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08년 성탄 2강(사9:1-7) 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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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성탄 말씀 2강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고통의 때에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아기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한 아기는 연약해보입니다.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아기는 누구이기에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까? 그는 왕이시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는 낮아져서 오셨기에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그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망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한 아기를 마음 깊이 영접하고 구원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자기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방 변방지역입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안락한 가정을 파괴합니다. 전쟁에 패배한 결과 경제는 파탄이 나서 가난과 배고픔을 겪고, 백성들은 고생과 질병, 수치와 멸시, 포로, 죽음으로 고통했습니다. BC734년 북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와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강제 이민을 시켰습니다(왕하15:29). 또 앗수르 사람들을 그곳에 와 살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혼혈이 되었고 혼합종교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동족으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방의 갈릴리란 선민의 순수성을 상실한 잡놈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도적들이 들끓었고 국가에서도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서 버려진 땅과 같았습니다. 8장 21,22절을 보면 그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과 고통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는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에 행하는 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흑암 속에는 각종 균이 득실거리고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곳에서 사는 자들은 각종 병에 시달립니다. 흑암에 행하는 자는 죄의 세력에 시달립니다. 짙은 어두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흑암에 행하는 백성들에게는 비전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에게 큰 빛이 비추입니다. 큰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모든 것이 환해지니 방향 감각이 생깁니다. 큰 빛은 따스함을 줍니다. 큰 빛은 치료의 광선을 발합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정기적으로 햇볕을 쬐라고 합니다. 햇볕을 쬐면 마음에 일할 의욕이 생깁니다. 저는 아침에 센터에 올라올 때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삶의 소망이 생깁니다. 큰 빛은 모든 피조물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큰 빛은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큰 빛은 형광등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형광등을 아무리 밝혀도 햇볕이 주는 따뜻함과 그 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빛은 힘을 주고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큰 빛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신 것을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곧 그 땅에 큰 빛 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들이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게 된 원인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인간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회개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마음에 임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는 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자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를 따라 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창성케 한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죄문제가 해결되고 공의가 시행되면 경제적으로도 풍성하게 됩니다. 즐거움은 메시아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추수 때만 되면 원수들이 약탈해 감으로 슬픔이 컸었는데 이제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의 수고에 대해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는 대개 월급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즐거움은 좀 더 차원이 높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고자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열 번씩이나 말을 바꾸면서 놓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자 재앙을 내리심으로 결국 놓아주게 되었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백성들은 미디안의 압제로 인해서 추수 때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슬프고 억울했습니다. 힘이 없어서 추수한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바로와 미디안의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탐욕을 자극해서 로또 복권을 사게 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꿈꾸게 합니다. 한 목자님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건축 헌금을 드리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 마음이 가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절제의 열매로 드리는 물질을 원하십니다. 탐욕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놓아주지 않고자 애를 씁니다. 목자의 아킬레스건은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는 “목자님은 나를 몰라요”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집요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합니다. 죄에 빠져 낙심하게 만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 교만, 자기에 대한 관심, 사랑 등 죄성이 얼마나 질긴지 깨달을수록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처참하게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세계가 지금 미국의 탐욕과 룰을 지키지 않은 은행들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실물경제의 침체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비상대책을 쓰고 있습니다. 약발이 어느 정도 들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 나라에 어렵지 않았던 해가 있었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항상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운 복을 주셨습니다. 스위스 출신으로 외국인 한국역사 연구가 가운데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너무 빠른 한국의 발전을 유감스럽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치고 혁신적인 한국의 모습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무한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발전이 숨이 멎을 만큼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인, 노동자, 정치가, 예술가, 학자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흥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통치자로 오시는 한 아기는 어떤 분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는 그의 인성을,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말은 그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 아기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란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통치자이십니다. 그는 왕이십니다.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죄의 포로된 자기 백성들을 사단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어 구원해 내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누구입니까?
첫째, 그는 기묘자이십니다. 그의 탄생, 성장,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을 보면 참으로 기묘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므로 기묘한 분이십니다. 또 그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깊이가 있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눅4:22). 그가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몰아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눅4:36).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눅5:26)?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온 성이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상여 나가는 무리를 세워놓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오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눅7:16).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 또한 기묘한 일입니다. 그의 승천은 더욱 기묘합니다. 그는 승천하신 후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기묘합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일이 잘 될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라도 기다려보면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심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들이 기묘합니다. 영남대학 개척과 건축 역사의 시작,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루고 계신 역사가 기묘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그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둘째, 그는 모사(Counselor)이십니다. 모사는 책사요, 상담자입니다. 지혜자입니다. 그는 지혜 자체라고 할 만큼 어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 말씀 한 마디로 구원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하셨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지혜롭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세속적인 사두개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지혜를 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우리 것과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십니다(사55:8,9). 그 분은 카운슬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복잡 미묘한 것을 푸는데 한계를 느낍니다. 학업을 하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들로 인해서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그는 우리에게 코치요 상담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보호자로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해결사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그의 연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무장을 해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꺾으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죄감,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는 말씀 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우리의 내면을 재창조하십니다.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까지도 다스리십니다.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라. 잠잠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거사라 광인을 한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과 경험으로 한계를 짓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건축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막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함으로 그의 전능하심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외적인 건물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전을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며 믿음을 배우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넷째,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비’이며 아람어로 ‘아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무섭고 멀리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거룩하고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이 많으십니다. 그는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주는 분이시오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선하십니다. 그는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는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피하여 갈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약점이 있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자상한 육신의 아버지도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는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평화롭게 하십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마음을 낮출 때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1,27)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자녀들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하는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또 부족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나라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나라는 길어야 천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공평과 정의가 그 나라를 지배하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나라를 이루십니다. 그의 열심은 원어로는 질투입니다.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사모합니다. 그 나라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진리가 충만한 나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뒹굴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주님의 겸손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매일 한 아기 합창을 부르면서 성탄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성탄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고통의 때에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아기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한 아기는 연약해보입니다.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아기는 누구이기에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까? 그는 왕이시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는 낮아져서 오셨기에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그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망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한 아기를 마음 깊이 영접하고 구원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자기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방 변방지역입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안락한 가정을 파괴합니다. 전쟁에 패배한 결과 경제는 파탄이 나서 가난과 배고픔을 겪고, 백성들은 고생과 질병, 수치와 멸시, 포로, 죽음으로 고통했습니다. BC734년 북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와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강제 이민을 시켰습니다(왕하15:29). 또 앗수르 사람들을 그곳에 와 살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혼혈이 되었고 혼합종교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동족으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방의 갈릴리란 선민의 순수성을 상실한 잡놈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도적들이 들끓었고 국가에서도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서 버려진 땅과 같았습니다. 8장 21,22절을 보면 그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과 고통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는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에 행하는 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흑암 속에는 각종 균이 득실거리고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곳에서 사는 자들은 각종 병에 시달립니다. 흑암에 행하는 자는 죄의 세력에 시달립니다. 짙은 어두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흑암에 행하는 백성들에게는 비전이 없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에게 큰 빛이 비추입니다. 큰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모든 것이 환해지니 방향 감각이 생깁니다. 큰 빛은 따스함을 줍니다. 큰 빛은 치료의 광선을 발합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정기적으로 햇볕을 쬐라고 합니다. 햇볕을 쬐면 마음에 일할 의욕이 생깁니다. 저는 아침에 센터에 올라올 때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삶의 소망이 생깁니다. 큰 빛은 모든 피조물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큰 빛은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큰 빛은 형광등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형광등을 아무리 밝혀도 햇볕이 주는 따뜻함과 그 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빛은 힘을 주고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큰 빛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신 것을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곧 그 땅에 큰 빛 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들이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게 된 원인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인간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회개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마음에 임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는 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자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를 따라 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창성케 한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죄문제가 해결되고 공의가 시행되면 경제적으로도 풍성하게 됩니다. 즐거움은 메시아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추수 때만 되면 원수들이 약탈해 감으로 슬픔이 컸었는데 이제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의 수고에 대해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는 대개 월급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즐거움은 좀 더 차원이 높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고자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열 번씩이나 말을 바꾸면서 놓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자 재앙을 내리심으로 결국 놓아주게 되었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백성들은 미디안의 압제로 인해서 추수 때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슬프고 억울했습니다. 힘이 없어서 추수한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바로와 미디안의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탐욕을 자극해서 로또 복권을 사게 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꿈꾸게 합니다. 한 목자님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건축 헌금을 드리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 마음이 가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절제의 열매로 드리는 물질을 원하십니다. 탐욕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놓아주지 않고자 애를 씁니다. 목자의 아킬레스건은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는 “목자님은 나를 몰라요”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집요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합니다. 죄에 빠져 낙심하게 만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 교만, 자기에 대한 관심, 사랑 등 죄성이 얼마나 질긴지 깨달을수록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처참하게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세계가 지금 미국의 탐욕과 룰을 지키지 않은 은행들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실물경제의 침체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비상대책을 쓰고 있습니다. 약발이 어느 정도 들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 나라에 어렵지 않았던 해가 있었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항상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운 복을 주셨습니다. 스위스 출신으로 외국인 한국역사 연구가 가운데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너무 빠른 한국의 발전을 유감스럽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치고 혁신적인 한국의 모습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무한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발전이 숨이 멎을 만큼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인, 노동자, 정치가, 예술가, 학자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흥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통치자로 오시는 한 아기는 어떤 분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는 그의 인성을,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말은 그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 아기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란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통치자이십니다. 그는 왕이십니다.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죄의 포로된 자기 백성들을 사단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어 구원해 내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누구입니까?
첫째, 그는 기묘자이십니다. 그의 탄생, 성장,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을 보면 참으로 기묘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므로 기묘한 분이십니다. 또 그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깊이가 있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눅4:22). 그가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몰아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눅4:36).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눅5:26)?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온 성이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상여 나가는 무리를 세워놓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오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눅7:16).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 또한 기묘한 일입니다. 그의 승천은 더욱 기묘합니다. 그는 승천하신 후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기묘합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일이 잘 될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라도 기다려보면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심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들이 기묘합니다. 영남대학 개척과 건축 역사의 시작,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루고 계신 역사가 기묘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그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둘째, 그는 모사(Counselor)이십니다. 모사는 책사요, 상담자입니다. 지혜자입니다. 그는 지혜 자체라고 할 만큼 어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 말씀 한 마디로 구원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하셨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지혜롭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세속적인 사두개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지혜를 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우리 것과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십니다(사55:8,9). 그 분은 카운슬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복잡 미묘한 것을 푸는데 한계를 느낍니다. 학업을 하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들로 인해서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그는 우리에게 코치요 상담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보호자로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해결사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그의 연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무장을 해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꺾으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죄감,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는 말씀 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우리의 내면을 재창조하십니다.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까지도 다스리십니다.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라. 잠잠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거사라 광인을 한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과 경험으로 한계를 짓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건축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막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함으로 그의 전능하심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외적인 건물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전을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며 믿음을 배우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넷째,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비’이며 아람어로 ‘아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무섭고 멀리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거룩하고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이 많으십니다. 그는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주는 분이시오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선하십니다. 그는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는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피하여 갈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약점이 있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자상한 육신의 아버지도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는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평화롭게 하십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마음을 낮출 때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1,27)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자녀들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하는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또 부족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나라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나라는 길어야 천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공평과 정의가 그 나라를 지배하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나라를 이루십니다. 그의 열심은 원어로는 질투입니다.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사모합니다. 그 나라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진리가 충만한 나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뒹굴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주님의 겸손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매일 한 아기 합창을 부르면서 성탄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성탄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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