지혜와 능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술의 재능이 있고, 어떤 분은 음악의 재능이 있고, 어떤 분은 넓은 마음이 있고 반대로 어떤 분은 계산하고 치밀하게 따지는 은사가 있습니다.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은사를 가진 분이 있고 믿음의 은사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은 창조적이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 사람마다 초고성능 컴퓨터 한대씩을 주셔서 얼마든지 머리를 써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뇌는 40개국어를 자유자재로 말 할 수 있는 용량과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인체의 균형을 잡고 모든 인체의 질서를 뇌에서 조절하고 있으며 모든 창의력이 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하루 30W 정도의 에너지만 있으면 되고 별도의 냉각 장치가 없어도 됩니다. 펜티엄 컴퓨터의 순간 정보 처리 용량 속도는 2억3천인데 인간의 뇌는 40억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머리가 크나 적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안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까? 그 은사를 발견하고 잘 써서 쓸모 있는 유익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두 사람은 주인이 달란트를 주신 목적이 주인이 오실 때까지 장사하라는 뜻임을 알고 바로 가서 시장 조사를 하고 어떤 사업에 투자할 것인가 알아보고 장사할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들은 신바람이 나서 일했습니다. 주인이 주신 돈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합해서 충성스럽게 일했을 때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장사를 할 때는 위험이 따를수록 많이 남습니다. 무조건 안전하게 나가고자 하면 구멍가게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는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현실을 보면서 장사하는 세계의 단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홍대 주변의 상가들이 수없이 많이 문을 열었다가 얼마 있으면 폐업하는 현실을 봅니다. 이는 변화되는 시대를 따라가기 위한 사업가의 몸부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장사하는 목적은 이웃을 섬기고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이윤을 얻는 것입니다. 이윤은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장사를 해도 어려움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인내를 해야 하고 머리를 싸매며 연구도 해야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정보도 얻어야 합니다. 막힌 골목길에 막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를 하지 않고 그 돈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돈으로 투자할 기회를 놓치고 땅에 묵혀 두었습니다. 본문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해서 많은 절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그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그 종들과 결산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반드시 결산할 때가 옵니다. 그 결산은 정확합니다. 결산할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보고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결산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은 그도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세상은 대개 통계 수치로 결산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남긴 업적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게 받은 사람이 많이 받은 사람과 경쟁하고 평가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동일하게 그들이 작은 일에 충성한 점을 칭찬했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충성된 자입니다. 충성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대개 대형 사고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그 일을 감당하는 원리는 같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된 자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하나님의 인정이요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세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되게 일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죽고 나서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신3:5). 여호수아도 일생 가나안 정복 전쟁에 충성되게 임했을 때 임무를 마치고 죽었을 때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사사기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맡은 일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여름 가뭄에 시원한 냉수와 같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스러운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의 변명을 볼 때 그는 주인을 오해를 해도 한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박정하고 포악하여 거친 사람’, ‘무서운 사람’이라고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그는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웠습니다. 그는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파렴치한 불로소득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태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요즘 같이 펀드를 들었다가 원금까지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원금이라도 보전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의 태도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해서 투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에게 충성스럽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주인의 것을 은행에라도 두면 이자가 많이 올라갔을 텐데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자도 복리 이자가 붙으면 엄청난 투자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15억을 8%이자로 30년을 예금해 놓으면 얼마나 될까요? 복리로 치면 151억원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좁은 소견에 갇혀서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이렇게 묻어두거나, 썩히거나, 쓸모없게 만들지는 않고 있는지요?
주인은 그를 책망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며 심판했습니다.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있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인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착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없는 자는 게으르고 악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달란트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달란트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마치는 날 너에게 준 은사, 인간관계, 재능,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했는가를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면서 달란트를 낭비하지 말고 주신 것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안드레와 같이 오병이어를 찾아서 드리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풍성해 집니다. 반면에 없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는 사람은 결국 무익한 종이 되고 맙니다.
닉 부이치치는 두 손과 두 발이 없습니다. 짧은 발과 몸통뿐인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영도 하고 스케이드보드도 타고 전자 키타도 치고 강연도 합니다. 강연을 통해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희망을 줍니다. 그는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그 수익금으로 학생들의 교육과 건강, 식량 보급 등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내게 주어진 것으로 얼마나 유익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슬기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식고 믿음이 바닥나는 고난의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캠퍼스 목자로서 새 학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몰려오는 신입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남은 방학 기간 동안 말씀 노트를 준비하고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썩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하나님께 유익을 남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하는 칭찬을 받고 천국 혼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25:1-30
요절 마태복음 25:29
있는 자와 없는 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업적이나 결과보다 내적인 자세, 동기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은 자연히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열 처녀 비유(1-13) :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혼인 예식을 하고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서 잔치를 합니다. 왜 그들은 혼인 잔치를 밤에 했을까요? 출애굽이 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밤에 한다고 합니다. 또 신랑이 먼 동네에서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밤에 결혼식을 하고 결혼 잔치를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합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시도 낭송하고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먹으면서 즐거움을 함께 누립니다. 결혼식과 그 잔치의 풍성함을 생각할 때 기대감을 가지고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은 신부의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었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의 원어는 ‘모라이’ 인데 ‘또라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즉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 슬기 있다는 말은 사려 깊고 사고와 행동을 통해 매사에 신중하고 분별력을 가지고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 열 처녀는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들, 등은 주의 말씀이고, 기름은 믿음 또는 성령으로서 말씀이 빛을 발하게 합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서 가져가고자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신랑을 맞으러 나가기 위해서 여분의 기름을 가져가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번거롭고 힘도 들었을 것입니다. 멋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꾹 참고 감당하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대책이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말세에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완악해집니다. 불법이 성해지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교회의 허물이 드러나고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가운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말씀의 맛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길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믿음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 간구합시다.
우리가 앞에 있는 건축 역사를 위해서 준비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건축 역사를 하는 가운데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과 성령의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처녀들은 밤늦게 까지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갑자기 한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는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신랑이 오니 마중을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었습니다. 예비한 기름을 등잔에 채웠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히 기름을 구하느라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우리의 믿음과 성령 충만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다고 아들까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갔다가 신랑을 맞이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혼인잔치는 늦어도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잔치를 즐깁니다. 그런데 천국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요즈음 지하철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닫히는 순간 가방을 끼워 넣던지, 손을 넣으면 다시 열렸는데 그것이 위험해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요즘은 그것이 안 됩니다. 천국문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준비가 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서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지쳐버렸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8-12).” 예수님께서 오실 날과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는 생활은 세속에 잠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과 기도 생활을 신실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깊이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에 힘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때마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새 학기에 학생 양들을 만나서 부지런히 성경 공부에 초청하여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 공부 노트를 만들어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신랑은 늦었지만 확실히 왔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예수님이 더디 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십니다.
2. 달란트 비유(14-30) : 예수님은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15억원쯤 됩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맞게 한 사람에게는 75억원, 한 사람에게는 30억원, 한 사람에게는 15억원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얼마나 풍성합니까? 우리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생을 살기에 충분한 지혜와 능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술의 재능이 있고, 어떤 분은 음악의 재능이 있고, 어떤 분은 넓은 마음이 있고 반대로 어떤 분은 계산하고 치밀하게 따지는 은사가 있습니다.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은사를 가진 분이 있고 믿음의 은사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은 창조적이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 사람마다 초고성능 컴퓨터 한대씩을 주셔서 얼마든지 머리를 써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뇌는 40개국어를 자유자재로 말 할 수 있는 용량과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인체의 균형을 잡고 모든 인체의 질서를 뇌에서 조절하고 있으며 모든 창의력이 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하루 30W 정도의 에너지만 있으면 되고 별도의 냉각 장치가 없어도 됩니다. 펜티엄 컴퓨터의 순간 정보 처리 용량 속도는 2억3천인데 인간의 뇌는 40억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머리가 크나 적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안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까? 그 은사를 발견하고 잘 써서 쓸모 있는 유익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두 사람은 주인이 달란트를 주신 목적이 주인이 오실 때까지 장사하라는 뜻임을 알고 바로 가서 시장 조사를 하고 어떤 사업에 투자할 것인가 알아보고 장사할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들은 신바람이 나서 일했습니다. 주인이 주신 돈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합해서 충성스럽게 일했을 때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장사를 할 때는 위험이 따를수록 많이 남습니다. 무조건 안전하게 나가고자 하면 구멍가게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는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현실을 보면서 장사하는 세계의 단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홍대 주변의 상가들이 수없이 많이 문을 열었다가 얼마 있으면 폐업하는 현실을 봅니다. 이는 변화되는 시대를 따라가기 위한 사업가의 몸부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장사하는 목적은 이웃을 섬기고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이윤을 얻는 것입니다. 이윤은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장사를 해도 어려움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인내를 해야 하고 머리를 싸매며 연구도 해야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정보도 얻어야 합니다. 막힌 골목길에 막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를 하지 않고 그 돈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돈으로 투자할 기회를 놓치고 땅에 묵혀 두었습니다. 본문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해서 많은 절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그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그 종들과 결산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반드시 결산할 때가 옵니다. 그 결산은 정확합니다. 결산할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보고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결산했습니다.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은 그도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세상은 대개 통계 수치로 결산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남긴 업적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게 받은 사람이 많이 받은 사람과 경쟁하고 평가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동일하게 그들이 작은 일에 충성한 점을 칭찬했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충성된 자입니다. 충성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대개 대형 사고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그 일을 감당하는 원리는 같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된 자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하나님의 인정이요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세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되게 일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죽고 나서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신3:5). 여호수아도 일생 가나안 정복 전쟁에 충성되게 임했을 때 임무를 마치고 죽었을 때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사사기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맡은 일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여름 가뭄에 시원한 냉수와 같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스러운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의 변명을 볼 때 그는 주인을 오해를 해도 한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박정하고 포악하여 거친 사람’, ‘무서운 사람’이라고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그는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웠습니다. 그는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파렴치한 불로소득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태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요즘 같이 펀드를 들었다가 원금까지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원금이라도 보전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의 태도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해서 투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에게 충성스럽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주인의 것을 은행에라도 두면 이자가 많이 올라갔을 텐데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자도 복리 이자가 붙으면 엄청난 투자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15억을 8%이자로 30년을 예금해 놓으면 얼마나 될까요? 복리로 치면 151억원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좁은 소견에 갇혀서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이렇게 묻어두거나, 썩히거나, 쓸모없게 만들지는 않고 있는지요?
주인은 그를 책망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며 심판했습니다.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있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인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착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없는 자는 게으르고 악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달란트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달란트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마치는 날 너에게 준 은사, 인간관계, 재능,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했는가를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면서 달란트를 낭비하지 말고 주신 것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안드레와 같이 오병이어를 찾아서 드리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풍성해 집니다. 반면에 없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는 사람은 결국 무익한 종이 되고 맙니다.
닉 부이치치는 두 손과 두 발이 없습니다. 짧은 발과 몸통뿐인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영도 하고 스케이드보드도 타고 전자 키타도 치고 강연도 합니다. 강연을 통해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희망을 줍니다. 그는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그 수익금으로 학생들의 교육과 건강, 식량 보급 등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내게 주어진 것으로 얼마나 유익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슬기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식고 믿음이 바닥나는 고난의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캠퍼스 목자로서 새 학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몰려오는 신입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남은 방학 기간 동안 말씀 노트를 준비하고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썩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하나님께 유익을 남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하는 칭찬을 받고 천국 혼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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