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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09년 신년1강(고후4:1-18)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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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360회 작성일 08-12-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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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신년 제 1 강
말씀 고린도후서 4:1-18요절 고린도후서 4:7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잘 정리하고 새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자신의 형편과 시대를 바라보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인데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보배의 가치를 알 때 질그릇 같이 연약한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경 선생으로서 어떻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첫째,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맙시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목자의 삶을 살면서 낙심할 때가 많았습니다. 또 낙심하기 쉬운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낙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그의 적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가 무슨 사도냐며 비난하는 사람들, 바울이 율법을 파괴하고 나사렛 이단을 전한다며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 바울이 너무 거칠다며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았고 비방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영적 전쟁은 치열했습니다. 그에게 보급품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이팅 스피릿을 유지했습니다. 낙심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극복하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스피릿을 유지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처럼 강력한 파이팅 스피릿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이 무엇이었을까요? 1절은 그 비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바울은 이 직분을 감당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 스피릿을 유지하는 비밀입니다. 한 목자님은 많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때마다 남편의 그러한 약점을 지적하고 때로는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편은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그녀는 남편의 연약함 때문에 그를 비난하거나 지적하지 않고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격려했습니다. 우리 남편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며 기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녀의 긍휼에 감사해서 그 남편은 자신이 직면한 수많은 어려움들을 아주 잘 감당해내었습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은 긍휼 특히 하나님의 긍휼을 먹고 산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모양의 곤경에 빠지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을 때 능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거목과 같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산불 속에서도 거목은 그슬리기는 하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왕성한 생명력을 발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추하게 되고 비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손가락질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그는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의로운 옷을 입혀주시고 황태자요 공주와 같이 대우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믿음을 갖고자 투쟁하고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고자 하는 것을 귀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받은 사랑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근원이요 형제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 있는 원천인 것입니다.

  올해를 생각해 볼 때 낙심하게 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어려운 경제위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한 자기정죄, 동역자로부터 듣는 조심성 없는 말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라는 생각에 빠질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양들로부터 받는 배신감 등등.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 있을 때마다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목자요 성경 선생의 직분을 주신 것을 기억함으로 스피릿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새 언약의 일꾼은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려야 합니다. 2a절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숨은 부끄러운 일이란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한 거짓이나 음행, 기타 드러내기 어려운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단번에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숨은 부끄러움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4강으로 이끈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든 사람은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였습니다. 그는 태극전사 세 명을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데려가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든든한 후원을 업은 박지성은 부상과 슬럼프의 고난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해 2005년 세계 최고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전통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선수는 스페인에서 적응하지 못해 2005년 울산 현대로 돌아왔고 2007년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갔다가 올해 다시 수원 삼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연예인과의 염문을 연이어 뿌렸습니다. 폭력 및 사기 사건에도 연루되고 음주 파문까지 일으켜 트러블 메이커로 전락했습니다. 급기야 24일에는 훈련 불참 등 선수로서의 임무 불이행으로 임의탈퇴 공시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수원은 올해 한국 프로 축구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차범근 감독 하에서 훌륭한 선수로 클 수 있었지만 결국 선수로서도 활약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맛볼 때 자연스럽게 숨은 부끄러운 일들을 버릴 수 있고 영적인 경주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히 12:1).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셋째, 새 언약의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드러내야 합니다. 2b절을 보십시오.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축구 선수는 축구공을 잘 다루어야 하듯이 새 언약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싸움을 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유일한 무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잠17:2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지혜가 있고 내 옆에 있는 동역자의 말 속에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파서 내가 생수를 마시고 힘을 내서 양들에게 먹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낙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속이는 것과 혼잡하게 하는 것은 새 언약의 일꾼들이 피해야만 하는 두 개의 위험한 웅덩이입니다. 이러한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최고의 성경 선생으로서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바울은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한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이 입으로만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로 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일하게 될 때에 우리는 3,4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전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메시지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적대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감당할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주라고 고백을 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고백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목숨을 건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구원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로마서 10: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시요, 나의 마음과 삶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시요,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시고, 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기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는 메시야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메시야가 누구인지를 몰라 방황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만나기까지 우리 마음은 진정한 안식과 평화가 없습니다.

  6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이 주 되심을 알게 되고 전파하게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태초에 만물이 창조되기 전의 땅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이 짙게 드리우진 상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칠흙같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혔습니다. 창조의 역사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에 생명의 빛을 비추사 마음의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는 영적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찬란한 부활의 빛이 비추어졌을 때 그를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지고 영적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행9:18). 이렇게 빛을 받은 사람만이 빛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쓰시는 것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각 사람의 마음에 새 생명을 만드십니다.

넷째,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성경 선생들은 심히 큰 능력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능력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아담의 뜻은 먼지입니다. 먼지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이 뜻은 우리의 위치가 질그릇과 같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 훈련을 통해서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하셨습니다. 기초군사 훈련과정 동안 논산의 진흙탕을 박박 기면서 나는 먼지요 재와 같은 비천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본성과 능력은 질그릇과 같음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나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가졌기 때문에 매우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신과 양들의 변화를 위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함을 배웁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질그릇 속에 이 보배를 두셨습니다. 질그릇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질그릇은 너무 흔하여서 가치가 없고, 잘 깨지고, 별 모양이 없어서 보기가 싫습니다. 사람들은 질그릇을 별로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깨어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질그릇에는 값이 안 나가는 된장이나 고추장이나 값싼 음식을 담아 둡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아두셨습니다. 보배는 보배합에 담아 두어야 그 가치가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겸손과 지혜는 뚝배기 속에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배를 담아주셨습니다. 보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보배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강도가 높아서 잘 깨지지 않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변치 않아야 하며, 그 가치가 영원히 지속되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진주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배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고이 간직합니다.  골로새서 2: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보배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묘사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요1:4). 또한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 되시고(요4:14),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요6:35). 예수님은 소경에게 빛이 되시고(요9:5),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요11:25).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만이 충만합니다.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떼들 속에서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가지고 있는 위대한 보배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복음이 보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만이 사람을 진짜 부요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질그릇인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보배와 같이 가치가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들고 신뢰를 얻게 만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심히 큰 능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질 그릇 속에 이 보물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심히 큰 능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복음이 심히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은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던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됩니다. 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십니다. 추한 죄인을 성자와 같이 변화시키십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을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무뚝뚝한 사람을 사랑의 목자로 변화시키십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이 우리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오뚜기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새 언약의 일꾼들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양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을 들을 때 쉽게 흔들리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고난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파괴되면서 더 강한 근육이 생깁니다. 이와같이 고난을 받지만 우리의 내면에 보배이신 예수님의 형상이 조각됩니다. 그리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양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양떼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어려움과 환난으로 인해서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무리 잘 먹고 잘 쉬고 운동을 해도 낡아집니다. 이빨도 빠지고, 머리도 빠지고 쉬게 됩니다, 시력도 나빠지고, 기력이 쇠해갑니다. 피부에도 주름이 많이 가고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허리도 아프고 쉽게 피곤해지고 마음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겉사람이 낡아지면서 속사람도 낡아집니다. 개척정신을 잃어버리고 박력도 잃고 첫사랑도 식어집니다. 처음 가졌던 감격과 은혜가 사라지면서 아련한 추억 정도로 생각합니다.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져버립니다. 소시민으로 전락하여 아무 문제의식 없이 편안한 신앙생활을 즐깁니다. 아기와 자기와 집 안에 틀어 박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센터에 나와서 투쟁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집니다. 겉으로 볼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영적으로 보면 비참한 삶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활신앙이 있을 때 마음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주님의 고난을 사랑하고 부활의 생명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부활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신자로서, 성경 선생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굳게 붙잡을 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릴 때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에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찾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심히 큰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 심히 큰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좀 더 새로워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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