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행21강(22:30-24:27) 하나님게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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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21 강
말씀 | 사도행전 22:30-24:27
요절 | 사도행전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오늘 23장 말씀은 바울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내용이고, 24장은 벨릭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바울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으로 인해서 심문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의롭게 되고자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서 절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이 그를 살렸습니다.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그 소망으로 인해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습니다. 이 시간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는 바울의 삶을 우리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어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심문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71명의 공회원들이 둘러 앉아 있고 바울은 가운데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떨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며 담대하게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바울의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아니꼽다는 듯이 저 입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뺨을 한 대 맞자 화가 치밀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의 말을 받아 대답을 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회칠한 담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이 썩고 낡아서 곧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대제사장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불의와 거짓됨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재판하려는 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피의자를 때리는 일은 불법입니다(신 25:1,2; 요 7:51).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AD 47년부터 58년까지 봉직했는데 거만하고 성급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얼마 후에 40명의 결사대가 바울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민 일에 가담을 합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바울에게 책망을 받자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것 같습니다. 한편 바울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다 성장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섬김과 순종에서 자라야 합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바울은 즉시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사과했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재판 중에 처음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바울의 재판과 변호하는 과정에서 부활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등장합니다(행24:15; 26:6-8).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함으로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의 동조를 얻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이들이 크게 떠들자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이렇게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핍박 속에서 자중지란을 일으켜 빠져나왔습니다.
그 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밤이 되자 바울은 몹시 두려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린다던 그 결박과 환난이 현실로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히기 전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을 것도 각오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쇠사슬에 매이고 보니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원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욕설을 퍼부어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공회를 쑥대밭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로마 선교 계획도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두컴컴한 벽과 차디찬 죽음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심히 두렵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주님께서는 시의적절한 때에 바울에게 찾아와 큰 믿음과 용기와 비전을 굳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대인들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 반드시 자신을 로마로 보내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바울은 2년 동안의 옥중 생활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년 동안 바울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히 교제하며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다가 피곤하고 지친 분들을 찾아오십니다. 곁에 서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지치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섬겼는데 열매가 없을 때 헛 고생을 했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직장에서 야근을 하며 충성을 했는데 좋지 않은 평가점수를 받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의욕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 곁에 서서 “담대하라!” 말씀하시는 위로의 주님,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하시는 비전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35절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살인 음모에서 구출되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약속하신 대로 천부장을 통해서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등, 470명의 군인들에게 호위 임무를 맡깁니다. 바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오늘날 대통령 급의 경호 인력입니다. 또한 바울이 타고 갈 ‘말’까지 준비합니다(24). 하나님은 바울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로마에 보내고자 하십니다. 비록 그가 죄수의 몸으로 심문을 받지만 이를 통해서 총독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며 상급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된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검사장급 출신 변호사인 더둘로를 대동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24장 3절을 보십시오. 더불로는 장황하게 벨릭스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잔인무도하고 뇌물과 여색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낯 뜨거운 찬사를 보냅니다. 아첨을 마친 그는 바울을 어떻게 고소합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방청석에 있던 유대인들은 옳소, 옳소 하며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말하라고 표시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을 소요케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을 뿐이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안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기간에 아무와 변론한 적도 없고, 회당과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한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소에 대해서는 오해를 불식시켰습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기독교가 결코 유대교의 하나님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며, 성경을 부인하지 않고, 동일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에 대해서도 부인했습니다. 17-21절을 보면, 바울은 여러 해 만에 동족에게 전달할 구제금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결례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도 보았습니다. 그때 소동을 일으킨 자는 바울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21:27). 그들이 바울에 대해서 고소할 것이 있었으면 직접 와서 했어야 합니다. 또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바울은 오직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심문을 받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칼에 더불로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하나님께 향한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다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바울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교 신앙의 뿌리인 죽은 자의 부활이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로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또한 각 개인이 마지막 날에 어떤 부활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공통점은 둘 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숨 쉬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악인의 부활 즉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의인의 부활 곧 영생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됩니다.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지만 말씀을 따라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고난을 받지만 복음을 전하고자 힘을 씁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공허함을 메꿀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무의미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의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영원한 삶이 결정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영원한 삶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때까지 발전시켜 온 과학 문명도 영원한 나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약해지면 이 땅에 소망을 두고 먹고 마시며 즐기고자 합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처럼 육체가 되어가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5:34).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가르치는 바울. 바울의 변명을 들은 벨릭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AD 52년부터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마리아에서 고급 관리로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0년 이상 팔레스틴 지방에 거하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재판을 연기시켰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돌보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했습니가?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여기서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게 되는 칭의가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절제는 육체적 소욕이나 감정, 심지어 이성이 반대할 때라도 옳은 일을 하도록 의지를 정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거절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욕구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절제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양심과 의지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우리 속에 넣어두셨습니다. 유혹이 오고 내 모든 것이 죄 짓기를 원할 때 양심은 경종을 울립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부추기고 있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양심은 경고합니다.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때마다 점점 더 그 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집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거나 양심이 굳은 사람들은 절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의지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어떤 일을 하라고 부추기고 양심은 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 그 둘 간의 다툼을 쉬게 하는 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절제의 훈련은 옳은 것을 하도록 의지를 드리는 것입니다. 절제를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과 모이기를 힘쓰고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장차 오는 심판’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불의와 불법을 행한 자들에게 장차 있게 될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도록 도전했습니다. 그럴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성경공부를 한 벨릭스는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들을 때에 두려웠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공포를 느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두려움입니다. 불의와 불법을 행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바울의 메시지는 큰 충격과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결국 총독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바울의 말을 중단시킵니다. 그는 여색을 즐기고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말씀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바울을 불러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2년 동안 바울과 성경을 공부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었습니다. 결국 그는 네로 황제의 소환을 당하여 어느 시골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헤롯 궁에 있는 감옥에 갇혀 2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은 장래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재판 연기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금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의와 절제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말씀 | 사도행전 22:30-24:27
요절 | 사도행전 24:15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오늘 23장 말씀은 바울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내용이고, 24장은 벨릭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바울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으로 인해서 심문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의롭게 되고자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서 절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이 그를 살렸습니다.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그 소망으로 인해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습니다. 이 시간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는 바울의 삶을 우리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어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심문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71명의 공회원들이 둘러 앉아 있고 바울은 가운데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떨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며 담대하게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바울의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아니꼽다는 듯이 저 입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울이 뺨을 한 대 맞자 화가 치밀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의 말을 받아 대답을 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회칠한 담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이 썩고 낡아서 곧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대제사장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불의와 거짓됨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재판하려는 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피의자를 때리는 일은 불법입니다(신 25:1,2; 요 7:51).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AD 47년부터 58년까지 봉직했는데 거만하고 성급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얼마 후에 40명의 결사대가 바울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민 일에 가담을 합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바울에게 책망을 받자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것 같습니다. 한편 바울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다 성장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섬김과 순종에서 자라야 합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바울은 즉시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사과했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재판 중에 처음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바울의 재판과 변호하는 과정에서 부활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등장합니다(행24:15; 26:6-8).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함으로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의 동조를 얻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이들이 크게 떠들자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이렇게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핍박 속에서 자중지란을 일으켜 빠져나왔습니다.
그 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밤이 되자 바울은 몹시 두려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린다던 그 결박과 환난이 현실로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히기 전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을 것도 각오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쇠사슬에 매이고 보니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원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욕설을 퍼부어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공회를 쑥대밭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로마 선교 계획도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두컴컴한 벽과 차디찬 죽음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심히 두렵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주님께서는 시의적절한 때에 바울에게 찾아와 큰 믿음과 용기와 비전을 굳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대인들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 반드시 자신을 로마로 보내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바울은 2년 동안의 옥중 생활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년 동안 바울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히 교제하며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다가 피곤하고 지친 분들을 찾아오십니다. 곁에 서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지치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섬겼는데 열매가 없을 때 헛 고생을 했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직장에서 야근을 하며 충성을 했는데 좋지 않은 평가점수를 받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의욕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 곁에 서서 “담대하라!” 말씀하시는 위로의 주님,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하시는 비전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35절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살인 음모에서 구출되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약속하신 대로 천부장을 통해서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등, 470명의 군인들에게 호위 임무를 맡깁니다. 바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오늘날 대통령 급의 경호 인력입니다. 또한 바울이 타고 갈 ‘말’까지 준비합니다(24). 하나님은 바울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로마에 보내고자 하십니다. 비록 그가 죄수의 몸으로 심문을 받지만 이를 통해서 총독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며 상급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된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검사장급 출신 변호사인 더둘로를 대동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24장 3절을 보십시오. 더불로는 장황하게 벨릭스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잔인무도하고 뇌물과 여색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낯 뜨거운 찬사를 보냅니다. 아첨을 마친 그는 바울을 어떻게 고소합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방청석에 있던 유대인들은 옳소, 옳소 하며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말하라고 표시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을 소요케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을 뿐이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안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기간에 아무와 변론한 적도 없고, 회당과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한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소에 대해서는 오해를 불식시켰습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기독교가 결코 유대교의 하나님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며, 성경을 부인하지 않고, 동일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에 대해서도 부인했습니다. 17-21절을 보면, 바울은 여러 해 만에 동족에게 전달할 구제금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결례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도 보았습니다. 그때 소동을 일으킨 자는 바울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21:27). 그들이 바울에 대해서 고소할 것이 있었으면 직접 와서 했어야 합니다. 또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바울은 오직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심문을 받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칼에 더불로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하나님께 향한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다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바울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교 신앙의 뿌리인 죽은 자의 부활이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로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또한 각 개인이 마지막 날에 어떤 부활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공통점은 둘 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숨 쉬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악인의 부활 즉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의인의 부활 곧 영생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됩니다.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지만 말씀을 따라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고난을 받지만 복음을 전하고자 힘을 씁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공허함을 메꿀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무의미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의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영원한 삶이 결정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영원한 삶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때까지 발전시켜 온 과학 문명도 영원한 나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약해지면 이 땅에 소망을 두고 먹고 마시며 즐기고자 합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처럼 육체가 되어가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5:34).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가르치는 바울. 바울의 변명을 들은 벨릭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AD 52년부터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마리아에서 고급 관리로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0년 이상 팔레스틴 지방에 거하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재판을 연기시켰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돌보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했습니가?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여기서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게 되는 칭의가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절제는 육체적 소욕이나 감정, 심지어 이성이 반대할 때라도 옳은 일을 하도록 의지를 정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거절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욕구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절제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양심과 의지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우리 속에 넣어두셨습니다. 유혹이 오고 내 모든 것이 죄 짓기를 원할 때 양심은 경종을 울립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부추기고 있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양심은 경고합니다.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때마다 점점 더 그 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집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거나 양심이 굳은 사람들은 절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의지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어떤 일을 하라고 부추기고 양심은 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 그 둘 간의 다툼을 쉬게 하는 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절제의 훈련은 옳은 것을 하도록 의지를 드리는 것입니다. 절제를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과 모이기를 힘쓰고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장차 오는 심판’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불의와 불법을 행한 자들에게 장차 있게 될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이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도록 도전했습니다. 그럴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성경공부를 한 벨릭스는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들을 때에 두려웠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공포를 느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두려움입니다. 불의와 불법을 행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바울의 메시지는 큰 충격과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결국 총독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바울의 말을 중단시킵니다. 그는 여색을 즐기고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말씀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바울을 불러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2년 동안 바울과 성경을 공부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었습니다. 결국 그는 네로 황제의 소환을 당하여 어느 시골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헤롯 궁에 있는 감옥에 갇혀 2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은 장래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재판 연기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금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의와 절제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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