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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9마태35강(18:15-35)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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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32회 작성일 09-01-1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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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태복음 제 35 강                                                       
말씀 마태복음 1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용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는 오늘 사람의 죄문제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죄문제를 돕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고 또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권고하고(15-17), 둘째는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고(18-20), 셋째는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형제를 얻어야 합니다. 형제를 얻으면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미미해 가는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권고하라(15-17) :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서 나와 그 사람과만 상대해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가 들으면 내가 그 형제를 얻게 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스스로 나와서 회개하면 가장 좋겠지만 대개의 경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문제의식이 있는 경우 스스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관계성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은 고독감을 느낍니다. 외톨이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만히 놔두면 소리 없이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찾아가야 합니다. 오기를 기대하지 말고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권고하라고 합니다. 권고한다는 말은 그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도록 돕는 것입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잠27:5). 형제가 죄를 회개하면 그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내게 죄를 범한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반적인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형제가 연애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음행을 행하거나, 교회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거나, 게으르거나,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거나, 게임 중독에 빠지거나, 불순종하거나, 불평의 영으로 가득한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그 경우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의 죄에 대해서 방관하게 되면 공동체 속에 죄의식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 그 죄의 결과를 내가 감당해야 되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형제가 죄를 회개하도록 도울 때 일대일로 만나서 도우라는 것은 인격적으로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의 죄가 최소한 폭로되는 가운데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 공개적으로 다루게 되면 그가 수치심을 느끼거나 분노하게 됩니다. 죄를 공개적으로 다루게 되면 형제가 깊은 죄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죄를 부인하고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문제를 돕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또 어렵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대개 잘잘못만 따지고 그가 잘 되거나 못 되거나 방치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도록 끝까지 도와야 합니다. 만일 그가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가 자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두 사람이 가면 형제를 더 강력하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돕는데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합니다. 이는 교회에서 출교를 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형제가 교회 밖에서 고통을 받는 가운데 회개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또 형제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돕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교회 밖에서 고통을 받기보다 죄 짓는 삶을 즐긴다면 그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 합심해서 기도하라(18-20) : 18-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가 형제의 죄문제를 돕다 보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 기도에 대한 말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죄를 깊이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이 땅에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풀리기도 하고 매이기도 합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죄는 완악함이고 악령이 부추기는 역사가 있기에 성령의 역사로 이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두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라도 합심해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 중에 계십니다. 우리는 요회에 두 사람 밖에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모임이 뜨거워지고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모일 때 그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둘 밖에 없으니 신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그만 두자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모이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는 모임의 종교입니다. 모여야 일이 됩니다. 모여 기도할 때 힘이 생깁니다. 모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과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모였다 하면 두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마음으로 용서하라(21-35)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하고 여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삼세번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 번씩 용서하겠다고 하니 매우 관대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490번만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무한정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무골호인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형제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는데 나만 용서를 한다면 나만 손해를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상처를 확대시키지 말고 나에게서 끝내야 합니다. 중국 영화의 특징은 복수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복수극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죄의 확산을 막는 지름길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의 용서는 십자가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끊임없이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목자 생활은 예수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배우는 삶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허물을 감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지만 끊임없이 용서함으로 그를 키웁니다. 자녀 편에서 보면 부모도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면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만 달란트는 화폐단위로 계산해서 일당을 5만원으로 치면 3조원으로서 보통 월급쟁이가 한 푼도 쓰지 않고 20만년동안 모아야 될 큰돈입니다. 달란트를 금값으로 계산하면 15조가 넘습니다. 주인은 빚진 종에게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으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즉시 그의 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사람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십계명을 법하는 것이 죄인 것은 물론이고, 마땅히 행할 줄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마음으로, 눈으로 음행하고, 약속을 어깁니까? 마땅히 사랑해야 할 형제에게 분노하고 자녀에게 분노했습니까?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않고, 기도해 주겠다고 말을 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죄를 합리화시켰습니까? 감사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를 낳고 사랑하고 키워준 부모에게 얼마나 불효를 행했습니까? 얼마나 염치없이 살았습니까? 정말 기본적인 은혜도 갚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을 생각할 때 이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이 많은 죄의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끊임없이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그 종은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 그가 갚겠다고 말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갚아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이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한편으로는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종을 용서하신 것은 그의 태도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가 빚을 갚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은혜는 일방적이고 값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해서 주어졌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희생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이 되고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꺼번에 공의와 긍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꺼번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값싸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값비싼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졸라대며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500만원입니다. 그는 무자비하게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몰아세웠습니다. “빨리 내 빚 갚아. 못 갚아. 너 죽을래.”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주인에게 한 말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동료의 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다 알렸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주인이 노한 이유는 그가 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지만 5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는 동료를 용서하지 못했을까요? 이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빚을 탕감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가 용서를 받고 기뻐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지만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에게서 빚을 받아서 임금님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율법적인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를 입에 물고 있지만 씹어서 삼키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용서를 입에 물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소화하지 않는다면 그 놀라운 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이런 영적인 교만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에게 받아야 할 빚보다 내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빚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에서 자라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종은 동료 하나를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함으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은밀하게 죄를 지었다면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 대 놓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십일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는 용서의 은혜를 마음 깊이 누렸기 때문에 이렇게 담대하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도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는가 거꾸로 나를 매달라고 하여 그렇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일생토록 주님의 은혜를 감당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또 모든 죄인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다시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평강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관계를 끊게 됩니다. 만약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때 서먹서먹했던 관계가 부드럽게 회복이 됩니다. 용서할 때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용서할 때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독일의 수상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에 갔을 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피해를 준 나라에 대해서 아낌없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독일이 유럽에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유럽 통일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하면 용서하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또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입니다. 용서하여 사람을 얻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데 용서받고 용서하는 마음에 임합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언가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이북인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장로가 7명이 있었는데 4명이 6.25때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분이 강덕기 장로님 이셨습니다. 잔인한 공산당원들은 강 장로님을 죽일 때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는 두 눈을 뽑았다고 합니다. 눈알이 빠진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두 눈이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하늘나라가 밝히 보이는구나!” 그러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답니다. 그러자 이 찬송소리에 치를 떨던 공산당원들은 총의 개머리판으로 강 장로님의 턱뼈를 짓이겨버렸고, 턱뼈가 으스러진 장로님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이 그 마을을 점령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갖은 만행을 다 저질렀던 공산당의 두목이 미쳐 도망을 가지 못하고 동네 청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청년들은 그를 나무에 매달아놓고는, 순교를 당한 강 장로님의 아들에게 마음대로 그를 죽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원수의 모습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던 장로님의 아들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이들과 같은 방법으로 이 사람을 죽인다면 내 아버지의 순교가 헛되고 말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당신은 나의 원수이지만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 자리를 조용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찾아가서 마음을 푸시기 바랍니다. 관계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내게 베풀어준 큰 용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다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 마음의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들을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용서의 위력을 체험하는 가운데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돈이나 숫자의 증가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겨 용서하고 힘써 사랑하는 가운데 복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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