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신년2강(계2:1-11) 처음 행위를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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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년 메시지 제 2 강
말씀 요한계시록 2:1-11
요절 요한계시록 2:5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2009년 새 해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두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도록 돕고 서머나 교회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충성하여 영생을 누리며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1-7)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했습니다. 여기서 사자는 그 교회를 책임 맡고 있는 목자를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서 표현하셨습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오른손은 권능을 상징하고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교회의 목자들을 권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붙잡고 있다는 것은 통치권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자들이 책임을 맡아 교회를 돌보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주권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주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환난을 당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가 주님의 몸된 모습을 잃어버리면 붙들고 있는 교회를 내칠 수도 있습니다. 한편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사랑하고, 능력 가운데 교회에 임재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시면서 우리를 세밀하게 감찰하십니다. 목자가 모르는 일은 있지만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당시 교회는 도미티안과 네로 황제의 심한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핍박 가운데서 성도들은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때 마음에 평강이 오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그 인내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에베소 교회가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2,3). 에베소 교회는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행동하는 교회였습니다. 말없이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마음으로부터 신뢰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에 1차로 개척을 했고 그 후 3차 전도 여행 때 적어도 2년 3개윌 체류하면서 열심히 제자 양성을 한 결과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19:1-10).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눈물과 간구로 3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들이 변화되고 성장하여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 역사가 있자 우상 판매가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여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두 시간을 외치며 데모를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 에베소에 들릴 수 없어 바울은 밀레도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의 인사와 교훈을 주었습니다(행 20:17-38).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부둥켜안고 울면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후에 로마 옥중에서 그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써서 두기고에 들려 보냈습니다(엡 1:1,6:21,딤후 4:12). 그 후에 디모데가 이 역사를 계승했고 사도 요한이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복음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핍박을 받으면서 인내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들어온 흉악한 이리들이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헤치고자 했을 때 이를 잘 분별하고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섬기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개척 초기에 매일 말씀을 공부하고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거짓을 버리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들의 열심으로 인해서 놀라운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소아시아에 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은 오만어치의 마술 책을 불살랐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속임수가 사라지고 진리와 진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신명기 6:5-7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에 힘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과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표현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중독에 빠진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일대일 말씀 공부와 소감 모임에 대한 절대성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공부시켜주기 위한 수단 정도로 대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소감을 마음으로 깊이 쓰는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섬겼습니다. 그는 양들이 말씀을 공부했지만 반복해서 죄에 빠지는 현실을 볼 때 마음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믿음을 떠나는 양들을 볼 때 울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한 심성을 볼 때 울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 헤어짐을 아쉬워하여 모두가 부둥켜 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기 때문에 매일 모여 교제하기를 힘쓰고 찬송을 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2:8).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어진다면 교회 생활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라고 말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참된 표지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야말로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웠던 에베소 교회의 주님과 양들에 대한 첫 사랑이 왜 식어버린 것일까요?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회개는 처음 행위를 가지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처음 행위를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순수하고 참되고 뜨거운 사랑을 했습니다. 말씀이 사모가 되어 눈물로 회개하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경 공부도 간절한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한 주 한 주가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공부했습니다. 말씀 공부는 언제나 심령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서 살아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센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형제에게 나누어 주기를 즐겨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데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처음 사랑이 식어갔습니다. 영적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영적 교만과 안일에 빠졌습니다. 마음에 계산적인 생각이 들어오고 현실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기에 더 시간을 드리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상대적이 되어갔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생활이 기쁨이 사라집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던 일들이 힘이 들고 짜증이 나고 쉽게 피곤해집니다. 사랑할 때는 허물이 있어도 쉽게 넘어갔지만 사랑이 식으면 사소한 일도 따지고 불평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기쁨으로 자원하던 일들도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 에베소 교회는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는 병든 교회요 죽어가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주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에베소 교회가 430년 이상 까지 가면서 세계 교회사에 크게 쓰임 받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역사적으로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골라 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습니다. 에베소 지역에서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아데미 여신에게 제사도 하고 행음도 하면서 자기 유익을 좇아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런 이중적인 신자들을 미워하였고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물질 숭배와 음행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십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리면 대신에 돈에 대한 사랑, 쾌락에 대한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2. 죽도록 충성하라(8-11)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합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예수님은 창조주시오 심판장이십니다. 그는 태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서머나 지역의 유대인들이 도미티안 황제 때 교회를 황제 숭배를 반대하는 자라고 고소하여 핍박을 받게 하였습니다. 서머나 지역은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상권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이 크리스천들에게 가게를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상품도 주지 않아서 매상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부요한 도시 속에서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삶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괴롭기도 합니다. 정말 해야 할 일들을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할 때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돈의 위력이 갈수록 크게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궁핍한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그들이 부요한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할 정도로 행복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가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눅14:15-2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후 6:17-18).” 야보고 사도는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정말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진짜 부자는 영혼의 부자요 내적인 부요, 만족, 평강,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정 반대의 사람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우리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하여 선한 사업에 힘쓰고 구제에 힘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때마다 우리의 필요를 적당하게 공급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면서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고난을 피할 방도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견디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영원할 것 같지만 짧은 기간에 고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믿음이 꽉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고난 앞에서 굽히지 말고 지키는 삶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죽도록 충성할 때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죽는 순간에도”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주후 69-156년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는 서머나 감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었습니다. 총독은 그에게 “시이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생명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 분은 한 번도 제게 나쁜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저를 구원하신 저의 왕을 욕할 수 있습니까?” 그는 서머나 교회에서 열두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충성의 귀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도 교회에 촛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습니다. 이천 년 이상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있습니까?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신앙을 접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학만 들어가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주님은 구석으로 몰아넣고 나의 유익과 체면을 따라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삶이 진정으로 이기는 삶입니다.
우리가 죽도록 충성할 때 어떤 상을 주십니까? 생명의 관을 주십니다. 마라톤에서 승리한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줍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완주한 자에게는 승리의 관을 씌워주십니다. 고난 끝에는 생명의 관이 있습니다. 생명의 관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두 가지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 즉 일반적인 죽임입니다.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당하는 형벌입니다. 즉 지옥의 삶입니다. 생명의 관을 받지 못하면 이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됩니다. 반면 생명의 관을 받으면 이 둘째 사망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 자가 주님과 뜨거웠던 첫 사랑을 회복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 시간을 사모하고 양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계시록 2:1-11
요절 요한계시록 2:5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2009년 새 해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두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도록 돕고 서머나 교회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충성하여 영생을 누리며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1-7)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했습니다. 여기서 사자는 그 교회를 책임 맡고 있는 목자를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서 표현하셨습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오른손은 권능을 상징하고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교회의 목자들을 권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붙잡고 있다는 것은 통치권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자들이 책임을 맡아 교회를 돌보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주권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주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환난을 당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가 주님의 몸된 모습을 잃어버리면 붙들고 있는 교회를 내칠 수도 있습니다. 한편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사랑하고, 능력 가운데 교회에 임재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시면서 우리를 세밀하게 감찰하십니다. 목자가 모르는 일은 있지만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당시 교회는 도미티안과 네로 황제의 심한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핍박 가운데서 성도들은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때 마음에 평강이 오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그 인내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에베소 교회가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2,3). 에베소 교회는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행동하는 교회였습니다. 말없이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마음으로부터 신뢰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에 1차로 개척을 했고 그 후 3차 전도 여행 때 적어도 2년 3개윌 체류하면서 열심히 제자 양성을 한 결과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19:1-10).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눈물과 간구로 3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들이 변화되고 성장하여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 역사가 있자 우상 판매가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여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두 시간을 외치며 데모를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 에베소에 들릴 수 없어 바울은 밀레도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의 인사와 교훈을 주었습니다(행 20:17-38).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부둥켜안고 울면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후에 로마 옥중에서 그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써서 두기고에 들려 보냈습니다(엡 1:1,6:21,딤후 4:12). 그 후에 디모데가 이 역사를 계승했고 사도 요한이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복음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핍박을 받으면서 인내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들어온 흉악한 이리들이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헤치고자 했을 때 이를 잘 분별하고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섬기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개척 초기에 매일 말씀을 공부하고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거짓을 버리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들의 열심으로 인해서 놀라운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소아시아에 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은 오만어치의 마술 책을 불살랐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속임수가 사라지고 진리와 진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신명기 6:5-7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에 힘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과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표현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일중독에 빠진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일대일 말씀 공부와 소감 모임에 대한 절대성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공부시켜주기 위한 수단 정도로 대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소감을 마음으로 깊이 쓰는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섬겼습니다. 그는 양들이 말씀을 공부했지만 반복해서 죄에 빠지는 현실을 볼 때 마음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믿음을 떠나는 양들을 볼 때 울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한 심성을 볼 때 울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 헤어짐을 아쉬워하여 모두가 부둥켜 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기 때문에 매일 모여 교제하기를 힘쓰고 찬송을 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2:8).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어진다면 교회 생활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라고 말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참된 표지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야말로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웠던 에베소 교회의 주님과 양들에 대한 첫 사랑이 왜 식어버린 것일까요?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회개는 처음 행위를 가지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처음 행위를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순수하고 참되고 뜨거운 사랑을 했습니다. 말씀이 사모가 되어 눈물로 회개하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경 공부도 간절한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한 주 한 주가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공부했습니다. 말씀 공부는 언제나 심령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서 살아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센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형제에게 나누어 주기를 즐겨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데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처음 사랑이 식어갔습니다. 영적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영적 교만과 안일에 빠졌습니다. 마음에 계산적인 생각이 들어오고 현실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기에 더 시간을 드리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상대적이 되어갔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생활이 기쁨이 사라집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던 일들이 힘이 들고 짜증이 나고 쉽게 피곤해집니다. 사랑할 때는 허물이 있어도 쉽게 넘어갔지만 사랑이 식으면 사소한 일도 따지고 불평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기쁨으로 자원하던 일들도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 에베소 교회는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는 병든 교회요 죽어가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주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에베소 교회가 430년 이상 까지 가면서 세계 교회사에 크게 쓰임 받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역사적으로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골라 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습니다. 에베소 지역에서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아데미 여신에게 제사도 하고 행음도 하면서 자기 유익을 좇아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런 이중적인 신자들을 미워하였고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물질 숭배와 음행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십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리면 대신에 돈에 대한 사랑, 쾌락에 대한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2. 죽도록 충성하라(8-11)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합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예수님은 창조주시오 심판장이십니다. 그는 태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서머나 지역의 유대인들이 도미티안 황제 때 교회를 황제 숭배를 반대하는 자라고 고소하여 핍박을 받게 하였습니다. 서머나 지역은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상권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이 크리스천들에게 가게를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상품도 주지 않아서 매상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부요한 도시 속에서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삶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괴롭기도 합니다. 정말 해야 할 일들을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할 때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돈의 위력이 갈수록 크게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궁핍한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그들이 부요한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할 정도로 행복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가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눅14:15-2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후 6:17-18).” 야보고 사도는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정말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진짜 부자는 영혼의 부자요 내적인 부요, 만족, 평강,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정 반대의 사람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우리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하여 선한 사업에 힘쓰고 구제에 힘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때마다 우리의 필요를 적당하게 공급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면서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고난을 피할 방도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견디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영원할 것 같지만 짧은 기간에 고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믿음이 꽉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고난 앞에서 굽히지 말고 지키는 삶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죽도록 충성할 때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죽는 순간에도”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주후 69-156년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는 서머나 감독으로 있을 때 체포되었습니다. 총독은 그에게 “시이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생명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 분은 한 번도 제게 나쁜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저를 구원하신 저의 왕을 욕할 수 있습니까?” 그는 서머나 교회에서 열두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충성의 귀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도 교회에 촛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습니다. 이천 년 이상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있습니까?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신앙을 접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학만 들어가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주님은 구석으로 몰아넣고 나의 유익과 체면을 따라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삶이 진정으로 이기는 삶입니다.
우리가 죽도록 충성할 때 어떤 상을 주십니까? 생명의 관을 주십니다. 마라톤에서 승리한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줍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완주한 자에게는 승리의 관을 씌워주십니다. 고난 끝에는 생명의 관이 있습니다. 생명의 관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두 가지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 즉 일반적인 죽임입니다.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당하는 형벌입니다. 즉 지옥의 삶입니다. 생명의 관을 받지 못하면 이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됩니다. 반면 생명의 관을 받으면 이 둘째 사망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 자가 주님과 뜨거웠던 첫 사랑을 회복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 시간을 사모하고 양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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